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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63화 (63/227)

63 저택으로 돌아가다 (13)

“뭐야, 장난치려던 건데.”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 알아?”

“알지.”

“난 이미 죽어 있는 개구리야.”

나의 냉정한 반응에 ‘장난도 못 치겠네.’라며 꿍얼꿍얼거린 필릭스는 내 곁에 서 있는 매서운 시선의 마린을 발견한 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만들다 만 믹서기를 다시 집어 들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래, 허튼소리하기 전에 밥값부터 해야지.

“마린, 노반,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곧 갈게.”

“네, 알겠습니다. 차는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마린은 같이 가자며 먼저 가기 싫다는 노반을 안아 들고 내게 물었다.

“디저트는 뭔데?”

“생크림 대신 커스터드를 넣은 크림슈를 준비했습니다.”

“그럼 난 밀크티.”

“밀크티요?”

아, 그러고 보니 밀크티를 안 가르쳐 줬네. ‘밀크티’라는 단어를 들은 마린의 의문스러운 표정에 그동안 내가 밀크티를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쓴 홍차가 마시기 싫으면 다디단 과일청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에 밀크티라는 간단하고 맛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홍차에 무언가를 타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하는 거지만. 나 또한 반 정도는 4황자의 기억에 의존해 살고 있었고, 이도연으로 살 때에도 자주 먹지 않았었기 때문에 밀크티가 있다는 걸 생각해 내지 못했었다.

심장이 아플 때는 카페인을 아예 못 먹었었고, 심장이 다 나았을 때는 홍차 정도의 카페인으로는 버티지 못했었다. 쓴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위한 진한 아메리카노나 에너지 드링크 같은 자양강장제를 마셨으니 밀크티는 아주 가끔 생각날 때만 마셨었다. 타피오카 젤리를 넣은 달달한 걸로.

“음…. 홍차를 진하게 우려서 따뜻한 우유랑 섞는 거야. 시럽 세 스푼. 없으면 설탕 두 스푼.”

“네, 알겠습니다.”

새로운 레시피에 당황하지 않고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마린에게 밝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린은 이래서 좋아. ‘네? 홍차에 우유를요? 그게 무슨 망할 레시피인가요?’ 같은 고정 관념에 꽉 차 있는 소리를 안 하잖아.

마린의 어깨에 턱을 기댄 노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곤 ‘그거 맛있으면 나도 마실래.’라며 마린을 주방으로 이끌었다. 안 가겠다고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 고분고분했다.

그들이 내려가기 전, 마린에게 노반의 눈두덩에 발라 주라며 멍 연고를 건넸다. 마린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 연고를 받은 마린과 그녀에게 안겨 나를 똘망똘망 쳐다보던 노반을 내려 보내고, 방치해 둔 필릭스가 어쩌고 있나 확인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이 불을 쏘고 얼음을 쏘는 마법보다 어렵고 힘이 드는 마법이긴 하지만 필릭스에겐 아무 문제 되지 않을 거다. 필릭스는 나와 반대로 보통 마법사보다 순간적으로 생성되는 마나가 많다. 그리고 창, 화살, 검 같은 무기류나 열쇠, 옷걸이, 망치 같은 생활 용품을 창조하는 방면에 특출 난 놈이니 믹서기 따위야 감만 잡는다면 금방 만들 거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일 필릭스가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배운 게 맞냐고 질책 받아 마땅하다.

“그거 말고도 만들어야 되는 거 많아.”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

“어려울 것 같아서 그렇지.”

“다 만들 수 있어. 간단한 거구만.”

간단은 무슨, 네가 재능은 있는 놈이지만 그거 만들려면 머리 좀 아플 거다. 현대 기술을 어떤 식으로 바꿀지 하나하나 다 생각해야 할 테니까. 회로는 어떻게 만들 것이며, 전기는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지 등등.

“그럼 믿는다?”

