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저택으로 돌아가다 (12)
“4황자.”
“움직일 수 있어?”
“응, 마나로 돌리면 돼.”
부럽다, 이 새끼야.
“근데 왜 여기까지 올라왔어. 내려가 있지.”
“그냥, 할 말도 있고, 확인해야 할 것도 있어서.”
필릭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할 말?”
“들어가서 하자.”
다시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필릭스는 무음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마법을 방에 둘렀다. 투명한 막이 점점 퍼져 방을 감싸자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필릭스의 눈빛이 요상해졌다. 난 점점 더 불안해졌다.
“너, 모르겠다며.”
“뭐가…?”
“뭐긴 뭐야, 이프리트 얘기지.”
“젠? 젠이 왜?”
필릭스는 그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껏 그 어떤 때보다 진중하게 말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 이프리트는 너 좋아해, 백 퍼센트.”
뭐야, 저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은 거야? 별것 아닌 일로 겁주고 있어.
“나도 남자인데, 난 모르겠던데.”
“그건 네가 당사자라서 그런 거지. 제삼자가 봤을 때는 확실하다고. 나를 엄청 견제하더라니까?”
“확실하면, 뭐.”
“너도 좋아한다며. 그럼 둘이 사귀면 되잖아.”
“네 생각처럼 간단한 게 아니야.”
“뭐가 아니야. 좋아하면 좋아한다 딱! 고백하고, 뽀뽀 딱!”
뽀뽀 딱은 무슨,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잘 모르면서. 누군 뽀뽀 안 하고 싶은 줄 알아?
“내가 황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쫓겨나서 감시도 없이 잘 살고 있는데, 그렇게 간단한 거였음 당장 했지 왜 안 하고 있겠어.”
“그러니까 좀 이상하다는 거 아니야. 이프리트는 너 좋아하는 거 맞다니까?”
“알아, 아는데… 우리 사이가 좀 복잡해.”
“복잡할 게 뭐 있어. 설마 이프리트한테 부인이 있다든지?”
“차라리 그런 거였음 좋겠다.”
“부인 문제가 아니야…? 그럼 자식이라도 있는 거야?”
부인도 괜찮고, 자식이었음 더 간단했지. 아침 드라마 대본 쓰는 것도 아니고, 유치하게 부인이랑 자식이 뭐냐? 우린 그런 것보다 더 심오하다고. 너 같으면 널 죽이려 하고 좌천시킨 사람이랑 짝짜꿍하고 싶겠냐? 어?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성질 돋우고 있어!
“그래서 할 말은 그게 다야? 젠도 날 좋아하는 것 같으니 고백하라고? 그런 거면 할 말 없으니까 나가.”
“당연히 아니지. 앉아 봐.”
필릭스는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며 방 정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로 나를 이끌어 앉혔다. 나랑 얘랑 할 이야기가 있었나? 전혀 없는데. 예상 가는 이야기라곤 아무것도 몰랐을 다섯 살 때, 너무 배가 고픈 4황자가 필릭스가 아껴서 먹던 바닐라 쿠키를 몽땅 뺏어 먹은 게 전부다. 지금 와서 그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겠고….
바로 맞은편 소파에 앉은 필릭스는 내 눈을 바라보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곤 고개를 젖혀 천장을 올려보다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끌어올리며 말했다.
“세네카 제국에 성녀가 나타났어.”
“성녀?”
“정확히 말하자면, 식물인간이던 카트린 영애가 성녀로 깨어난 거지.”
카트린 영애라면… 카트린 후작가의 영애인가? 4황자의 기억에 카트린은 세네카 제국의 명성 높은 후작가라는 것 말고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근데?”
“진짜 성녀인 것 같아. 그 영애는 자신이 식물인간이었던 때의 일을 전부 알고 있어.”
그럴 수도 있지.
“식물인간 중에서도 몸이 깨어나지 못한 것일 뿐, 정신은 멀쩡하게 깨어 있었던 경우도 있어. 그게 뭐 별거라고. 그게 아니더라도 누가 말해 준 거 아닐까?”
“미래의 일도 알고 있었어. 크랭크 남작의 곧 태어날 아이가 남자아이였다는 것, 서쪽 지방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 그밖에도 자잘한 것들을 전부 맞히더라고.”
뭐야, 그거. 사기꾼 아니야? 뭐, 그런 거 있잖아. 지진이 일어날 수도, 안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50퍼센트의 확률.
“그래서 그 성녀가 깨어난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
입을 다문 필릭스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꽤 심각한 이야기구나 싶어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 주려 했지만 손에 든 노반의 멍 연고를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를 끝내야겠어 굳게 입을 다문 필릭스를 재촉했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입술을 한번 깨문 필릭스가 암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4황자가 곧 죽을 거래.”
내가 죽는다고?
개소리.
“내가 죽는대? 그래서, 부적이라도 사라고 하든? 아니면 신비의 돌 같은 거?”
“좀 진지하게 들어, 농담 아니니까.”
진지하게 들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사람은 언젠가 죽어. 그 성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죽는 거야. 이상할 거 없어.”
이상할 게 없긴, 존나 이상하다. 돌팔이 성녀 주제에 어딜 수명 꽉 찬 산 사람을 죽이고 있어. 만나기만 해 봐, 네놈의 사기 수법을 낱낱이 밝혀 주마.
필릭스는 성녀가 내린 사망 예언을 듣고도 담담한 나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뭐 어쩌라는 건데. 죽기 싫다고 질질 짜라는 거야?
“왜.”
“아무렇지도 않아?”
“솔직히 말할까? 난 그 성녀 안 믿어. 내가 죽는다고?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내가 곧 죽나 안 죽나. 장담하는데, 내가 그 성녀보다 오래 살 거야.”
