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66화 (66/227)

66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1)

반갑지 않은 손님이 저택의 분위기를 흐려 놓았다.

“폐하, 이곳까지 어찌 오신 겁니까.”

그 손님에게 조금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잘 알아듣고 꺼지길 바라며.

오스먼드가 차분한 녹안을 내리깔아 나를 훑었다. 그러곤 자신의 앞에 놓인 붉은색의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자신을 반겨 주지 않는 나를 책망하며 말했다.

“이 제국에서 내가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겠지만, 양심이 있으면 넌 여기 오면 안 되지. 그리 생각하며 답을 하지 않은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오스먼드가 말했다.

“그대는 내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군.”

너 같으면 반갑겠냐. 나 대신 죽으라고 던져 놓았던 젠을 잘 살려 두고 이곳에 보냈으면서. 혹시 내가 잘 죽었나 확인하러 온 거냐? 그런 거라면 유감이다. 아주아주 잘 살고 있으니까.

“그럴 리가요. 뜻밖이라 놀랐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괜히 온 게 아닐까 걱정했으니.”

그렇게 말한 그의 얼굴은 걱정한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걱정했으면 오지를 말아야지, 왜 와서는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어, 엉?

“끼잉….”

작은 여우로 변한 노반이 내 곁으로 다가와 아프지 않게 다리를 긁었다. 난 노반을 살펴보는 오스먼드의 눈치를 본 뒤 재촉하는 노반을 안아 들었다.

“이상한 것을 키우는군.”

젠도 노반을 처음 봤을 때 오스먼드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이상한 것’을 키운다고. 혹시 오스먼드도 드로이프를 알아본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털색이 희한한 여우라고 생각할 텐데. 젠처럼 특별한 능력이 없는 한은 알아보기 힘들다. 아니, 거의 불가능이지.

“네, 낯선 사람은 무니 만지지 마십시오.”

천천히 오스먼드가 앉아 있는 소파로 가까이 다가갔다. 앞자리에 앉으라는 그의 눈짓에 곁의 마린에게 노반을 넘겼다.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마.”

“알겠습니다, 황자님.”

고개를 끄덕인 마린이 가지 않겠다며 낑낑 우는 노반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노반이 올라타 있던 무릎이 허전해졌다. 얇은 파자마 위로 찬 공기가 흘러 체온이 내려가자 잠시 격양되었던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노반과 마린이 사라진 거실에는 원인 모를 팽팽함이 존재하는 나와 오스먼드 그리고 젠이 남았다. 어색해 뒤지겠네.

끈질기게 시선을 맞추려는 오스먼드의 기에 눌리지 않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쫄 거 같아? 뭣도 없었던 그때는 몰라도 이젠 안 쫄지.

“무슨 일로 오셨는….”

“그전에.”

꽤나 비장한 표정으로 내가 입을 떼자 오스먼드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4황자는 복식부터 다시 차려입어야겠군.”

그가 엄한 목소리로 내 차림새를 나무랐다.

그래, 제국의 황제를 뵙기에 파자마는 조금 아니지? 근데 어쩌냐. 예의 차릴 생각 조금도 없는데.

“황제로서 오신 겁니까.”

오스먼드가 좋아할 법한 발칙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내 표정을 확인한 그가 내내 내리깔고 있던 녹안을 작게 빛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군.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으로 왔지?”

오스먼드는 내 버릇없는 언사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지 가볍게 웃어넘겼다. 황제가 되더니 참을성이 많이 늘었나 보다. 황제로서 온 거냐는 내 질문을 질문으로 답한 그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제고 뭐고 지금 바로 내쫓고 싶다. 무엇으로 왔냐 물었지?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불청객, 딱 그 짝이다.

“땅 주인이 말하는 그 모든 것이 답이지 않겠습니까.”

“….”

뾰족하게 올라갔던 그의 입꼬리가 다시 뭉툭해졌다. 흥미가 떨어진 듯한 오스먼드의 얼굴에 아무도 모르게 비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지루한 답이었습니까. 그렇다면 다르게 말씀드리지요. 이곳 땅 주인은 접니다. 옛적에 그리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날이 서 있는 내 말에 오스먼드는 실소를 했다. 그에 멀리 떨어져 있던 젠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 무모한 대화를 왜 하고 있냐고 타박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땅 주인인 그대가 말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인가?”

