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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56화 (56/227)

56 저택으로 돌아가다 (6)

“곧 맛있는 걸 잔뜩 먹게 된다며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내가 김치 담가야 되는데 눈치 없이 쓰러졌네. 돌아가자마자 김치부터 담가야겠다.”

기지개를 쭉 켜고 허리를 양쪽으로 돌려 스트레칭을 했다. 뼈가 우두둑 꺾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으악, 이제야 뼈마디가 제대로 움직이는 기분이다.

노반과 마린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열어젖히니 여우의 모습으로 셀비스에게 안겨 고롱고롱 낮잠을 자고 있는 노반과, 그런 노반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마린과 이야기하고 있는 셀비스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자고 있는 노반에게 어울릴 만한 목도리의 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셀비스는 당연하게도 검은색이라 주장했고, 마린은 누가 봐도 빨간색이 잘 어울릴 거라 주장했다.

셀비스는 노반은 아직 어려 방방 뛰어다닐 나이라며 때가 잘 타지 않는 검은색을 매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마린은 보색 대비를 해야 한다며 노반의 아주 연한 청록색 털에는 빨간색이 잘 어울린다며 검정색은 말도 안 되는 패션 센스라고 답했다. 셀비스는 효율을 따졌고, 마린은 패션을 따졌다.

“노반은 빨간색이 어울립니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꿋꿋하게 빨간색을 주장하던 마린이 방금까지만 해도 청중이었던 우리에게 물었다.

그냥 둘 다 사서 매면 되지 뭐가 문제야. 그리고 목도리 하면 하얀색 아니야? 귀여운 생물이 풍성한 하얀색 목도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도리도리하는 게 얼마나 귀엽고 포근해 보이는지 모르는 놈들이 검정색이다 빨간색이다 하는 거다.

“나는 하얀색도 귀여워서 좋을 것 같은데, 젠은?”

하얀색이지? 하얀색이지? 하얀색이지?

“온몸이 털이라 목도리는 따로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그의 날카로운 분석에 검은색, 빨간색, 하얀색을 주장했던 우리는 맞춘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래, 온몸이 털인 노반에게는 목도리 따위는 거추장스럽겠지. 모자도 씌워 주고 싶었는데. 하얀색으로…. 장갑도 하얀색으로…. 전부 하얀색으로. 마치 눈송이처럼….

“그래도 고른다면 하얀색이 예쁠 것 같은데.”

“하얀색도 좋지만 빨간색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도비는 혼자 옷 사러 가지 마십시오. 허여멀건 노반에게 하얀색이라니.”

하얀색이 예쁘다는 내 말에 셀비스와 마린은 하얀색은 거들떠도 안 본다는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언어를 순화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내 컬러 센스가 최악이라는 말이었다. 조금 침울해졌다. 그에 내 침울해진 표정을 본 젠이 입을 열었다.

“저도 하얀색이 좋아요.”

“그치?”

“네, 하얀색 말고는 상상이 안 가네요.”

젠은 하얀색 말고 다른 색은 상상이 안 간다며 나를 위해 주는 다정한 말을 했다. 컬러 센스 최악을 벗어나게 된 나는 신나서 그를 바라봤고,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곤 부드럽게 웃어 줬다. 아, 나 방금 심장에 무리 온 것 같은데.

“마린… 의사….”

“부정맥 아닙니다.”

“의사….”

“부정맥 아닙니다.”

“의사가….”

“부정맥 아닙니다, 확실하게.”

응….

* * *

아직 잠에 빠져 있는 노반을 누가 안아 들어야 하는지 회의를 했다. 젠은 낮잠을 오래 자면 저녁에 잠을 못 자니 지금 깨우자고 했고, 나는 깨우지 말고 내가 안아 들고 가겠다 했다. 마린은 내가 힘이 없는 줄 아는지 나 대신 자신이 노반을 안겠다며 셀비스에게 노반을 건네받았다. 나는 그런 마린을 빤히 쳐다보다 두 팔을 벌려 노반을 넘기라고 무언으로 항의했다. 그에 잘 알아들은 듯한 마린이 고민하다 조심히 노반을 넘겨줬다.

노반의 무게가 평소보다 무거운 걸 보니 깊게 꿀잠을 자고 있나 보다. 안긴 자세가 불편하지 않게 그동안 노반을 안아 오며 숙련된 안아 들기 스킬을 발휘했다. 자는 와중에도 자세를 잡는지 노반의 머리가 꼬물꼬물 움직여 내 목과 턱 사이를 파고들었다.

“잘 자네.”

“기절해 계신 황자님을 돌본다고 노반도 잠을 못 잤습니다. 물수건도 갈아 주고 아침에는 깨어나시라고 모닝콜이란 것도 불러 주고.”

“잠깐, 모닝콜이라니? 우리 노반이 노래를 불렀단 말이야? 날 위해서? 영상 구슬로 남겨 놓은 거 없어?”

“아쉽게 저도 정신이 없었습니다. 황자님이 쓰러지시고, 영주성을 통솔해야 하는 주인도 쓰러지시고, 부인은 방 밖으로 안 나오시지, 세르비스 씨와 미네르바 님은 식사를 조달하신다면서 종일 황자님 상태만 확인하시지, 쌍둥이분들도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시니 정신이 있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이프리트 경이 수시로 자리를 비우시니 저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지 않겠어요?”

