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저택으로 돌아가다 (2)
“악!”
떨어진다! 눈을 꽉 감고 떨어질 준비를 하는 중, 빠르게 내 뒤로 올라탄 젠이 나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10년은 감수한 것 같다. 깜짝 놀라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그에게 고삐를 넘기곤 말했다.
“첫째 형님이 왜 내게 말을 타지 말라고 한 건지 이해가 돼.”
“천천히 익숙해지면 돼요.”
“나중에, 오늘은 말고.”
“알았어요, 다음에 해요.”
고삐를 고쳐 잡은 그는 가넷을 약하게 찼고, 가넷은 아까 전보다 더 활기차게 저택을 향해 달렸다.
남들에게는 평범하게 조금 빠른 속도였겠지만 내게는 허리가 바스러질 정도의 속도였다. 덕분에 빠르게 도착했지만 내일이면 몸살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택에 도착한 가넷이 히이잉 하고 크게 울자 조용하던 현관문에서 노반이 튀어나왔다.
“미르!”
“노반.”
어딘가가 많이 급해 보이는 노반을 부르며 젠의 도움을 받아 가넷에서 내렸다. 노반은 내가 내리자 허겁지겁 달려와 소매를 잡으며 안아 달라 보챘고, 허리에 문제가 있었지만 우리 노반은 귀여우니 안아 줬다. 윽, 내 허리 살려….
“미르! 미르! 마르!”
“노반, 노반, 노반.”
“미르, 어떻게 된 거야! 영주성에서 잘 있는 거 아니었어? 나랑 마린을 데려다준 기사들이 미르는 영주성에 잠깐 머문다고 했는데, 젠은 그게 아니라 하고!”
“노반, 진정해.”
“어떻게 진정해! 미르가 갇혀 있던 거잖아! 감금!”
내가 말 안 해도 우리 노반은 잘 알고 있었다. 감금…. 그렇지, 감금이긴 한데.
“노반한테 줄 편지가 있는데, 읽어 볼래?”
“편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미르! 사실대로 말해 줘! 영주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 나도 미르 데리러 가서 영주성 깽판 치고 싶었는데 젠이 말렸단 말이야.”
깽판은 또 어디서 배운 말이야. 아, 마린과 젠일 리는 없으니 자동적으로 나겠구나. 내가 잘못했어.
“괜찮아, 노반. 나 멀쩡하잖아. 봐, 살도 쪘어.”
“정말이야? 그러고 보니 조금 건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치?”
셀비스에게 보여 준 것과 마찬가지로 노반에게 팔을 내밀어 살이 쪘다는 걸 확인시켜 줬다. 덕분에 화가 조금 가라앉은 노반에게 어젯밤 젠의 옆에서 썼던 편지를 건네줬다. 편지를 건네받은 노반은 내가 못 미더운지 의심하는 눈빛을 지으며 편지를 열었다. 무게를 조절하고 있어 가벼웠던 노반은 편지를 읽을수록 무거워졌다. 노반, 형아 허리까지 부러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편지를 읽는 것에 집중하는 노반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져 갈 때, 힘을 쓴 가넷을 돌보고 마구간에서 나온 젠이 한 손으로 노반의 목덜미를 잡아 떼어 냈다. 노반에게는 미안하지만 덕분에 허리가 한결 편해졌다.
나와 떨어진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노반은 편지를 읽다 말고 젠에게 화를 냈다.
“왜!”
“떨어지세요.”
“어젯밤은 너랑 계속 있었을 거 아니야! 오늘은 나랑 있을 거야!”
“미르 님 힘들어요.”
“헉! 미르 힘들었어? 미안해!”
곧바로 사과하는 노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을까.
“괜찮아.”
“괜찮다잖아! 미르~ 다시 안아 줘!”
괜찮다는 내 말에 노반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안아 달라 보챘다. 철이 들다 만 네 살 아이의 느낌이다. 형아도 너무 안아 주고 싶은데, 나중에 안아 주면 안 될까?
