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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53화 (53/227)

53 저택으로 돌아가다 (3)

예상했던 일주일보다 빠르게 해독약이 만들어졌다. 그 이유는 내가 잠을 자야 할 시간까지 해독약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노반에게 해독약을 건네준 다음 곧바로 쓰러져 기억이 끊겼다.

“낑!”

“….”

“황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응…. 여긴 어디야?”

노반은 여우의 모습으로 내 배 위에 올라가 있고, 마린은 침대 옆 의자에, 젠은 한쪽의 커튼만 쳐져 있는 창문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운 자리를 보니 내 방이 아니었다. 내 방이었다면 달리가 선물해 준 소시지 베개가 있어야 했는데, 소시지 베개는커녕 황금색의 쿠션들만 잔뜩 놓여 있었다.

“크로스반 영주성입니다. 황자님의 상태를 의사에게 보이느라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랬구나. 나 얼마나 잤어?”

“주무신 게 아니라, 일주일 내내 기절하셨습니다.”

“기절?”

“네. 밥도 잘 안 드시고, 잠도 안 주무시고, 쉬지도 않으셨으니 쓰러질 만도 하지요.”

“아냐. 나 밥도 먹고, 잠도 좀 잤고, 쉬기도 했는데?”

건강에 문제될 게 없다는 고집스런 내 대답에 창문 옆에 서 있던 젠이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3일에 한 끼, 하루 10분 주무셨고, 쉬는 건 보지도 못했어요.”

“….”

“체력도 없으신 분이 일주일 내내, 게다가 밤을 새우면서 무언가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생각하나요?”

젠은 노반을 가르칠 때의 엄한 표정을 지으며 쭈뼛거리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엄한 분위기에 눌린 나는 고개를 숙이곤 울지는 않았지만 동정심을 사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무엇을 잘못하셨죠?”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 조곤조곤 물어보고 있었지만, 그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는 절대 자신을 귀찮게 혹은 걱정시키지 말라는 강력한 주장을 담고 있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무리하시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다물었다. 무리하시면 뭐? 묶어서 가둬 두고 하나하나 다 챙겨 주게? 그러면 나야 좋은데. 솔직히 요즘 사는 게 조금 귀찮아서 말이야. 게다가 젠과 함께 있으면 눈 호강도 되고, 애정도 생기지 않을까? 내 바람일 뿐이지만. 조금 뜸을 들이며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무리하면 어떻게 되는데?”

“궁금하면 해 보세요.”

순간적으로 가라앉는 그의 눈빛에 놀라 몸을 떨었다. 조용히 넘어가려던 가벼운 마음을 고쳐먹었다. 저 눈빛은 애정을 만들자는 눈빛이 아니다, 한 번만 더 걸리면 잡아서 족쳐 버리겠다는 신호지.

“의사는 뭐래?”

“그냥 주무신 거래요. 밥 잘 먹고, 상태 괜찮아질 때까지 무리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마린도 몸을 막 쓰고 쓰러진 내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젠이 선수를 쳐서 아무 말 없이 넘어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노반은 왜 여우의 모습으로 있는 거야?

“노반…?”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르 님이 쓰러진 후부터 미르 님 앞에선 여우 모습을 했어요.”

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말투로 노반의 상태를 알려 줬다. 이해가 되질 않아 멀뚱한 표정으로 젠을 한번 바라보고, 내 위에 누워 있는 노반의 동그란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디 아픈가?

“노반, 어디 아파?”

“낑….”

노반은 아프냐고 묻는 내 말에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똘망똘망했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펑펑 울기 전에 달래 줘야 하는데 저것마저 귀여우면 어떡하지.

“인간으로 변하기 싫어?”

“낑…낑….”

인간으로 변하기 싫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변하기 싫은지 알려 줬으면 하는데, 노반의 언어가 드로이프의 언어인지, 여우의 언어인지를 떠나서 낑낑어를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 주면 좋겠는데. 내가 그렇게 믿음직하지 못한 거야?”

“낑!”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걸?”

“끼잉….”

“노반, 문제가 생기면 대화를 해서 풀어 가야 돼. 저번에도 말했었지?”

아직 어린 드로이프인 노반은 잘못을 했거나 문제가 생기면 도망치거나 입을 다무는 경향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야기를 해서 풀어 나가자고 했지만, 큰 잘못을 하면 자신이 버려질까 두려워 고민과 불안한 마음을 숨겼었다. 노반은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평소보다 더 작은 어린아이로 변했다.

