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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51화 (51/227)

51 저택으로 돌아가다 (1)

“도비랑 살면 좋은 점이 뭐예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셀비스가 침착하게 물었다. 나랑 살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그 물음에 호쾌하게 대답하려다, 잘 생각해 보니 딱 이거다! 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글쎄…. 나랑 살면 좋은 점이 있나?”

뼈를 치는 셀비스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음식이 신기하고 맛있다.’ 이건 요리사인 셀비스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껏 셀비스가 해 준 음식 전부 남들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독보적인 요리였다. 심지어 맛도 있으니 음식이 신기하고 맛있다는 이유로는 넘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 또 뭐가 있지. 아, 귀여운 노반이 있다. 그치만 젠도 그렇고, 마린도 그렇고 노반을 나처럼 귀여워하지는 않는데.

“음….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지?”

“자유?”

“셀비스가 뭘 하든 내게 피해만 안 온다면 신경 안 쓸 거고, 요리도 하고 싶은 만큼 해도 돼. 아, 우리 밥은 항상 같이 먹어야 되는데 가끔은 나도 요리하고 그래.”

“그렇습니까?”

“응, 또 뭐가 있지? 방 많으니까 개인 방 쓸 수 있고, 아! 우리 저택 뒷산을 네가 보게 된다면 꼭 우리 저택에서 살고 싶다 할걸?”

그래,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저택 뒷산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지.

“어쨌든,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난 그냥 숨 쉬면서 살고 있고, 노반이라고 진짜 귀여운 아이는 텃밭에서 놀고, 마린은 티타임 좋아하고, 젠도 나처럼 숨 쉬고 잘 살고 있어.”

나 정말 설득 못하는구나. 셀비스가 제안을 거절해도, 왜 거절했나 물어볼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게 확 꽂히는 게 없는걸. 숨만 쉬고 사는 사람들이랑 뭘 하겠어.

“그렇습니까?”

“응. 그래서 온다고, 안 온다고?”

“할머니께서는 당장 도비님을 따라가라고 하시지만, 전 아직 할머니 곁에 있고 싶습니다.”

“아아, 그런 거야? 그럼 우리 저택에 오기 싫다는 건 아니네?”

“네, 싫진 않습니다. 오히려 같이 살고 싶습니다.”

내 형편없는 설득이 먹혔단 말이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같이 살고 싶은 이유를 물어봤다. 그에 셀비스는 조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도비를 보고 있으니 왠지 같이 살게 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이 영주성에 갇히는 게 재밌는 일이라면 정말 사양하겠다. 난 우리 마린이랑 젠 그리고 노반이랑 아무 걱정 없이 하루하루 편하게 사는 게 꿈인 사람이다. 재미? 그런 거 없어도 된다.

“내 인생에서의 재미는 노반의 귀여움을 보는 것과 젠의 얼굴을 보는 것, 그리고 마린의 스콘을 먹는 것뿐이야. 이게 재밌어?”

“제가 생각하는 재미의 기준이 다르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도비는 제게 재미를 가져다줄 것 같….”

셀비스가 말하는 도중, 만찬실의 문이 열리고, 비어 있는 하얀 새장을 든 미네르바가 들어왔다. 미네르바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짧은 목례로 예의를 차렸다.

“황자님, 오랜만입니다.”

“응, 정말 오랜만이야. 내가 어제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압니다. 일부러 피했는걸요.”

당연하다는 듯 받아치는 미네르바에게 벙찐 얼굴을 보여 줬다. 그저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피한 거였어?

“피했다고?”

“제가 시내에 나간다고 하면 같이 가자고 하셨을 거 아닙니까. 전 황자님 투정 못 받아 줍니다.”

“응.”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미네르바는 선물이라며 들고 있던 하얀 새장을 내게 내밀었다. 그러고는 만찬실의 창문을 연 뒤 휘파람을 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장만큼 하얀 새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미네르바에게 날아왔다. 날아온 새는 뱁새였다.

“뱁새네.”

“전서구입니다.”