“안 돼요. 아기도 아니고, 노반 혼자 걸으세요.”
“씨잉!”
젠은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려는 노반을 건성으로 대충 쳐 내며, 노반의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내게 노반 몰래 조용히 들어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좋은 탱커인 젠의 어그로로 중간 보스인 노반 몰래 들어간 저택에는 라스트 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 건지, 턱까지 내려오는 다크 서클에 눈 주위가 붉어진 마린이 손수건을 쥐어뜯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린, 나 왔어.”
“황자님, 제가… 외박은… 안 된다고…. 흐어어엉!”
외박은 안 된다 말하던 마린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엄청 혼날 줄 알고 긴장했는데, 마린의 울음에 긴장은 당황으로 바뀌었다. 마린이 울어…?
“마린!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아, 나 때문에 우는 거지? 마린, 나 진짜 괜찮아.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이거 보여? 나 살쪘잖아! 나 거기서 잘 있다 왔어. 친구도 사귀었고!”
노반에게 했던 것처럼 마린에게도 팔을 내밀어 살이 쪘다는 걸 확인시켜 줬다. 그러곤 영주성에서 잘 있다 왔다며 친구도 사귀었다고 말했다. 열다섯 살 아이도 친구라면 친구지.
“황자님…. 흐윽…. 제가… 제가…. 흐어어엉!”
“아이고,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손수건을 쥐어짜며 울고 있는 마린을 다독였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안정되는 마린에게 진정이 되는 허브 차를 건넸다. 코를 훌쩍거리며 한 모금 마셔 진정한 마린이 이번엔 붉게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내게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황자님. 부디 벌해 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마린이 뭘 잘못했어?”
“성가신 걸 제일 싫어하시는 황자님께서 일주일이나, 그것도 자발적으로 다른 곳에 계시다니요.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제 잘못입니다. 보좌인으로서 실격입니다.”
마린의 논리적인 말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날 너무 잘 알고 있긴 한데.
“마린 잘못 아니야. 알았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도 없었을 테고. 그리고 나 정말 거기서 잘 지냈으니까 마린이 죄송할 건 하나도 없어.”
“아닙니다. 제 잘못ㅇ….”
“마린 잘못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오히려 영주성은 가 보고 싶었어. 너도 알다시피 의사들이 잔뜩 잡혀 있었잖아. 마린 말대로 난 성가신 거 싫어하니까, 앞으로 내가 귀찮아지지 않으려면 의사들 돌려보내야겠다 싶어서 들어간 거야. 의사들도 다 돌려보냈고. 나 잘했지?”
“잘하셨…. 크응! 잘하셨습니다.”
팽, 크게 코를 푼 마린을 잘 다독여 방으로 돌려보냈다. 젠이 영주성으로 떠난 후로 잠도 안 자고 날 기다렸을 게 훤히 보였다.
마린은 내가 ‘진짜’ 4황자가 아니란 걸 눈치채고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충성심이 강한 줄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동안 나를 걱정하고 돌봐 준 것은 그저 자신보다 어리니 단순하게 걱정하는 마음인 줄 알았을 뿐, 그 속에 담긴 충성심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마린이 나를 걱정하는 건 잘 알고 있다. 덕분에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 있으니까. 만약 마린이 없었다면 이렇게 평범하게 지내는 것도 힘들었겠지. 이제 좀 얌전하게 잘 살아서, 우리 마린 걱정 그만 시켜야겠다.
저택으로 돌아와서는 로이의 해독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튀겨지는 팝콘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약에 관한 지식이 너무 재미있었고, 해독약을 제조하며 발생하는 결과물도 제법 흥미로웠다.