믿는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필릭스는 저리 떨어지라는 뜻으로 손을 털어 냈다.

잘 만들어 내겠지. 못 만들기만 해 봐라, 집에 안 보내 줄 거다. 집중하는 필릭스를 등지고 거실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노반에게 다가갔다. 노반은 내가 가까이 오자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통을 내밀었는데 자세히 보니 내가 마린에게 건네줬던 멍 연고였다.

“아직 안 발랐어?”

“미르가 발라 줘.”

노반은 나를 향해 연고를 내밀며 투명한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저 눈에 약한 거 알고 저러는 거지. 마린이 약 발라 주는 걸 잊어버렸을 리는 없고, 내가 발라 줬으면 해서 일부러 안 바르고 있던 건가? 계속 이러면 습관 돼서 안 좋은데.

“노반, 마린이 안 발라 줬어?”

“마린이 바빠 보이길래 내가 할 일 하라고 했어.”

“그랬어?”

“응, 잘했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응, 잘했어. 잘했는데… 노반, 다친 상처는 최대한 빨리 치료해야 돼. 이렇게 미루면 안 돼.”

“알고 있어! 이 정도 멍은 그냥 놔둬도 낫는걸. 그래서 기다린 거야.”

“알고 있다면 됐어.”

팔을 뻗은 노반을 안아 무릎 위에 앉힌 다음, 손가락 가득 연고를 찍어 푸른 눈두덩에 발라 줬다. 으으, 이 예쁜 얼굴에 퍼런 멍이라니, 너무 속상하다.

“나는 노반이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래서 참고 있다가 나한테 맡기려는 줄 알았어.”

“그것도 맞아, 난 미르가 발라 주는 게 좋으니까.”

“이 정도 멍이면 괜찮지만, 혹시라도 큰 상처를 입었을 때는 마냥 기다려서는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문득 노반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피를 토하면서까지 나와 내가 주는 약을 거부하던 노반은 지금 이렇게 내가 직접 자신에게 약을 발라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날 의지해 준다는 게 한편으로는 뿌듯하지만, 내게 너무 의존하는 건 아닐까? 나한테도 문제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의존하게 만든 것도 잘못이니까. 독립성을 길렀으면 하지만 반면에는 계속 의지해 줬으면 한다. 이 얼마나 모순된 감정인지.

“내가 멍청하게 굴면….”

“미르는 똑똑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내가 멍청하게 굴 때가 있을 거야. 그때는 노반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날 혼내야 해, 알았지?”

뜬금없는 말에도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반을 꼭 껴안아 줬다.

“황자님이 살던 세상에는 뛰어난 미식가들이 많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마린이 말했다.

마커스가 마린에게 선물했던 찻잎 중 장미 향을 입힌 진한 맛이 특징인 ‘로보스크’를 우린 차에 중탕으로 데운 우유를 넣은 뒤, 설탕 두 스푼 그리고 바닐라 빈을 긁어내 조금 넣었다.

노반은 과일차가 더 좋다며 밀크티를 거부했고, 마린은 처음 먹는 밀크티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타피오카 젤리까지 만들어서 넣으면 완벽한 버블티겠지만… 지금은 귀찮으니 나중에 해 먹자.

“마음에 들어?”

“네, 정말 맛있어요.”

마린이 먹는 걸로 칭찬하는 건 드문데. 밀크티, 너 좀 능력 있구나?

“난 이것보다 마린이 구워 준 크림슈가 더 맛있어.”

마린은 식사에 올라가는 요리보다는 간식을 만드는 베이킹에 더 소질이 있었는데, 버터를 넣어 풍미 가득한 쿠키와 다양한 곡물을 넣은 쿠키, 생크림이 잔뜩 들어간 롤 케이크, 한국 빵집에서나 볼 법한 소시지 빵, 설탕을 가득 뿌린 꽈배기 빵, 검은깨를 올린 단팥 빵, 소보루가 진 모카 빵, 다양한 과일청으로 필링을 만들어 여러 가지 맛을 내는 마카롱까지 베이킹에 관해서는 못 하는 게 없었다. 맛집이라고 소문나 세 시간 줄 서야 먹을 수 있는 디저트 가게 것보다 더 맛있다.