뱁새가 전서구라니,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구나. 보통 전서구는 비둘기를 쓰지 않나? 어째서 뱁새?

“뱁새가 전서구라고?”

“무슨 소리이십니까, 이 아인 비둘기입니다.”

“그럴 리가.”

몸뚱이도 작고, 날개도 작고, 얼굴도 저렇게 뚱하니 귀여운데 뱁새가 아니라 비둘기라고? 아, 여기는 뱁새를 비둘기라고 부르나?

“제가 봐도 뱁새네요.”

“그치.”

식사를 끝낸 젠이 가까이 다가와 의견을 보탰다. 셀비스도 뱁새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자기 할머니의 체면을 꺾지 않겠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았다.

“할망구, 저건 누가 봐도 뱁새야. 비둘기는 날개도 길고, 눈도 부리부리해서 징그럽다고. 쟨 누가 봐도 귀엽잖아.”

“비둘기라니까요.”

“뱁새라니까?”

“종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뱁새든 비둘기든 전서만 잘 전해 주면 그게 전서구 아니겠습니까.”

셀비스가 나와 미네르바의 언쟁을 중지시켰다. 그래, 귀여운데 종이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래서? 이 새가 선물이야?”

“네, 맘에 드시죠?”

“귀엽긴 귀여운데, 우리 집에 여우가 한 마리 있어서 새는 좀 위험해.”

물론 우리 노반은 걱정 없다. 노반은 새를 뜯어 먹는 여우도 아니고, 애초에 드로이프라는 이종족이니까. 하지만 내가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노반은 별일이 없으면 여우로 변해 내 무릎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새가 보면 놀라지 않을까 싶다.

“괜찮습니다. 마물을 보고도 떨지 않고 바로 지나치는 강한 아이니까요.”

“그건 안전 불감증 아닐까. 한입에 먹힐 텐데.”

“그만큼 재빠르니 걱정 마십시오.”

선물은 받지 않으려고 했다. 난 친구도 없어서 전서구가 필요 없을 뿐더러, 친구가 아니더라도 딱히 편지를 보낼 곳이 없다. 하지만 뱁새의 탈을 쓴 비둘기는 내가 마음에 드는지 내 어깨 위에 올라와 동그란 머리를 비볐다.

“그 아이는 황자님이 마음에 드나 보네요.”

“그럼 또 내가 데려가야지. 근데 얘 혼자 날아가서 잃어버려도 난 모른다.”

“똑똑하니 돌아올 겁니다.”

“그렇담 다행이고. 아, 이름은 따로 있어?”

“점주는 파이어 드래곤이라고 지었지만, 제 생각엔 새로 지어 주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점주 나와서 엎드려.

드래곤의 이름이 나오자 뱁새의 탈을 쓴 비둘기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젠의 표정이 묘해졌다. 파이어 드래곤이라니, 차라리 인비저블 드래곤 하지 그랬냐. 그럼 재미라도 있지. 아니, 이름을 재미로 지으면 안 되겠지만.

“그럼 줄여서 파드 합시다.”

셀비스는 자신이 누구도 반박 못 할 기발한 생각을 했다는 듯 뱁새의 탈을 쓴 비둘기의 이름을 파이어 드래곤, 줄여서 ‘파드’라고 부르자 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름은 재미로 지으면 안 된다. 특히 셀비스, 나는 도비고 쟤는 파드야?

“너도 좋지, 파드?”

활짝 웃은 셀비스가 내 어깨 위에 올라간 뱁새 탈을 쓴 비둘기의 뺨을 만졌다. 그러자 뱁새의 탈을 쓴 비둘기는 셀비스에게 응답하듯 짹짹 소리를 내며 셀비스의 손가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더 좋은 이름 지어 줄 수 있는데 어째서 파드를 선택한 거야. 너 후회한다.

“근데 할망구, 할망구 손자는 나랑 같이 안 간대. 할망구랑 같이 있겠다고.”

“정말이니?”

“할머니 두고 내가 어딜 가.”

정말이냐는 미네르바의 물음에 셀비스가 다정하게 대답했다. 저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할머니한테는 잘하는구나.

