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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60화 (60/227)

60 저택으로 돌아가다 (10)

다시 뽀뽀를 해도 되냐는 노반의 말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가만히 지켜보던 젠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해도 돼? 응, 미르?”

“되기는… 하는데….”

지금 하면 젠한테 처맞을 것 같으니 나중에 하자.

뽀뽀하고 싶다 칭얼대며 소매를 잡아끄는 노반을 달래 주려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노반을 향한 흉흉한 젠의 눈빛에 포기했다. 그러곤 이 상황에서 제일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쭈그리 필릭스에게 말했다.

“네가 해 줘야 할 게 많아….”

“응, 말만 해.”

필릭스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는지 가까이 다가온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조심스레 방을 나갔다. 노반과 젠을 한방에 놔둔 게 조금 걸리지만… 뭐, 죽기야 하겠어?

어지간히 강하게 때렸는지 아직도 붉은 손등을 주무르는 필릭스를 마당으로 끌고 나왔다. 마당에 곱게 정리되어 있는 전부 완성된 김치를 확인하고 텃밭의 뒤쪽으로 끌고 갔다.

“일단 장독대부터.”

“장독대?”

“응, 난 장독대를 만들 테니 넌 장독을 만들어.”

“장독은 또 뭐야?”

“고대 서적에서 읽었어.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데 효과적이래. 알려 줄 테니까 잘 만들어 봐.”

그나마 알고 있는 장독대에 관해 설명했다. ‘흙으로 빚어 숨을 쉬는 항아리야.’ 손짓까지 이용하며 내 나름대로 잘 설명한 것 같은데 알아듣지 못하는 필릭스를 위해 친절하게 생각을 읽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했다.

검지를 내 이마 위로 올리고 눈을 감은 필릭스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이어 완벽하게 이해했는지 손가락을 떼었다.

“아하, 흙으로만 만드는 거야?”

“그렇지.”

“금방 만들겠네. 그러니 좀 이따 만들….”

“이거 말고도 할 거 많으니까 빨리빨리 만들어. 젠!”

게으름을 피우려는 필릭스를 위해 젠을 불렀다. 필릭스 일이 아니어도 따로 필요하고.

젠은 내가 크게 소리치는 것을 듣자마자 2층 발코니로 나와 마당을 향해 뛰어내렸다. 나와 필릭스는 절대 하지 못할 행동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누가 거기서 뛰어내려…. 물론 젠한테는 문으로 나오는 것보다 간단했을 테지만.

서둘러 다가온 젠을 본 필릭스는 그제야 물체를 만들어 내는 마법을 써 장독을 빚어냈고, 나는 삽 두 개를 가져와 다가온 젠에게 하나를 넘겼다. 젠은 별일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삽을 받아 들었다.

“제가 할 테니 미르 님은 그거 내려놓으세요.”

젠은 팔목조차 여리여리한 내가 삽질을 잘 못할 것 같았는지 위험하니 삽을 내려놓으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젠에게 나도 삽질할 수 있다며 뻐기다가 결국 삽을 뺏겼다. 내가 다른 건 못해도, 삽질도 못한다. 군대를 안 갔는데 어떻게 삽질을 잘하냐.

“해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하세요, 오늘은 말고.”

아까까지 목을 부여잡고 아파했던 것 때문인지 젠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삽질을 하면 목이 힘든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과보호가 심하다.

뺏긴 삽을 빤히 바라보며 우리가 만들 장독대를 설명했다. 필릭스가 지금 만들고 있는 항아리들을 놓을 장소인데, 겨울에는 땅 속에 묻고 여름에는 돌로 단을 쌓아 벌레가 접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이제 곧 겨울이니 독을 땅에 묻어야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마법이 있으니까 굳이 땅을 팔 필요는 없을 거 같아. 노반 성장 능력 덕에 벌레도 안 꼬일 것 같은데 단을 쌓아 올릴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노반의 <성장 능력>은 해충과 벌레, 곤충들이 꼬이지 않게 해 준다. 그래서 장독대도 텃밭 뒤에 만들려고 했던 거고. 그런데 이제 마법을 쓸 수 있으니 딱히 할 게 없어지는데….

“그럼 구분선만 만들어 놓을까요?”

“응, 그러자.”

젠은 들었던 삽을 내려놓고 창고로 들어가 구분선을 만들 벽돌을 가지고 나왔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젠이 한 번에 열 개를 넘게 들기에 나는 다섯 개 정도면 충분히 들 수 있을 것 같아 젠을 따라 벽돌을 들었다.

“안 돼요.”

“이 정도는 나도 들 수…. 뭐야, 이거. 쇳덩이야?”

보통 3kg 정도 되는 벽돌의 무게가 5kg은 족히 넘는 것 같다. 내가 못 드는 거야 그렇다 쳐도 젠 넌 열 개를 어떻게 한 번에 든 거야?

“이건 보통 벽돌보다 무거워요.”

“대체 뭘로 만들어졌길래….”

다섯 개는 무리고, 네 개를 들어 보려 했지만 역시나 힘들었다. 결국 하나를 더 빼 세 개를 겨우 들었다.

“그거 마물 뼈 갈아 넣은 거야. 덕분에 좀 무겁지만 튼튼하지. 장독 다 만들었는데 어디에 놔? 저 정도면 충분하나?”

