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저택으로 돌아가다 (15)
버려진 자식.
담담하지만 그 안의 담긴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나와 시선을 맞춘 필릭스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던 보석을 한 움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너 다 가져라.”
“더 있잖아. 비축분까지 줘.”
“황궁을 나와서 배운 게 강도질이지? 순 강도야, 날강도.”
그는 아공간 주머니의 더욱 깊숙한 곳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보석 몇 개를 더 꺼냈다. 그러고선 ‘됐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필릭스를 더욱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자, 혀를 찬 그는 보석 몇 개를 더 꺼냈다. 침대의 한 부분이 보석으로 가득 차자 내 표정도 반짝이는 보석만큼이나 밝아졌다.
“고마워. 영상 구슬 남은 거 있어?”
“그것도 가져가게? 자, 옛다. 다 가져라!”
“아니, 그건 뺏을 생각 없었는데. 일단 주니까 감사히 받을게.”
필릭스를 위한 영상 구슬 하나를 남기고, 나머지 구슬과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들은 내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있고, 자라나는 아이인 노반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산이다.
하나 빼놓은 영상 구슬은 탈탈 털린 필릭스에게 주는 내 사과이자 선물이다. 영상 구슬을 작동시키고 내 얼굴이 보이게 한 뒤, 구슬을 향해 살갑게 인사를 했다.
“형님, 도브로미르입니다.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 편지를 받으셨는지 궁금해 영상 구슬로 또 한 번 편지를 보냅니다. 이곳에서 잘 먹고, 잘 자고, 불편한 것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필릭스가 와 줘서 더더욱 도움이 됐고요. 그러니 그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형님. 묻는 게 늦었습니다만, 형님께서는 잘 지내시죠? 형님이야 메이븐 형님도 곁에 계시고, 항상 잘하시니 큰 걱정은 없지만. 아우 된 도리로써 아무래도 조금은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 형님의 답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탈하십시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영상 구슬을 껐다. 이 정도면 로이븐이 필릭스를 덜 귀찮게 하지 않을까 싶었다.
“선물.”
“최고야!”
“알아.”
로이븐에게 보낼 영상 구슬을 필릭스에게 건네줬다. 그에 필릭스는 두 손을 내밀며 성스러운 것을 만지듯 영상 구슬을 받고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만 같은 자세를 했다.
“이걸 황태자 전하께 드리면… 내 혼인을 취소할 수 있을 것만 같아.”
“혼인? 너 결혼해?”
“응, 그 성녀랑 하게 될지도 몰라.”
아, 그 돌팔이랑.
“왜?”
“옛날부터 그렇게 정했으니까. 난 누군가에게 얽매이기 싫어했고, 카트린 후작은 에반스터의 이름을 원했으니 나와 영애가 혼인을 하면 서로 이득을 보는 거였으니 내가 데려가겠다고 했지. 하지만 이젠 영락없이 산 사람이랑 혼인하게 될 판이야.”
아, 어쩐지. 명망 있는 공작 집안 차남의 혼기가 다 찼는데도 어째서 혼약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필릭스는 마탑에 들어갈 예정인 차기 마탑주이니 혼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단순히 생각했는데,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니.
“너… 좀 낯설다. 곧 유부남이라니.”
“내가 말 안 했었나?”
“응.”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 잊고 있었나 보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어, 그러네.
“너 그냥 가.”
“안 알려 줘서 삐졌어?”
“응, 삐졌으니까 돌아 가.”
“에이, 그렇게 따지면 너도 안 알려 준 거 있잖아.”
“내가 뭐.”
“남자 좋아한다는 거.”
필릭스가 성의 없는 턱짓으로 젠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 눈치 없는 새꺄…. 아까까지는 농담이었는데, 이젠 진담이야. 집에 가.
무의식적으로 젠의 눈치를 봤다. 넌 알게 모르게 이런 소리를 많이 들어 왔을 테니까.
짜증 나는 마음에 얼굴을 굳힌 상태로 평온한 표정의 필릭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나 남자 좋아한다!”
“알아.”
“남자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야! 너가 백 명 있어도, 난 젠같이 다정하고 잘생긴 사람이 좋은 거야!”
“그것도 알고 있는 건데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네….”
“아플 게 뭐가 있어? 너랑은 키스는커녕 뽀뽀도 못 해!”
“아무튼 이프리트 경이 좋다는 거 아니야?”
“그래!”
필릭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4황자의 기억에 의하면 예의가 없는 놈은 아니다. 오히려 눈치가 빠른 놈인데. 왜 저러지?