미네르바는 얼른 황자님과 함께 가라며 셀비스를 설득했고, 셀비스는 아직 정정한데 왜 떨어져야 되냐는 듯, 같이 있겠다며 미네르바를 설득했다. 한참을 다정하게 옥신각신하던 그들은 한 가지 결론을 냈다.

“그럼 내가 죽으면 가거라.”

“알았어.”

“그렇게 알고, 황자님은 제가 죽으면 제 손자를 받아 주셔야 합니다.”

명쾌한 대답이긴 한데, 좀 극단적인 것 같지 않아? 살짝 멍한 얼굴로 젠을 바라봤지만, 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자며 내게 눈치를 줬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미네르바, 죽기 전에 한 번 더 보자. 내 저택으로 놀러 와도 좋고.”

“네, 그러겠습니다.”

새장은 젠이 들었고, 나는 셀비스에게서 파드…. 하아, 이름 진짜 암담하네. 셀비스에게서 파드를 건네받았다. 아무리 봐도 뱁새인데.

우리는 미네르바와 셀비스의 배웅을 받으며 영주성의 정문으로 당당히 나갔다. 영주는 부인이랑 박 터지게 싸우고 있을 테니 우리가 나가든 들어오든 관심도 없을 거다.

내가 다음에도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땐 크로스반 영주성이 아니라 도브로미르 성이 됐을 때다. 다신 오나 봐라.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젠의 흑마를 타야 했다. 영주한테 돌아갈 준비를 부탁했다면 편하게 마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영주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젠의 흑마는 마커스의 마구간에 있었다. 어젯밤은 몰래 들어온 거라 영주성에 말을 맡길 수 없어 그나마 친분이 있는 마커스의 집에 흑마를 맡긴 것 같다. 마커스가 젠을 조금 꺼려 하는 것 같지만 마커스가 뭐 어쩌겠는가. 정 안 되면 마린을 인질로 마커스를 협박해도 잘 먹힐 거다. 흑마는 나를 보더니 ‘또 너냐.’라는 눈빛을 했다.

“얘는 나 안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가넷은 사람이라면 다 싫어해요. 그래도 미르 님은 싫어하지는 않는 편이에요.”

“가넷? 여자애였어?”

고개를 끄덕인 젠은 모르고 있었냐는 눈빛을 보냈다. 당연히 몰랐지. 말을 타면 물어볼 새도 없이 당황할 일이 생겼으니. 가끔 보이는 눈빛으로 그냥 날 싫어하는 말인 줄 알았지.

젠의 도움으로 뾰로통한 가넷 위에 올라탔다. 내가 탔으니 곧바로 뒤에 올라탈 줄 알았던 젠은 푸르르 입을 떠는 가넷을 빤히 바라보더니 긴장하고 있던 내게 말했다.

“혼자 타 보실래요?”

“응?”

“아무래도 혼자 탈 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알려 주면 안 될까, 좀 온순한 말로?”

“가넷 정도면 온순한 편이에요.”

온순해? 젠은 가넷의 눈빛이 안 보이나? 날 잡아먹으려고 벼르고 있잖아! 나 낙마하면 넌 첫째 형님한테 혼난다!

젠은 가넷의 이마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의사를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여 혼자 타 보라고 내게 고삐를 쥐어 주었다. 나는 손을 덜덜 떨며 넘겨받은 고삐를 쥐었고, 가넷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말발굽을 굴렀다. 기분 나쁘니? 미안, 그래도 네 주인이 타 보라는데 별수 있겠냐.

“어떻게 해야 돼?”

“저번에 움직였던 거 기억하시죠?”

“으응….”

그건 잊지 못해서 문제다.

“가넷은 제가 잘 잡을 테니 미르 님은 걱정 말고 움직임에 익숙해지세요.”

“응.”

젠의 신호로 말발굽을 굴리던 가넷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세를 잡고 천천히 걷는 것에 익숙해지자 속도를 조금 올렸다. 하지만 비루한 내 몸뚱이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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