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64화 (64/227)

64 저택으로 돌아가다 (14)

“독한 피 냄새는 알 수 있어. 드로이프는 피 냄새에 예민하거든. 그리고 난 미르의 피 냄새는 멀리서도 맡을 수 있어.”

“내 피?”

“응, 성장통 때 미르 피를 먹어서 미르 피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고? 그럼 뒷산에 있는 나무에 내 피를 발라 놓고, 노반에게 어느 나무인지 찾아보라 하면 딱 찾을 수 있다는 건가? 드로이프가 개과라 그런가, 후각이 예민하구나.

“나중에 위치 남길 때 편하겠다.”

“난 미르가 다치는 거 싫어!”

“걱정 마, 나도 피 보는 거 싫어해.”

거짓말이다. 요새는 정신이 해이해졌는지 어딜 다쳤는지도 모른다.

노반이 양보해 준 크림슈를 아껴 가며 께적께적 먹고 있는 와중, 어느새 다가온 젠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내 무릎 위에 곱게 앉아 있는 노반의 뒷덜미를 잡고는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이젠 푹신한 곳에 던져 주지도 않는구나.

“젠 님도 드셔 보시겠습니까?”

“무엇을요?”

마린은 자신의 최애인 밀크티를 여기저기 전파하고 싶은지 노반을 던지고 손을 터는 젠에게 밀크티를 권했다.

“밀크티라고 합니다. 황자님께서 알려 주신 건데 정말 맛있어요.”

“밀크티요?”

“네, 풍미가 깊은 로보스크 티에 적당한 온도로 데운 우유와 보통 설탕보다 당도가 높고 입자가 고운 호레시스의 설탕, 마지막으로 뒷산에서 운 좋게 수확한 바닐라 빈을 넣었습니다.”

밀크티가 반이나 담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친절하게 밀크티 안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까지 설명해 주는 마린은 마치 옥장판을 파는 다단계 조직원 같았다. 이 옥장판 위에서 주무시면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이 나와서 건강해지고 뭐 이런….

“전 괜찮습니다. 차나 커피는 그대로 마시는 걸 좋아하거든요.”

“정말 맛있는데….”

젠이 밀크티를 거부하자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마린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우리 마린은 내가 사고 칠 때 빼고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밀크티가 그렇게 좋은 건가? 나만큼? 시무룩해진 마린의 눈치를 보며 밀크티는 관심 없다는 듯 구는 젠의 옆구리를 약하게 툭툭 쳤다.

“한 번만 마셔 주자.”

한 번만 마셔 달라는 내 부탁에, 그제야 젠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긍정을 표했다.

“…그럼, 한 모금만 마시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시무룩해 있던 기분이 금방 풀린 마린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젠을 바라봤다. 그에 젠은 환하게 빛나는 마린의 눈빛에 못 이겨 내가 마시던 찻잔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아, 간접 키스.

“어떠십니까?”

“….”

“맛있죠?”

“네, 맛있네요.”

그는 옅게 웃으며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놨다. 젠은 착해서 웬만하면 다 맛있다고 해 주는데, 밀크티는 취향이 아니었나 보다. 어쩐지, 황금 비율로 타 줬던 라떼도 안 마시고 오로지 블랙커피만 고집하더니. 혹시 우유를 싫어하나?

“젠, 혹시 우유 싫어해?”

마린이 듣지 못하게, 젠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에 내 눈을 지긋하게 바라본 그는 평소처럼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4황자!”

앞으로 우유가 있는 음료는 주지 않겠다고 말하려던 와중, 2층 테라스에서 다급한 필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올라간 필릭스의 방에는 내가 기뻐할 만한 것들이 잔뜩 즐비해 있었다.

“어떠냐!”

“최고야! 진짜 만들었네!”

“내가 말했잖아, 아주 간단한 거라고.”

솔직히 놀랐다. 이곳에서 전자 제품을 만들 수가 있나?

“이거 작동은 해?”

“응, 저거 빼고 다 작동해.”

필릭스의 손가락 끝에는 전기밥솥으로 보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치, 밥솥은 조금 어려웠을 거다.

“작동은 뭘로 하는 거야?”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면 더 빠르게 만들었겠지만, 넌 마나를 쓰지 못하고, 이 집 안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보석으로 대체했지.”