여우 눈을 뜨고 필릭스를 쳐다보니, 그는 언짢아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지, ‘너는 내가 살린다.’ 같은 괴상한 눈빛을 보내며 내 뒤에 서 있는 젠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고 하네, 이프리트 경.”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확실해지니 좋지 않은가? 난 좋을 것 같은데.”
필릭스는 젠에게 방긋 웃어 보이곤, 아직 여우 눈을 뜨고 있는 나를 지나쳐 식당으로 내려갔다.
정적이 쌓이고 쌓였다. 그 어색한 기류에 밀려 슬그머니 젠을 쳐다봤다. 나와는 다르게 젠은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머릿속이 하얘지며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 사실 나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좀 놀라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더라. 말했다시피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다 좋아하는 게 아니고, 너라서 좋아하는 거야….”
어수선한 말에도 조용히 들어준 젠은 슬슬 정신이 나가려는 나와 시선을 맞춰 줬다.
“그러니까….”
“미르 님.”
“응?”
“천천히 하셔도 돼요.”
천천히…?
“미르 님이 착각하시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곳에 와서 제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저였으니 제게….”
“착각 아니야.”
“진지하게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세요. 절 좋아하는 게, 정인지 사랑인지.”
“….”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생각해 보세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은 젠은 내 감정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라며 담담하게 말하고는 대화를 끊어 냈다.
이거… 차인 건 아닌데 차인 것 같은 기분은 뭐지. 잘 생각해 보라고? 뭐를? 사랑인지 정인지?
젠의 말을 곱씹으며 멍하니 서 있자, 그는 나를 조용히 끌어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탁에 앉은 이후로도 파스타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채, 계속 젠의 말을 곱씹었다.
사랑인지 정인지 생각해 보라고? 내 감정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내가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거다.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 거랑 그저 기대려는 거랑 착각하는 게 아닌데!
“미르, 왜 그래?”
“그러게, 난 안 내려올 줄 알았는데.”
“마법사 네가 무슨 짓 했어?”
“하긴 했는데, 도움이 안 됐나 보다. 이거 맛있네. 로테스 양, 여기엔 뭘 넣은 거지?”
“알리움입니다. 알리움을 얇게 썰어 튀기듯 구우면 그렇게 됩니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응, 맛있네.”
필릭스는 오늘 처음 먹어 본 마늘 플레이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제서야 내 앞에 자리한 스테이크 파스타를 볼 수 있었다. 후추가 잔뜩 들어간 크림파스타 위, 마늘 플레이크가 올라간, 로즈마리의 향을 입혀 미디엄 레어로 구워진 스테이크가 얹어져 있었다.
“오.”
짧게 감탄을 하고 입에 넣었다. 통후추 특유의 알싸한 맛이 입 안을 감싼 다음, 고소한 크림 속, 치즈의 풍미가 돌았다.
“세르비스가 알려 준 레시피입니다. 이렇게 드시면 좋아하실 거라 해서 해 봤는데, 괜찮으십니까?”
“어쩐지 레시피가 화려하더라. 소스에 치즈도 넣었지?”
“네, 가루 치즈와 고체 치즈 두 종류를 넣었습니다, 너무 느끼한가요?”
“아니, 진짜 맛있어.”
크림소스에는 양파, 마늘 그리고 양송이버섯이 들어갔다. 치즈가 들어갔다 했지만, 치즈와는 다른 깊은 맛이 느껴지는데, 뭐지?
“소스에 치즈 말고 뭐 넣은 거야?”
“버터를 넣었습니다. 무염 버터가 아니라 다른 간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싱거우신가요?”
“아니아니, 궁금해서 그래. 셀비스 레시피는 항상 신기해서.”
자신이 잘 만든 것인지 불안했던 건지 간을 묻는 마린을 다독였다. 파스타 위에 올려진 스테이크는 노반에게 넘겨줬다. 그러곤 흡입을 하듯 접시에 코를 박고 집중해 먹었다.
“미르, 배고팠어? 이거 나 안 줘도 돼.”
“황자님, 더 드릴까요?”
파스타 면을 끊임없이 흡입하는 나를 본 노반과 마린이 걱정하며 물었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할라.”
그놈의 천천히!
“잘 먹었어. 먼저 올라갈게.”
내가 젠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인지, 사랑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라니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과는 같을 테지만.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 두고 빠르게 방으로 올라갔다.
