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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57화 (57/227)

57 저택으로 돌아가다 (7)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는 마린의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젠의 방에서 나갈 수 있었다. 덕분에 영주성에서의 감금은 아주 자유로웠단 걸 알게 되었다. 그건 감금도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린과 젠의 허락이 필요했고, 식사도 삼시세끼 꼬박꼬박 가져다주는 걸 전부 먹어야 했다. 밥알 한 톨이라도 남기게 되면 ‘식사도 제대로 못 끝내시다니, 아직 몸에 힘이 없으신가 봅니다.’ ‘조금 더 쉬셔야겠군요.’라며 눈치를 줬다. 싹싹 긁어 먹을 때까지 침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자애롭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독해질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마린한테 개기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는 몸 관리 잘하도록 노력할게.

노반은 김장 김치를 담글 배추와 무를 재배해야 한다며 텃밭을 관리하느라 바빴고, 젠도 무엇을 하는지 꾸준히 밖으로 나돌았는데, 한번은 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괜히 걱정이 되어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아니냐 물었지만 확답은 주지 않고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만 할 뿐이었다. 괜찮다는 말에도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애가 타는 마음에 안전할 거라는 확답을 재촉하자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걱정하지 말라며 살살 달래 주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네, 걱정하실 거 없어요.”

“나중에 크게 다쳐서 오면 나 화낼 거야.”

“화 안 내시게 조심할게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젠을 좋아하는 마음에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것도 있지만 같이 지내면서 내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서인지 가능하면 아픈 곳 없이 평생 건강했으면 싶었다.

“아프지 마, 진짜로. 난 누가 아프고 그런 거 정말 싫어.”

학창 시절의 반을 병원에서 지냈다. 다치고, 아프고, 누군가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질리도록 봐 왔다. 더는 보기 싫다. 입술을 깨물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젠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지며 내 깨물린 입술을 살짝 건드려 풀어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응?”

“미르 님은 전적이 있으시잖아요.”

화려하셨다면서요. 마린에게 들었어요. 다정한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세네카 제국에서 프레오나 제국으로 오는 길, 가진 체력에 맞지 않게 강행군을 해 몸살을 앓았던 것, 타루스에게 겁탈을 당할 뻔하다 상처를 입은 것, 성장기의 노반에게 물려 팔이 아작 나고 피투성이가 된 것과 가장 최근엔 로이의 해독제를 밤새워 만들다 쓰러진 것. 요리를 하거나 뒷산에 올라 채집을 하며 생긴 자잘한 상처까지 포함하면 다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으로 보였다. 전부 내 선택으로 인해 얻은 상처니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

“미르 님이 다쳐서 오면 저도 화낼 테니까.”

“….”

“그러니 무모한 짓 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마주친 시선이 평소보다 깊게 얽혔다. 나는 그의 다정하고도 황홀한 미모에 홀린 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미인계인가 보다. 물론 귀찮은 게 싫으니 최대한 구겨져서 살 테지만, 세상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제발 무리하지 말라 부탁하는 마린한테도 ‘노력한다’ 했지 그러겠다고 하진 않았단 말이야.

“그치만 중요할 때는…. 알았어….”

정말 그럴 거냐 묻는 듯한 진득한 눈빛에 꼬리를 내렸다. 분명 이곳에선 내가 제일 서열이 높은데 체감상으로는 꼴찌다.

* * *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파드가 쪼르르 날아와 짹짹거리며 인사를 했다. 계획했던 대로 김장 김치를 담그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마당으로 나섰다.

“미르! 배추가 짜!”

어젯밤 미리 절여 둔 배추의 끝 잎을 떼어 먹은 노반이 신기한 듯 소리쳤다.

“그야 소금물로 절였으니까 짠맛이 나지. 너무 짜지는 않아?”

“응! 그냥 짜!”

“적당히 짜다는 거지? 배추 품질이 워낙 좋아서 맛은 문제없겠어. 다 노반 덕분이야.”