탄산수같이 톡톡 쏘는 마린의 호소가 귓가에 박혔다. 내가 잘못했네. 마린, 내가 쓰러져서 미안해. 이제 몸 관리 잘해 보도록 노력할게. 이번엔 진짜야.

곯아떨어진 노반을 꼭 끌어안고 마린의 서슬 퍼런 눈빛을 피했다. 역시 젠이 화낸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진 내게 걱정을 가득 담은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흠흠! 얼른 돌아가서 김치 담가야 돼. 할 일이 산더미야.”

“내일까지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기절했던 일주일 동안 충분히 안정 취했…. 그래야지. 응, 안정 더 취해야지. 한 3일 내내 가만히 숨만 쉴까 봐.”

“좋은 생각이십니다.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하고 일찍 돌아가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를 악문 마린이 날 선 눈빛을 보냈다. 이번에도 내게 곤히 안겨 있는 노반을 방패 삼아 서늘한 그 눈빛을 피했다.

우리 마린 저런 캐릭터 아닌데. 우리 마린은 자애롭고 마음이 넓은 예쁘고 똑똑한 사람인데, 어째서 비꼬는 실력이 수준급인 잔소리쟁이가 된 거지? 도대체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응, 쉴게. 쉬는데… 배추 절이는 거는 힘 안 드니까 오늘은 그것만 할게. 소금물에 담가 놓기만 하면 돼. 별로 안 힘든 거야.”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으니 제가 하겠습니다. 황자님은 누워서 쉬세요.”

“제가 잘 지켜볼 테니 마음 놓아요, 마린.”

“네, 그럼 잘 부탁하겠습니다.”

마린과 젠 사이에 이상한 거래가 오갔다. 덕분에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젠의 방에 감금이 되었다. 왜 내 방이 아닌 젠의 방으로 왔는지 물으니 내 방은 발코니로 도주의 위험이 있고, 쓰러지기 전까지 해독제를 만드느라 벌려 놓은 풀떼기들과 플라스크들이 치워지지 않아 격리 차원에서 젠의 방으로 가는 거란다.

내 방이 더럽다는 이유는 이해가 가지만 도주의 위험이라니. 이 높은 발코니에서 탈출을 감행하다 떨어지면 최소 골절, 최대 사망이다. 젠같이 튼튼하고 날쌘 사람만 가능한 거지, 나처럼 허약 부실하고 운동 신경 제로인 사람은 떨어지는 것도 머리로 떨어져서 죽을상이다.

“얌전히 있을게, 책이라도 읽게 해 줘.”

저택에 도착하자 잠에서 깬 노반은 그동안 신경을 써 주지 못했던 텃밭을 관리해야 하고, 곧 담가야 할 김치를 위한 배추와 무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내 품을 벗어나 인간으로 변한 채 도도도 달려 나갔다. 덕분에 노반 없이 남의 방, 이 큰 침대에 혼자 눕게 되어 조금 어색하고 민망했다.

젠의 방은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딱 젠 같은 방, 잡스러운 물건 없이 필요한 것만 있는 깔끔한 방이다.

내심 이 방이 그의 물건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래의 물건은 전부 이프리트 백작가에 있겠지. 아, 그곳에도 본인의 물건은 없을지도 모른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했으니 본인 소유의 물건이라고는 항상 차고 다니는 검과 가넷 정도 아닐까.

“응? 얌전히 있을게, 읽을거리라도 주라.”

허리에 찬 검을 푼 뒤 재킷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젠의 뒤에서 쫑알쫑알거렸다. 그에 옷을 다 갈아입는 그가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고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읽어 드릴게요.”

“읽어 준다고?”

그는 얼마 있지 않은 책을 살피면서 내게 골라 보라며 제목을 말해 줬다.

“《각 제국과 왕국의 법전》, 《정치학》, 《경제학》, 《시회의 구성》, 《황실 예법》, 《누가 선한가》, 《정치와 경제의 관련성》, 《철학가들의 토론》이 있네요.”

“…그거 전부 노반이 읽는 거야?”

“네, 최근엔 《철학가들의 토론》을 읽고 있어요.”

그가 나열한 책의 전부가 싫다. 왜 노반이 젠과 공부하는 시간을 싫어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심지어 공부방도 아닌, 침실에 있는 책장에 꽂혀 있다니.

“자기 전에 읽어 달라고 그러지 않아?”

조금 장난스럽게 물었다. 자기 전에 읽으면 수면제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잠이 잘 올 것 같은 책들이다. 책상에 앉아 있었다면 베개로 베고 자기 좋을 정도로 두껍기도 했다. 헤실헤실 웃으며 젠에게 장난을 치자 《사회의 구성》이라는 책을 들고 가까이 다가온 젠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 주는 건 미르 님이 처음이에요.”

그는 누군가에게 읽어 주는 건 처음이니 어색해도 이해해 달라 했다. 그러곤 내가 누워 있는 머리맡 근처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쳤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첫 장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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