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저택으로 돌아가다 (8)
일정한 크기와 두께로 썰린 젠의 무생채까지 넣은 뒤 김치 속을 만드는 건 끝이 났다.
방금까지 주방에서 나오지를 않고 바빠 보였던 마린이 무얼 하나 했더니 정말 완벽하게도 돼지고기를 삶고 있었다. 아쉽게도 된장은 없지만 된장을 대신할 몇 종류의 허브와 간 생강 그리고 술을 넣어 삶고 있었다.
“마린, 김장할 때 수육 해 먹는 건 어떻게 알고 돼지고기를 삶고 있는 거야.”
“황자님께서 드시고 싶다 하셔서 해 봤습니다. 잘될지는 모르겠으나….”
“괜찮아! 생강이랑 허브를 넣었는데 잡내 때문에 망할 리도 없고, 혹시라도 망하면 카레 하면 되니까 걱정 마.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다, 마린. 네가 최고야.”
별것 아니라며 포근하게 웃은 마린이 마당으로 나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드디어 절인 배추에 속을 넣을 할 차례다.
누구 할 것 없이 팔꿈치까지 오는 긴 고무장갑을 낀 채 김치 속이 담긴 대야를 기준으로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흙을 뒤집어써도 우아한 젠이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가 담긴 고무 대야 앞에 앉아 있으니 굉장히 어색했지만 계속 보다 보니 그 모습도 어울렸다. 역시 잘생긴 얼굴은 뭘 해도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다들 내가 하는 거 잘 봐.”
김치 속을 한 움큼 가져와 절인 배추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꼼꼼하게 모든 배춧잎 속에 넣은 뒤 바깥에도 잘 버무리고 깔끔하게 끝 잎을 정리해 몸통에 감아 줬다.
“이렇게 하는 거야, 알겠지?”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본격적으로 김장을 시작했다. 예언했던 대로 내가 5포기를 했고, 대충 노반이 60포기, 젠이 70포기, 수육을 살펴야 하는 마린이 30포기를 끝냈다.
솔직히 예언을 할 당시엔 5포기는 농담이었다. 내가 그래도 근성은 있는 사람인데 하다못해 20포기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예언대로 나는 딱 5포기를 했다. 다 같이 먹는 김치인데 나 혼자 5포기는 심한 거 아니냐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이 많다. 우선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손님이 왔다.
“4황자! 나야, 나! 문 좀 열어 줘!”
네 번째 배추를 막 끝냈을 때, 저택을 빙 두른 펜스 밖에서 4황자를 부르는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4황자의 절친한 친구라는 필릭스 에반스터 경이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마나 셔틀.
“필릭스!”
4황자의 기억에 있는 필릭스 에반스터는 4황자의 얼굴을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해맑은 놈이었다. 황자인 나한테 반말도 찍찍 하고, 호칭도 전하가 아닌 ‘너’였다. 냉정하게 돈, 집안, 사회적 정치적 위치, 등등 이것저것 재고 보자면 4황자보다 더 잘난 놈이라 그런지 4황자는 그의 무례한 호칭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나도 넘겨야지. 나보다 잘난 놈이 너라고 부르면 좀 어때. 4황자가 필릭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를 대했던 언행들을 분석해 종합해 보자면 그냥 귀찮은 껌딱지다.
“친구야!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낸 거야? 이게 뭐야, 예쁜 얼굴이 반쪽…. 아니, 조금 찐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더 이뻐졌네!”
“그래, 오랜만이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나를? 네가? 왜? 무슨 일 있는 거야?”
필릭스는 자신을 기다렸다는 내 말에 깜짝 놀라 반문했다. 평소에 4황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나 보다. 시종일관 웃으며 다정하게 대해 주지만 일정 선 이상 들이지 않으려 하는 4황자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필릭스는 나쁜 마음을 갖지 않고 4황자의 옆에 있어 준 고맙고 착한 놈이다. 게다가 세네카 제국의 단둘뿐인 공작가의 차남인데 아무 힘도 없는 4황자와 놀아 주는 게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내 마나 들고 왔지?”
“아아, 그거? 나한테 여분이 몇 개 있긴 하지. 근데 나머지는 어디에 숨겼는지 까먹었어.”
“그래서?”
“못 들고 왔지….”