김치를 담그자고 넌지시 이야기한 바로 다음 날, 노반은 김치 공장이라도 차리려는지 텃밭 전체에 배추를 심었다. 배추김치의 짝꿍인 깍두기도 같이 담그자 이야기했더니 그 다음 날 배추를 심어 놨던 한 줄을 갈아엎어 버리고 그 자리에 무를 심었다. 덕분에 169포기의 배추와 33개의 무를 수확했다.

배추가 많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냥 김치도 아닌 김장 김치니 묵혀 두면 묵은지로 먹을 수 있어 더 맛있고, 전부 김치로 만들기 아까우면 배추전, 배춧국, 배추찜으로 요리를 해서 먹어도 좋을 것이다. 동치미를 만들어도 좋고. 문제는 김치 속을 채우는 사람의 팔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걸 언제 다 해.

4포기는 남겨 두고 165포기의 배추만 절여 두었다. 나, 젠, 노반, 마린, 한 사람당 40포기를 해야 한다. 예언하는데, 젠이 60포기, 마린과 노반이 합쳐 100포기, 그리고 내가 나머지 5포기를 할 것이다. 나는 약골에 허약하고 저질 체력이니까.

“이 다음엔 뭐 해야 돼? 전부 잘라야 돼?”

“아니, 자르는 건 나중에 김치가 익으면 하는 거고, 지금은 김치 안에 넣을 속을 만들어야 해. 빨간색 옷을 입혀 주는 거지.”

기대하고 있는 노반에게는 미안하지만, 김치 속에 뭐가 들어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춧가루는 고운 것과 굵은 것 둘 다 사용하고, 다진 마늘 많이, 간 생강은 조금, 새우젓과 멸치 액젓… 소금과 설탕 조금. 아, 설탕 대신 배를 갈아 넣자. 마침 시아의 과일 가게에서 사 온 배가 남아 있으니까.

“노반, 페라를 갈아 줄래? 절구에 넣어서 찧으면 돼.”

“페라? 그거 내가 어제 다 먹은 것 같은데.”

“냉장고에 또 있을 거야. 확인해서 있으면 갈아 와 줘. 모르겠으면 마린이 도와줄 거야.”

페라를 갈아 와 달라는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인 노반이 도도도 걸어 마린에게 다가갔다. 마린은 노반에게 냉장고에서 배를 가지고 오라 시켰고, 자신은 배를 찧을 절굿공이와 절구통을 준비했다. 아무래도 우리 저택에는 믹서기가 있어야 했다. 또 뭐가 들어갔더라. 미나리, 파, 갓…. 아! 무생채!

“무생채! 젠! 깍두기 그만 썰고 무채로 썰어 줘!”

깍두기를 위한 무는 젠이 썰고 있었다. 피부 가죽이 철과 같은 오우거도 한 방에 썰어 버리는 젠에게 무나 썰게 하는 건 조금 미안했지만 칼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이 젠인 걸 어떡하나. 재능 기부라고 생각하라 그러지 뭐.

“무채요?”

“응, 채로 썰면 돼.”

말로는 설명을 못 하겠어 본보기로 칼을 넘겨받아 무를 썰었다. 무생채는 일정한 두께여야 맛있어 보이는데 내가 썬 무생채는 두께도 일정하지 않고 대부분이 굵었으며, 몇몇 개는 사선으로 썰렸다.

“칼이 무디네….”

“그러네요.”

민망한 실력에 고개를 숙이며 칼이 무디다는 변명을 했다. 그에 젠은 내 말대로 칼이 무뎌서 잘 썰리지 않은 거라며 비겁한 변명에 동의해 주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젠이 썬 깍두기는 저렇게 반듯하고 일정한데, 내가 썬 무채만 이 모양 이 꼴인 게.

“흠! 이제 알겠지? 이렇게 써는 거야. 모양은 이것보다 좀 예쁘게….”

“네, 이것보다 예쁘게 썰게요.”

“응, 엄청 썰어야 돼. 우리 165포기나 담가야 하니까. 저 바구니의 반 정도?”

대략 1m는 넘어 보이는 고무 바구니를 가리켰다. 165포기를 담그려면 얼마나 많은 속이 필요할지 사실 감이 오질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보존 마법이다. 일단 가능한 많이 만들어 놓고, 남으면 보존 마법 걸어서 다음 겨울에 또 담거나 다른 김치를 담글 때 쓰면 된다.