해독약을 만드는 동안은 밥도 먹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밥 대신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빵은 몇 번 베어 먹고 나머지는 파드에게 뜯어 줬다. 한번은 그 광경을 들켜서 마린에게 호되게 혼났다. 걱정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파드는 자유로운 뱁새의 탈을 쓴 비둘기였는데, 새장 문을 열어 놔도 원하는 만큼 부유하다 다시 돌아오는 똑똑한 아이라 족쇄가 되는 새장을 아예 없앴다. 밥과 물은 따로 챙겨 주고 있지만 잘 먹지 않는다. 아마 부유하며 알아서 찾아 먹는 것 같았다. 똑똑한 아이였다.
가끔은 작은 종이를 매달고 왔었는데 <남쪽>, <숲>, <히츨턴>, <부부>, <남아>, <남매X> 등등 어느 특정한 단어가 쓰여 있었다. 나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였지만 미네르바가 보낸 정보니 중요할 것 같아 외우고 바로 태웠다.
“미르! 그거 언제 끝나?”
“음, 글쎄. 일주일 안에는 완성될 것 같아.”
“정말? 알았어!”
노반은 로이의 해독제가 하루라도 빨리 만들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성에 있을 때 노반에게 썼던 편지 중,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숲을 담은 듯한 녹안을 가졌다는 클로에와 로이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노반은 그 쌍둥이 남매를 보고 싶어 했고, 영주성에 다시 가고 싶지 않은 나 대신 전해 주기로 했다. 가는 김에 아크레나의 팔찌도 받아 오고.
노반을 혼자 보내는 건 조금 걱정이 돼, 젠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똑 부러진 마린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신분이 어쩌고저쩌고 할 것 같아, 영주가 빌빌 기는 젠이 가기로 했다. 물론 동행자가 젠이 돼 버려 노반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편지에 쓴 로이와 클로에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듯싶었다.
세르비스는 보고 싶지 않냐 물었더니 ‘어차피 같이 살 거 아니야? 그때 보면 돼!’라며 셀비스와 함께 사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반응을 보여 줬다.
“미르, 이것 좀 먹어. 살찐 거 도로 빠졌잖아.”
“괜찮아, 배 안 고파. 노반 많이 먹어.”
노반이 질긴 약초를 빻고 있는 내게 색색의 마카롱을 건네주었지만, 노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프지 않기도 하고, 빈속에 단 음식이 들어가면 위장이 아프다.
요즘 마린의 취미는 베이킹이다. 스콘, 시나몬 롤, 쿠키, 크루아상 등등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를 구워 냈고 오늘은 기어이 그 어렵다는 마카롱까지 만든 것이다. 마린이 구워 낸 마카롱 쿠키는 이전에 만들었던 과일청을 베이스로 사용해서 딸기, 유자, 석류, 블루베리 등등 다양한 맛의 필링과 예쁜 색의 마카롱 쿠키가 구워졌다.
“놓고 가면 먹을게.”
“안 먹을 거 알고 있어! 마린이 먹는 거 확인하고 오라 했단 말이야.”
“…그럼 간단하게 수프라도 먹고 먹을게.”
“응! 가져올게!”
해독약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 밥을 꾸준히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마린은 대용량 채소 수프를 끓여 놨다. 하지만 이것저것 한다고 한 입도 먹지 못해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마린이 서운해했었다.
작은 쟁반 위, 대접에 담아 온 채소 수프를 원샷했다. 거짓말 안 하고 죽을 뻔했다. 노반이 건네는 햇병아리 색의 유자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먹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달지 않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이번 마카롱은 피스타치오 맛이 나는 마카롱이었다. 피스타치오의 고소하고 달달한 맛이 일품이었다. 마린은 빵집이나 디저트 카페를 했으면 정말 잘했을 거다. 빵도 잘 굽고, 티도 좋아하고, 스위트한 디저트까지 잘 만드니까.
수프도 다 먹고, 마카롱도 일정량을 먹은 것을 확인한 노반은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문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았다. 그런 면까지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