그새 장독을 다 만들어 낸 필릭스가 나를 찾아 창고 안으로 왔다. 그러고는 크기별로 잔뜩 만들어 놓은 장독대를 가리키며 어디로 옮기냐 물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각종 김치, 동치미 등등을 담을 큰 장독이 열 개, 깍두기나 다른 반찬을 담아 놓을 중간 크기의 장독 다섯 개, 작은 장독이 다섯 개 있었다. 마법을 잘해서 그런가, 센스가 되게 좋네. 큰 장독은 저렇게 많이 필요 없지만, 없는 것보다야 남는 게 낫지.

“벽돌로 담 만들면 그 안에다 놓으면 돼.”

“하나하나 언제 다 올려.”

그렇게 해서 언제 다 만들겠냐는 필릭스의 말에 꼬우면 네가 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쓸모가 많은 놈이니까 착한 내가 참자.

“네가 만들어야 할 게 되게 많아. 근데 네가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되게 어려운 거라.”

“뭔데?”

“아냐, 못 할 것 같은데 그냥 하지 말자.”

“뭐냐니까?”

찔끔찔끔 필릭스의 승부욕을 건드렸다. 쟤가 게으르긴 해도 승부욕이 강한 놈이니 차기 마탑주겠지. 아무리 마법을 잘해도 열정이 없으면 마탑주는 못 하니까.

“못 만들 것 같은데. 알았어, 일단 봐봐.”

겨우 들었던 벽돌을 젠에게 넘기곤 멀뚱히 서 있는 필릭스의 손가락을 내 이마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보온 밥솥, 오븐, 믹서기, 식기 세척기, 세탁기, 가습기 등등 다양한 가전제품들을 보여 줬다. 내 생각을 전부 읽은 필릭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의문을 표했다.

“…이거 뭐야? 정말 고대 서적에서 본 거 맞아? 되게 선명하잖아. 기술 같은 것도 옛날 느낌이 전혀 안 나는데….”

“몇몇 개는 고대 서적에서 읽은 걸 조금 변환한 거고, 나머지는 꿈에 나온 거야. 봐, 어렵잖아. 내 꿈에 나온 걸 네가 어떻게 만들어.”

혹시나 물어볼까 싶어 생각해 놓은 변명을 했다. 꿈에서 봤다 하면 더 이상 못 물어볼 테고, 꿈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걸 봤겠어.

“꿈?”

“응, 나 일주일 정도 기절해 있었거든. 그때 꿨어.”

“기절?”

필릭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잘 들은 게 맞는지 확인했다. 그래, 기절.

“어쩌다가 기절을 해!”

“어쩌다 보니….”

“저놈이 무리시킨 거야?”

“젠이 나한테 무리시킬 일이 뭐가….”

필릭스는 ‘왜 그거 있잖아!’ 같은 눈빛을 보내며 젠을 노려봤다. 저 편견 없는 놈. 아까도 말했지만 젠과 내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잘 모르겠다니까 그러네.

자신의 친구인 내가 기절했다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손이 붉어진 것을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큰 거 같지만, 내가 잘못한 거면 몰라도 젠이 나한테 잘못할 리가 없잖아.

“그런 거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나 못 믿어? 쟤가 너 무리시킨 거지? 그런 거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정신 사나우니까 촐싹대지 마. 그래서 만들 수 있어, 없어?”

“당연히 있지. 내가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못 하는 거 있잖아, 젠한테 대드는 거. 너 지금 혼자 덤비면 질 것 같아서 한 대라도 때릴 수 있는 명분 찾으려는 거 아냐. 명색이 차기 마탑주인데 그렇게는 안 되지.

“그럼 만들어 봐, 우린 이거 쌓을 테니까.”

그 정도는 껌이라며 기세등등한 필릭스를 놔두고 무거운 벽돌을 옮겼다.

대충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 밖으로 나가니 눈탱이에 퍼런색의 멍 하나를 달고 있는 노반이 있었다.

“노반!”

“미르으….”

나를 보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선 꼭 안아 달라며 뛰어왔다. 달려오는 노반을 안아 들어 토닥토닥해 주며 마당이 울리도록 크게 소리쳐 물었다.

“눈탱이가 왜 그래!”

“젠이….”

내 품에 안겨 울먹이던 노반이 창고에 남아 있는 벽돌까지 다 옮기고 있는 젠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저놈이 내 눈깔을 이렇게 만들었다며 항의하려는 순간, 어느샌가 다가온 젠을 보자 흘기던 눈을 금방 지우고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귀엽게 깜박였다.

다가온 젠이 내게 안겨 있는 노반을 언짢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하찮은 듯이 말했다.

“제 핑계 대지 마세요. 노반이 도망가려다가 넘어져서 부딪친 거잖아요.”

그랬니? 난 또 젠이 때린 줄 알았잖아….

“너 피하려다 넘어진 거니까 너 때문이지!”

“억지 부리지 마세요.”

“네가 그 이상한 오라만 안 보였어도 도망 갈 일 없었어!”

“도망갈 일을 안 했으면 됐죠.”

그랬구나, 오라를 보였구나. 오우거 상대로도 오라는 안 보여 줬으면서 노반한테는 보여 준 거야? 나도 젠의 오라가 보고 싶다. 검을 쓰는 사람의 오라는 보통 별처럼 환한 빛이라고 하던데, 젠의 오라를 보면 오라 플러스 잘생긴 얼굴로 눈머는 거 아닌가 몰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애초에 네 것도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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