갓김치, 열무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오이김치, 고들빼기김치, 바다에 가서 굴을 구해 굴김치를 만들어도 좋고, 오징어김치, 새우김치 등등 김치 속만 있다면 뭐든 김치로 만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대마초로도 김치를 담그더라.

“오늘 안에 다 만들 수는 있을까 모르겠다.”

“최대한 빨리 썰어 볼게요.”

“응, 손 조심하고.”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지.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날이 무뎌졌다는 칼로도 깔끔하게 무를 써는 젠을 뒤로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 키의 절반이 넘는 고무 대야 속으로 세 포대의 고춧가루, 다진 마늘 세 대접 반, 간 생강은 많이 넣으면 씁쓸하니 한 컵, 양파즙 다섯 대접, 멸치 액젓은 감으로 때려 넣고, 가장 중요한 새우젓은 가득 넣었다.

멸치 액젓과 새우젓은 마커스가 아는 어부한테 부탁했다. 어부가 멸치와 생새우를 잡아다 우리에게 팔면 노반과 마린이 젓갈을 담갔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만들고 싶었지만 하필 영주성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보호 관찰을 받고 있을 때 어부가 와 버렸다. 덕분에 나는 젠의 방에 갇혀서 그저 해맑은 노반에게 어떻게 젓갈을 만들어야 하는지 지시를 내렸었다. 마린이 강경하게 침대 밖으로 움직이면 안 된다 해서 주방으로 내려가지도 못했다.

젓갈은 소금으로 버무린 다음 소금물을 부어 놔두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라 나 없이 노반과 마린 둘이 만들기에도 어렵지 않았다. 조금 불안한 게 있었다면 생새우는 내가 생각한 생새우 그대로였지만 멸치는 크기가 보통 멸치보다 조금 컸다. 한국에서 쓰이는 멸치라기보다는 이탈리아 요리에서 자주 쓰이는 앤초비에 더 가까웠다. 알고 있던 크기와 다른 게 조금 불안했지만 액젓은 맛있게 잘 나왔다. 크기가 달라도 그 맛이 그 맛이더라.

미리 썰어 둔 미나리, 갓, 대파와 쪽파를 함께 넣었다. 특히 미나리를 넣을 때는 조심조심 금을 모시듯 넣었다. 미나리를 캐러 뒷산 일대를 전부 뒤졌었다. 그날 저녁, 안 쓰던 근육을 무리하게 써 몸살이 났었지만 마린과 젠이 또 감금시킬까 봐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을 했었다. 다행히도 내 뛰어난 연기력 덕분인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미르! 여기 배!”

“우와, 열심히 갈았나 보네?”

“응! 마린이 많이 필요할 거라고 하길래.”

배즙을 만들러 갔던 노반이 국을 끓일 때 쓰는 냄비 가득 배즙을 담아 왔다. 무거울 법도 한데 깃털을 드는 듯 가볍게 들고 왔다. 들고 온 배즙은 전부 고무 대야 속으로 들어갔다. 마냥 달기만 한 배가 아니라서 많이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또 뭐 필요해?”

기다란 주걱으로 고무 대야를 휘저으며 노반이 물었다.

“젠이 무 다 썰면 그거 넣고, 얼마 없긴 한데 청각도 넣고, 또 뭐 넣을까?”

“미르 당근 좋아하잖아. 당근은 안 넣어?”

“응, 당근은 안 넣어.”

“다행이다.”

노반이 은근슬쩍 자신이 싫어하는 당근 이야기를 꺼냈다. 김치에 당근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게 꽤나 기뻤는지 긴장해 굳어 있던 만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그리고 또 뭐 넣어?”

“대충 이것만 넣어도 맛있을 거야.”

매년 겨울마다 김장을 하시던 친할머니가 속에 찹쌀 풀을 넣은 기억이 희미하게 있지만 이곳엔 찹쌀 풀 같은 건 없으니 과감히 빼자. 없어도 안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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