“이제 말할 준비 됐어?”

“웅….”

준비됐다고는 하지만 노반은 아직 망설이는지 꾹 쥔 주먹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노반의 준비가 끝나길 잠자코 기다렸다. 곧이어 작은 입술이 열리고는 울음이 섞인 불안한 목소리가 나왔다.

“미르가 아픈 거… 그거 나 때문이잖아. 나는 미안해서….”

불안했던 목소리는 끝내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노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아픈 게 왜 노반 때문이야?”

“내가 쌍둥이를 빨리 보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미르가 피곤했던 거잖아. 내가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미르가 쓰러질 일 없었잖아.”

노반의 입장에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물론 노반이 쌍둥이를 보고 싶다 해서 조금 더 힘쓴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가장 큰 원인은 해독약을 만드는 게 재밌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했던 탓이다. 절대 노반의 탓이 아니다.

“노반의 탓이 아니야. 난 남의 말에 휘둘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미르는 착하잖아. 내가 상처받을까 봐 신경 써 주는 거 다 알아!”

“내가 노반에게는 착하게 굴어도, 혼낼 거는 다 혼내고 사과 받을 거는 전부 받았잖아. 기억해?”

노반이 무엇을 하든 어이구 내 새끼라며 부둥부둥해 줬지만, 잘잘못은 확실하게 따졌었다. 그로 인해 노반의 사랑스러운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른 적이 많았지만, 마린과 젠 둘 다 가차 없는 사람들이라 노반의 눈물은 그들에게 머스터드 씨알만큼도 먹히지 않았다. 물론 나한테는 먹혔고.

“그것처럼, 이번 일도 노반의 잘못이라면 노반을 혼냈을 거야. 내가 하지 않았어도 젠과 마린이 했겠지.”

“그래도….”

“노반, 내가 전에 인간은 이기적이라 말했었지? 인간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뭐든 한다고.”

“응, 기억하고 있어. 미르가 해 줬던 말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노반은 내 소매를 꾹 부여잡고 내가 했던 말은 전부 다 기억한다며 잡은 소매를 약하게 흔들었다. 그런 노반의 뺨을 감싸며 불안함을 없애 주고, 이번에는 노반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했다.

“나에게 있어 그 욕심은 지식이야. 이번에 로이의 해독제를 만들면서 얻은 지식이 꽤 많아. 지식을 얻는 걸 떠나서 재미있기도 했고. 노반 때문이 아니라, 내가 욕심 부리다가 몸을 망친 거야.”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노반 잘못이 아니야.”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반은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는 건지 입술을 한참 벙긋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그에 가만히 지켜보던 마린도 합세했다.

“노반, 이번 일은 전부 황자님이 잘못한 거예요. 노반은 황자님이 쓰러지지 않게 식사도 가져다 드리고, 간식도 챙겨 줬었죠?”

그랬다. 과자를 가져와 주는 것도, 차를 가져와 주는 것도, 전부 노반이 하나하나 챙겨 주었었다. 정신없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때, 틈틈이 찾아오는 노반 덕분에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있었다.

마린의 물음에 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가만히 있었던 젠도 의견을 보탰다.

“미르 님이 쓰러질 걸 알면서도 열심히 말리지 못했던 마린과 제가 더 잘못이죠.”

“나도 잘못했는데, 젠도 잘못했어!”

조금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노반이 도끼눈을 뜨면서 젠을 노려봤다. 2차전의 막이 올랐다.

“젠이?”

“그래! 미르가 해독약 만들 때도 집에 없었고, 미르가 쓰러지고 나서도 막 밖으로 나가서 안 돌아왔었다고!”

그랬었나? 원래 젠은 집에 잘 붙어 있는 이미지는 아니다. 가끔 뒷산에 가서 마물 잡고, 흑마 가넷을 산책시켜 주거나 방어구를 손질했었다. 근데 내가 쓰러졌는데도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고?

“변명을 해 보자면, 저도 꽤 바빴어요.”

“너무하잖아! 미르가 쓰러졌는데!”

그래! 너무하잖아. 내가 쓰러졌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못 잔 거 몰아 잔 거지만….

“그러네요, 제가 너무했으니 벌을 받아야겠군요.”

“그래!”

노반은 젠에게 너도 함께 벌을 받아 마땅하다 말했고, 그에 젠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하곤 내게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제게 벌을 내려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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