순간적으로 진지하게 저 새끼를 때릴까 고민했다. 필릭스는 굳어진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지 메고 온 아공간 주머니를 한참 뒤지다가 꽤 오래전부터 여분으로 들고 다녔다는, 보라색의 진득한 액체가 들어 있는 30ml 병 두 개를 내밀었다. 그래, 두 개라도 어디야. 아크레나의 엠버 팔찌 덕분에 아껴 쓰면 반년은 쓸 수 있을 거다.
“나머지는 파란 돼지의 술방 지하 금고에 숨겨져 있잖아. 기억 안 나?”
“아! 기억났다. 붉은 돼지. 안 간 지 꽤 오래돼서 까먹고 있었지.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올게. 약속!”
일부러 붉은 돼지를 파란 돼지로, 약초방을 술방으로 바꿔 말했다. 약초방의 이름은 ‘파가니스의 약방’이지만, 약초방의 주인이 돼지코를 가지고 있고, 항상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서 필릭스와 4황자는 그를 붉은 돼지라고 불렀었다. 마나를 숨긴 장소는 까먹었어도 다행스럽게 붉은 돼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나저나 뭐 하고 있는 거야? 저 붉은색은 뭐고… 저들은?”
필릭스는 김장을 하고 있는 젠과 마린, 노반을 가리키며 누구냐 물었다. 붉은색은 따로 설명해 주기 귀찮아 넘겼고, 저들은.
“내 친구들이야.”
“친구들? 젠 이프리트도 네 친구야? 여기 있다며?”
“필릭스 네가 젠을 어떻게 알아?”
필릭스가 젠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젠의 일은 프레오나에만 알려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필릭스도 프레오나에 첩자를 심어 둔 건가?
“어떻게 알긴, 정치에 관심 없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프리트 백작가는 원래부터 유명했고, 세네카 수도에 벌써 소문 다 났어. 너랑 이프리트가 사랑의 도주를 했다나 뭐래나. 네 광팬들은 책도 써 냈더라.”
나랑 젠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이 생겼다는 거냐? 다들 미친 거 아니야?
“책? 그거 황족 모독죄 아니야? 괜찮은 거야?”
“당연히 안 괜찮지. 근데 암암리에 도는 거라 누군지 잡아내기 힘들다 하더라고.”
“폐하는…? 아무 말씀 없으셔?”
“무반응. 항상 그러셨지 뭐. 폐하보다는 황태자 전하가 난리 나셨지. 4황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건 황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거라며 끝까지 잡아내겠다면서 범인 잡는다고 기사단을 하루 종일 내보내시고, 현상금도 걸고, 심지어는 직접 수도에 행차하셔서 연설까지 하셨다니까. 자기들 대신 볼모로 끌려간 4황자를 존경하라고.”
황태자라면 로이븐의 이야기다. 브라콤의 기질을 보이던 로이븐이 결국 일을 쳤다.
“미친 거 아니냐.”
“그렇지. 완전 미쳤…. 뭐?”
“왜, 뭐.”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미친 거 아니냐고.”
내 급작스러운 말투의 변동에 놀라 토끼눈을 뜬 필릭스가 말을 잊지 못한 채 어버버거렸다.
“너… 많이 힘들었어? 이게 무슨….”
“그럼 힘들지 안 힘들었겠냐? 내가 황궁에서 지내다가 북쪽으로 쫓겨난 것만 봐도 모르겠어? 오히려 잘됐어. 세네카에서도 가식적으로 하하호호 웃고 사느라 지쳤는데 앞으로 남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살면 좋지. 너도 내 친구 하려면 이런 나한테 적응해.”
“….”
내 머리를 잡아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한 필릭스는 멀쩡한 걸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너 이런 성격이었어? 드디어 보게 되네, 네 본모습!”
“내 본모습이고 뭐고, 첫째 형님이 편지 안 줬어?”
“편지? 아무것도 안 받았는데?”
“그래? 알았어.”
답장이 오지 않았다니…. 로이븐이 내 편지를 받지 못한 건가? 그럴 리가. 분명 제대로 보냈는데.
“그나저나 진짜 장하네. 난 그동안 네 성격이 너무 순해서 어디 가서 맞고 사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당연히 아니…. 으윽, 이것 좀 놔. 네가 해 줘야 할 게 있어.”
내 뺨을 그러잡고 드디어 사람처럼 지낸다며 우쭈쭈를 해 주는 필릭스를 매정하게 내치고 챙길 거 챙겨서 들어오라 했다. 일을 시켜도 일단 밥은 먹이고 시켜야지.