센스 있는 놈. 마나를 원동력으로 설정했으면 나한테 크게 맞았을 거다. 마법사들에게 보석은 대체 에너지와 같다. 보석과 보석이 마찰하며 나오는 특수한 에너지가 마나와 비슷한 파장을 갖는다.

“이건 내가 좀 더 연구해 볼게.”

“아냐, 밥솥은 없어도 돼. 먹을 때마다 새로 지으면 되니까.”

밥솥으로 보이는 물체를 지나쳐 세탁기, 오븐, 그리고 가장 기대했던 믹서기를 끌어안았다. 이제 하나하나 손으로 빻지 않아도 된다.

필릭스가 오기 전, 딱 한 번 맷돌의 유혹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수확한 마늘을 전부 빻아야 하는데 팔도 아프고 냄새도 나고, 눈도 살살 아파 오고. 마지막엔 거름종이를 깔아 놓고 발로 밟으며 빻았는데 내 살보다 마늘이 더 단단해 지압판을 밟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럴 바에야 돌을 갈아서 맷돌을 만들까 고민을 했었지만… 믹서기가 생겼으니 필요 없다.

“그럼 나 내일 출발해도 되는 거지?”

“응, 가.”

“….”

“왜.”

입을 삐쭉 내밀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필릭스를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가도 되냐며? 가도 되지.

“단물만 쏙 빼먹고 보내려고?”

“무슨 소리야, 밥도 챙겨 주는데.”

“그렇긴 한데… 고대 음식은 안 먹고 싶은데….”

“맛있었잖아.”

“그렇긴 한데… 서운하잖아!”

아, 그래. 내 말투가 서운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근데 너 늦어도 내일 점심에는 돌아가야 한다며. 그래서 가도 된다고 한 건데.

“너 내일 돌아가야 한다며….”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뭐!”

“너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잘했다는 상도 없어?”

필릭스는 열심히 만들었는데 아무것도 없냐며 굉장히 서운한 듯 소리를 치고 상을 달라 떼를 썼다. 네가 애냐, 상을 받게?

“그래, 들어나 보자. 뭘 받고 싶은데?”

“그런 건 주는 사람이 생각해야지.”

때리고 싶다.

“빵 좋아해?”

“빵?”

“응, 죽빵.”

“그게 뭐야?”

있어, 먹으면 엄청 아픈 빵.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상을 달라는 필릭스에게 선빵과 죽빵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참자. 쟤도 아직 애다, 애야.

“보다시피 줄 건 없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말해 봐.”

“아, 그럼 영상 구슬.”

필릭스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영상 구슬을 찍게 해 달라며 자신의 방에서 가져온 아공간 주머니에서 다섯 개의 영상 구슬을 꺼냈다.

“영상 구슬?”

“응, 황태자 전하께 바치게.”

“첫째 형님한테…?”

고개를 끄덕이며 영상 구슬을 작동시키는 필릭스는 아무렇게라도 좋으니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보라 했다.

“이러면 돼?”

“응, 잘하고 있어. 좀 웃어 볼래?”

싱긋. 눈은 그대로 둔 채,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조금 소름 돋는 표정이다.

“좋아, 예뻐. 이제 다음 거.”

이런 소름 돋는 표정도 괜찮다고? 아무렇게나 있어도 괜찮은지 필릭스는 내 요상한 포즈와 표정으로 영상 구슬을 채워 냈다. 그렇게 한 개, 두 개, 세 개를 채웠을 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목적이 뭐야?”

“영애들 데뷔탕트에 나오라고 성화셔서. 네 영상 구슬 주면 뭐라고는 안 하실 거 아냐.”

그러니까 내 영상 구슬로 영애들 데뷔탕트 출석을 때우겠다? 아니, 애초에 그게 먹혀?

“그게 가능해?”

“할걸?”

자신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 거라는 답이 나왔다.

데뷔탕트, 성년이 된 귀족 영애들을 위한 파티다. 표면적인 주인공은 성년이 된 영애들이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글쎄, 잘생기고 능력 좋은 영식을 파트너로 데려간 영애다.

4황자는 필릭스가 접했던 이야기를 들었을 뿐, 데뷔탕트에 가지 못했다. 황궁에서 열리는 흔한 연회도 꼭 가야 하는 중요한 연회만 갔을 뿐, 그곳에서도 얼굴만 잠깐 비치고 나왔었다. 손님들의 스케일이 큰 연회에서는 4황자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고, 생긴 게 워낙 예뻐 주변에 서야 하는 사람이 불편해했다. 예를 들어 메이븐 같은. 그중에서도 데뷔탕트는 초대장은 많이 왔지만 어린이들의 가벼운 파티 느낌이라 경호가 느슨해 많은 영식과 영애들이 노리는 4황자가 가기엔 조금 위험한 곳이었다.