* * *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는 게 눈을 뜨니 해가 쨍쨍한 아침이었다. 멍한 정신에 눈을 깜빡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청명한 새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제 돌아왔는지 하얀 털에 깜댕이를 묻히고 온 파드가 열려 있는 새장 안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들고 온 것인지 발목에 하얀 종이를 매달고 있었다. 파드를 꺼내려 뚫려 있는 새장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그 위로 올라온 파드의 발에 매달고 있던 종이를 빼내어 펼쳤다.
<히츨턴 돌아감>
아, 릴리아 부인이 히츨턴 영지로 돌아갔다는 건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갔네.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곧이어 방문이 열렸다. 그곳엔 고개를 빼곰 내민 노반이 활짝 웃으며 아침 인사를 했다.
“미르! 잘 잤어?”
“응, 노반도 잘 잤어?”
도도도 달려와 내게 안긴 노반은 오늘따라 더욱 무거웠다.
“마법사는 오늘 새벽에 나갔어. 인사 전해 주래.”
“벌써 갔어?”
“응, 바쁜가 봐.”
필릭스는 오늘 새벽에 나가면서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나한테 인사는 하고 갈 줄 알았는데, 바쁜 일이 있었나? 바쁜 게 아니라면 제 발이 저려서 튄 걸지도 모른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느니 그런 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젠한테 사랑이니 정이니 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는데.
“나쁜 놈.”
“미르는 마법사 싫어해?”
“싫어하는 건 아닌데, 조금 얄미운 일이 있어서….”
“다음에 오면 내가 혼내 줄게. 미르는 걱정 마.”
내 목을 감싸 안은 노반이 등을 토닥여 줬다. 아무래도 어제, 평소와는 다르게 급히 저녁을 먹고 자 버려서인지 걱정했나 보다.
노반의 걱정도 고맙지만, 젠도 걱정해 줬으면 좋겠다. 네가 남긴 말 때문에 내가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사랑이면 사랑이지 정은 또 뭐야! 내가 그런 걸 헷갈릴 정도로 멘탈이 약해 보여? 어?
정했다. 앞으로 각오해라, 젠 이프리트. 나 도브로미르 세네카, 절대 먼저 고백 안 한다. 애가 타서 마음고생 좀 해 봐라.
“젠은?”
“글쎄?”
“나가 보자.”
“바, 방에 있자!”
순간적으로 무거워진 노반 때문에 발을 떼지 못했다.
“왜 그래?”
“미르랑 여기 있고 싶어!”
노반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아닌, 무언가를 숨겨야 하는 듯 눈동자를 또로롱 굴렸다. 뭘 숨기고 있니?
“노반?”
“책 읽어 줘!”
“내 방엔 풀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가지고 놀래?”
“그것도 좋아!”
“재미없을 텐데?”
“미르랑 하는 거면 전부 재밌어!”
노반은 목을 껴안은 손을 흔들며 방에서 나가지 말라 막았다. 방 밖에 뭔가 있는 거야?
“안 나갈 테니까 무거운 것 좀 풀어 줄래? 나 팔 빠지겠다.”
“진짜로? 헛! 나 못 나가게 막는 거 아니야!”
화들짝 놀라 억지로 막는 게 아니라며 변명하는 노반의 콧잔등을 약하게 두드렸다. 다 들켰어, 이 귀염둥이야.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는 당부도 있었나 보다.
“알았어.”
다시 가벼워진 노반을 안아 들고 창문 가까이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큰 마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크기는 컸지만 엄청나게 화려한 모양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온 걸까? 아니, 그건 아닐 거다. 여기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저런 큰 마차를 가지고 있는 영지민도 없을 것이며, 혹시 왔다 하더라도 노반을 내세웠을 테지. 노반은 상점가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니까. 영주성의 사람도 아닐 거다. 그렇다면 나를 막아 둘 필요가 없을 테니까.
젠과 마린이 아닌 노반이 날 막으러 왔다는 건 아직 경어를 쓰지 못하는 노반이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일 테고, 내가 보면 안 되는 사람이며, 젠이 상대해야 할만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젠장.
“노반, 저기 서랍에서 말린 약초 꺼내 줄래? 난 책장에 있는 약초 꺼낼게.”
“응.”
노반에게 방 끝에 위치한 서랍에서 말린 약초를 꺼내 달라 부탁했다. 노반과의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고 재빨리 방 밖으로 나갔다.
“미르…!”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노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서둘러 내려간 거실에는 잘 차려입은 젠과 마린이 고개를 숙인 채, 소파에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4황자.”
“폐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