“내가 커스터드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알고.”

“황자님은 팥보단 크림을 좋아하시잖아요.”

“맞아, 붕어빵도 꼭 크림만 먹었어.”

눈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붕어빵을 먹으며 마당에 놓인 벤치에 앉아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것을 보는 로망이 있다. 물론 젠, 노반, 마린 그리고 셀비스와 함께.

“셀비스가 오면 우리 딱 맞겠다.”

“무엇이요?”

“딜러, 힐러, 서포터 둘, 탱커.”

“음…. 처음 들어 보는 말이네요.”

젠이 딜러, 내가 힐러, 어쌔신 마린, 버퍼 노반, 탱커 셀비스. 딱 맞는다. 마법사인 내가 딜러를 해도 괜찮겠지만, 공격 마법은 전혀 못 하니 힐러로 전향했다. 큐어 정도는 간단하게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못해도 젠이 있다면 전부 캐리가 되지 않을까? 딜탱 둘 다 커버할 수 있고, 오우거의 모가지도 한 방에 땄고. 젠이라면 원맨쇼도 가능할 거다. 오랜만에 게임이 하고 싶다. 더럽게 못하지만, 그래픽을 보는 건 좋아했었는데.

“음…. 공격과 방어의 환상적인 조합이랄까. 별거 아니야.”

노반은 내 무릎 위에 앉아 딸기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고, 마린은 두 번째 밀크티를, 나는 크림슈의 커스터드만 빼내어 먹다 마린한테 혼났다. 그렇게 드실 거면 커스터드를 따로 퍼 준다면서.

“내가 커스터드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릇에 담아 퍼먹을 정도로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 위에 올려진 모든 크림슈의 커스터드를 긁어 먹었다. 혼날 만했네.

“미르, 내 꺼 줄게.”

“아니야, 노반 많이 먹어.”

요즘 뱃살이 조금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살은 안 쪘는데 배가 조금 나왔다. 이게 전부 디저트 배 같은데 앞으로 단 음식은 적당히 먹어야지.

“나 살쪘어. 이제 조절하면서 먹어야 돼.”

“안 쪘습니다.”

언제 돌아왔는지 젠이 허리에 찬 검을 뺀 채 가넷을 끌며 다가왔다. 가넷, 너는 오늘도 나를 보는 눈빛에 한심함이 가득하구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젠, 어디 갔다 왔어?”

“기다리셨어요?”

젠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가넷의 고삐를 잡고 있는 젠의 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보며 대답했다.

“응, 기다렸어.”

“좀 더 빨리 올걸 그랬네요.”

젠이 미소를 짓곤 가넷을 마구간으로 데려다 놓겠다며, 들고 있던 검을 내게 넘겼다. 젠이 마구간으로 걸어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서둘러 검집에서 검을 뽑아 피가 묻어 있는지 확인했다.

“미르, 뭐 해?”

“확인.”

애인의 핸드폰을 검사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했다. 피가 묻어 있는지, 날이 무뎌진 곳은 없는지, 날이 갈려 있는 곳은 없는지, 피 얼룩을 지웠다면 냄새가 나는지. 솔직히 냄새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확인한 결과 멀쩡했다. 무딘 곳도 없고, 칼날도 방금 간 듯 첨예해 자칫 손이 벨 뻔했다.

“무슨 확인?”

“누굴 죽이고 온 건지, 아닌지.”

“사람 피 냄새는 안 나. 아, 마물 피 냄새는 조금 난다.”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피 냄새로 종류를 구별할 수 있냐는 물음에 노반은 자신의 크림슈를 내게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사실 먹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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