필릭스는 담담한 것을 넘어 당당한 나를 질렸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게 본모습이라 이거지…? 힘들지만 적응해 볼게.”
“성녀도 성녀지만, 너보다도 더 오래 살 거니까 나랑 친구하려면 적응해 두는 게 좋을 거야. 할 말은 끝났어?”
“대충 끝나긴 했는데….”
“남은 말 있으면 해.”
방금까지의 필릭스는 세상 제일 암울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잘 보고 있던 소설책의 한 페이지가 찢긴 듯 찝찝한 표정이었다.
그래, 너도 당황스럽겠지. 세상 제일 순수하고 조심스러웠던 소꿉친구가 지금까지 털털하고 괴팍한 성격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놀랍겠지. 나 같았으면 정신 감정부터 받아 보자 했을 거다.
“그 성녀의 예언 때문에 황태자 전하께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
“그래?”
“그래, 정무를 다 내팽개치고 네가 멀쩡한지 확인하러 오시겠다는 거 내가 대신 가겠다 해서 겨우겨우 말린 거야.”
분위기를 바꾸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필릭스가 자주 짓는 장난스런 표정이 아닌 정말 진지한 표정을 보고 황태자가 올 뻔했다는 이야기가 구라가 아니라 진짜인 걸 알아차렸다.
동생 바보가 일을 칠 뻔했구나. 로이븐이 정무를 내팽개치고 나를 보러 왔다면 아주 큰일이 되었을 거다. 퍼디스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한창 바쁠 시국에 황태자가 자리를 비운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세네카뿐만이 아니라 프레오나의 상황도 소란스러워졌을 거다. 볼모로 잡아간 자신의 동생을 보겠다고 무려 황태자가 아무 언질도 없이 적국으로 오다니,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로이븐을 경계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돼도 아무 말 못 한다. 겨우 막아 놨던 전쟁을 다시 시작하자는 소리도 아니고.
“아아… 골이야.”
“네가 황궁을 벗어난 뒤부터 로이븐 전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오죽하면 비어 있는 네 궁을 전하의 서재로 삼았겠냐.”
“서재?”
“일하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네 궁으로 가서 네 초상화를 보며 책을 읽으신대. 정말 지극한 정성이야. 누가 보면 사별한 자식인 줄 알겠어.”
로이븐의 계획을 조금 알 것 같았다. 4황자의 궁보다 훨씬 좋은 자신의 궁을 놔두고 굳이 4황자의 궁까지 와서 책을 읽는 건, 아마 퍼디스를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닐까. 물론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 하는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퍼디스를 경계하는 것일 것이다.
4황자의 궁이 퍼디스의 궁과 가장 가까이에 있어 퍼디스의 동향을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이 4황자를 이렇게나 생각한다는 것을 귀족들에게 알려 줘서 퍼디스의 무분별한 세력 흡수를 막으려는 거다.
나 또한 황태자가 아끼는 동생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볼모로 쫓겨났어도 황자로서의 명예를 유지시키는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다. 내가 죽는다는 성녀의 예언까지 있으니 날 챙겨 주던 로이븐의 지지율이 조금 더 늘지 않을까.
“성녀의 예언은 누구누구 알고 있어?”
“일단 황족은 전부 알고 있고, 나랑 황태자 전하의 가까운 사람들만.”
그렇다면 귀족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데….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은?”
“당연히 있지.”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다면 이걸로 얻는 이득은 없을 테고…. 돌팔이 성녀는 누구의 손을 들어 주려는 걸까.
“어쨌든, 그 성녀의 예언 때문에 잠깐 온 거라 오래는 못 있어.”
“얼마나?”
“늦어도 내일 점심에는 떠나야 해.”
내일 점심…? 아직 믹서기랑 전기밥솥, 세탁기, 오븐, 부탁한 것 중 만들어진 게 하나도 없는데 가겠다고?
“가긴 어딜 가. 다 만들고 가.”
“아, 그거… 귀찮은데.”
“네 인생이 더 귀찮아지기 전에 만들어.”
“너… 진짜 많이 변했다.”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필릭스에게 코웃음 쳐 주곤 문을 열자 방문에 귀를 대고 있었는지 노반과 마린이 딸려 들어왔다.
“하하, 티타임이라 미르 부르려고 했는데.”
“저는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젠 님이 궁금하실 것 같아서.”
왜 이러고 있었냐는 내 눈빛에 노반은 이제 곧 티타임 시간이라며 변명했고, 마린은 이 자리에 없는 젠의 핑계를 댔다. 아니, 실제로 젠에게 알려 주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안 들렸지?”
“네, 아무것도 안 들렸습니다.”
“그럼 됐어.”
필릭스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 번 더 확인한 거다. 남들에게 보여 주지 못할 일을 한 게 아니라 들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성녀의 예언은 곤란하니까.
“둘이 뭐 했어?”
“너 몰래 맛있는 거 먹었어. 부럽지?”
“거짓말하지 마. 미르는 티타임 전에 군것질 안 해.”
노반을 약 올리려던 필릭스는 되레 입을 다물게 됐다. 둘 다 유치해서는.
“젠은 어디 갔어?”
“네, 잠깐 나갔다 오신다고.”
또 나갔구나.
“뭐 때문에 나가는지 이유라도 알려 주면 좋겠는데.”
“널 신용하지 않는다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필릭스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젠이 날 신용하지 않는 게 아니냐 물었다. 나는 그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본 뒤, 그럴지도 모른다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에 장난스레 지었던 웃음을 거둔 필릭스는 입술을 끌어내리며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