필릭스가 타고 온 마차는 마부가 끌고 마을로 가 버렸고, 필릭스는 다른 짐 없이 아공간 주머니 하나만 가지고 나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맞다, 얘도 귀찮은 거 싫어했지.
내 방 오른쪽에 있는 빈방을 필릭스에게 내주었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아 청소를 해야 했지만 저 정도는 필릭스가 마법으로 알아서 할 거다.
“청소는 알아서 할 수 있지?”
“그럼, 할 수 있지. 그나저나 진짜야, 네가 이프리트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궁금해?”
“응, 엄청.”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필릭스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려 거리를 벌렸다.
“나도 궁금하다.”
“당사자인데 네가 궁금하면 누가 알아?”
“당사자인 나도 모르겠는 애매한 사이니까 그렇지…. 몰라, 너 여기 있으려면 젠 괴롭히지 마. 괴롭히면 바로 쫓아낼 거야.”
“안 괴롭혀. 타지에서 죽고 싶진 않아.”
이 먼 곳까지 와서 이프리트의 검에 맞아 죽고 싶진 않다며 가볍게 말한 필릭스는 창문을 열고 주문을 외우는 것 없이 무언의 마법으로 방을 치워 냈다. 부럽다.
에반스터 공작 가문은 검을 쓰는 가문인데, 유일하게 차남인 필릭스 혼자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필릭스의 말로는 자신의 형을 검으로 이기려면 마법밖에 없어 열심히 했다는데. 글쎄, 형을 이기겠다는 건 변명이고, 몸을 움직이는 게 귀찮아서 마법을 배운 것 같다.
“그나저나 신기하다, 네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 항상 웃거나 고개 젓는 게 다였잖아. 그동안 꽤 불편했겠어.”
“…퍼디스의 눈이 어디에 있을지 몰랐었으니까 최대한 조심한 거지. 괜히 걸렸다가 시비 걸리면 골치 아퍼.”
필릭스를 속이기 위해 4황자의 순진하고 조용한 성격을 연기하라 하면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4황자의 성격은 정말 나랑 맞지 않아 하루만 그 성격으로 산다 하면 아마 답답해서 죽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웃고만 있는 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지 모르지 않았다.
“궁금하진 않겠지만, 3황자 전하는 되게 잘 지내.”
“그렇겠지. 날 여기로 보내 놓고 세력을 엄청 키웠을 테니까.”
황태자인 로이븐과 2황자인 메이븐의 권력은 곧 황후의 권력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황후를 지지하지 않는 몇몇 귀족들은 퍼디스를 지지했었다. 나머지 황좌 쟁탈에 얽히고 싶지 않은 귀족들은 4황자의 뒤에 섰었다. 4황자는 누가 봐도 황제가 될 깜냥이 아니었으니까. 이젠 4황자가 사라졌으니 퍼디스가 남겨진 4황자의 세력을 흡수했겠지. 하지만 흡수해도 잔챙이들은 잔챙이일 뿐.
“로이븐 형님이 죽지 않는 한, 퍼디스는 황제가 될 수 없어.”
“조금의 승산은 있어. 3황자 전하가 케이글 가문을 엎었거든.”
“케이글 공작…?”
에반스터 가문을 포함해 세네카의 단둘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가 퍼디스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케이글은 대대적으로 마법사를 양성하는 가문으로 정치에는 몇십 년간 손을 놓고 있었다. 그 가문이 다시 정계에 손을 뻗겠다는 것은 황후의 독재권을 흔들겠다는 뜻이다.
“퍼디스가 제대로 하려나 보네. 아, 몰라. 내가 알 게 뭐야. 난 이제 세네카로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혹시 모르지, 프레오나 제국이 무너질지도.”
“내가 숨 쉬는 시대에는 절대 안 망해. 이번 황제는 독하더라. 자!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장독대부터 시작하자.”
주절주절 떠드는 필릭스의 입을 다물게 하고 그가 가져온 마나 두 병을 한입에 마셨다. 진득했던 보라색의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탄산을 마신 듯 찌릿찌릿했다.
“윽…!”
처음은 찌릿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목구멍이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통에 목을 부여잡으려 했지만 가까이 다가온 필릭스의 두 손이 내 목을 부여잡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주문을 외웠다.
“<도우로 메디 디비스 무스단>.”
곧이어 검은빛이 내 목을 감싸고 하얀빛이 떨어져 나와 필릭스에게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