그에 반해 필릭스는 4황자랑은 정반대의 성격이라 싫은 건 싫다 말할 수 있는 아이였고, 얼굴도 저만 하면 훤칠하고, 어린 나이에 마법을 쓰며 마탑의 마술사들을 휘어잡았고, 집안도 집안인지라 여기저기 불리는 곳이 많았다. 오죽하면 4황자 대신 나가야 했던 연회도 있었다. 그래, 얘가 4황자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

“젠, 젠도 데뷔탕트 같은 곳 갔었어, 누군가의 파트너로?”

안 갔겠지. 밖으로 나돌았다며.

“네, 가 봤습니다.”

“뭐어?”

가 봤다고? 갔었다고? 암묵적으로 약혼할 사이, 혹은 사랑하는 사이라고 티를 내는 그 데뷔탕트에 가 봤다고?

“가 봤다고…?”

“네, 1년 전 한나의 데뷔탕트 파트너로 갔었습니다.”

아, 동생.

“아하…. 동생… 한나 양이라면 뭐….”

“이프리트 경, 동생도 있었나?”

“…예.”

젠은 필릭스에게 자신의 여동생의 존재 여부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았는지 고민을 오래 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필릭스는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말게, 나는 우리 4황자처럼 예쁜 이가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필릭스는 변태처럼 흐흐 웃으며 젠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젠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조금 더 세게 나가고 싶었는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4황자보다 예쁜 이를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4황자가 내 취향일지도 모르겠군.”

그에 젠의 한쪽 눈이 찡그려졌지만 곧바로 풀렸다.

“너는 내 쪽에서 사양할게.”

마지막 영상 구슬은 셀프로 찍고, 필릭스에게 넘겼다. 너랑 사귈 바에는 오스먼드랑 사귈 거야. 오스먼드는 조용하기라도 하지, 난 촐싹대는 사람은 연인으로 싫거든. 아니, 젠이 아니라면 아예 절에 들어갈란다.

“미르! 마린이 저녁 먹으래!”

세상이 멸망해 오스먼드와 필릭스밖에 남지않았다면 누구랑 사귀어야 하는지 해괴한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노반이 찾아왔다.

“벌써?”

“아니, 한 10분 후. 스테이크랑 파스타 했어. 얘기 끝나면 내려와!”

노반은 ‘얼른 얘기 끝내고 내려와~.’를 외치며 주방으로 내려갔다. 별로 유익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 나도 노반을 따라 내려가고 싶었지만 많이 나댄 필릭스를 젠과 단둘이 내버려 두기가 불안해 젠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필릭스, 너는 내가 부르면 내려와. 다 준비되면 불러 줄게.”

“뭐? 나 할 거 없는데?”

“저 보온밥통이나 연구하든지.”

“아…. 저거 더 안 해도 된다며.”

“있으면 좋지. 아! 그리고 이거랑 이거는 내가 가져갈 테니까 너는 이 세탁기를 1층 가장 끝 방에 놔. 호스 연결하는 거 잊지 말고. 내 꿈에서는 저거 연결 안 했다가는 옷이 다 타더라고.”

“물은 자동으로 생성하는 마법 걸어 놨어. 없어도 돼. 애초에 깨끗하게 하는 마법이 있는데 뭐 하러 세탁기란 걸…. 아, 너 마나 없지.”

이 새끼가….

“그럼 저거 써야겠네. 아, 근데… 다른 건 괜찮은데 저건 보석이 많이 필요할 거야. 고위 마법을 걸어 놓은 거라.”

“그런 거면 상관없…. 아, 너 갈 때 보석 가진 거 다 내놓고 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어 갖고 있는 보석을 전부 달라며 재촉했다. 항상 무엇이든 중요한 물건은 가지고 다녀야 마음이 편한 필릭스가 마법사들의 친구인 보석을 안 가지고 다닐 리가 없다.

“강도가 따로 없네.”

“너네 집 돈 많잖아. 또 구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우리 집보다 너네 집이 돈 더 많거든?”

“난 버려진 자식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