“비슷합니다. 그러니 약속되지 않은 손님께서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는지 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 식사 시간 전이라 손님의 이야기를 길게 들어 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무례함을 맥스로 찍은 내 말투에 그가 화를 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크게.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실소를 흘린 오스먼드는 비장한 표정의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찌 이런 맹랑함을 뿜어내는지.”

“….”

“기백은 좋았으나, 오늘은 이프리트를 만나러 왔으니 담화 시간은 나중에 갖지.”

하기야, 우리는 서로 볼 이유가 없다. 오스먼드가 나를 보러 왔다면 잠작 가는 이유가 몇 개 있긴 했다. 그의 장래 희망인 ‘대륙의 하나뿐인 황제’를 위해 세네카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고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내 반응을 살피려 전쟁이 일어날 거라 알려 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오스먼드가 생각이란 걸 했다면 당장 전쟁을 하진 않겠지. 황제가 되고 아직 한 해가 차지도 않았는데 지금 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다. 오스먼드는 내가 아닌 이프리트를 보러 왔다고 했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돼.

“안 됩니다.”

“뭐라?”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프리트 경을 보러 오신 이유가 무엇이든, 한 번 내치셨으면 내친 것 아니겠습니까.”

경련이 올 것 같은 목을 빳빳이 들어 무표정의 오스먼드를 응시했다. 저 표정에 조금의 실금이 생기는 것을 봐야 했다. 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의적으로 무시했다.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자격이겠습니까. 땅 주인의 자격과 만들어진 정인의 자격이겠지요. 또 다른 자격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자격이 제국의 황제보다 귀한 것인가.”

아까와 같은 표정의 오스먼드가 날이 선 말투로 답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지만 말투에 날이 서 있는 걸로 보아 조금 화가 난 것 같다. 조금 더 화를 내 줬으면 좋겠다. 이성이 조금 흔들릴 정도로만. 바로 성을 낼 만한 게 하나 있지만….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을?”

“폐하의 목숨이 제게 달려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금이 생겼다.

“저와 했던 맹세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 젠의 얼굴을 살폈다. 크게 동요하진 않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강하게 담겨 있는 시선을 받았다.

“너….”

“‘나 세네카 제국의 도브로미르 세네카는, 프레오나 제국의 2황자 오스먼드 프레오나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울 것이며, 스파딘 프레오나의 죽음 뒤, 얌전히 황궁을 떠날 것을 맹세합니다.’”

그날과 똑같은 어조로 맹세를 외웠다. 오스먼드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뒷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나 프레오나 제국의 오스먼드 프레오나는, 세네카 제국의 4황자 도브로미르 세네카를 해치지 않을 것을 영혼에 맹세한다.’라고 하셨지요. 기억하십니까.”

“….”

“전 맹세를 지켰습니다. 폐하께서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왔으며, 선황제가 타계하신 뒤 지체할 것 없이 이곳으로 왔지요.”

일관되게 무표정인 오스먼드를 바라보며 젠의 허리춤에 차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키잉.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거실 전체에 울렸다. 젠이 들 때는 분명 공기처럼 가벼워 보였는데 직접 들어 보니 꽤 묵직했다. 내가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젠이 강한 거라고 하자.

내가 자신의 검을 뽑은 것에 놀란 젠이 오스먼드를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별일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젠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넌 움직이지 마.”

젠의 끈질긴 시선을 피한 채, 그에게 속삭였다. 작게 말했지만 아마 오스먼드도 들었을 것이다. 그에 오스먼드는 내가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보려는 듯 검을 든 내 오른손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건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폐하께서는 저와 한 맹세를 지키셨습니까.”

“그러니 지금도 그대의 숨이 멀쩡히 붙어 있는 것 아닌가.”

오스먼드의 무감각한 대답에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저 새끼는 지가 갑인 줄 알지.

혹시라도 젠이 말릴까 싶어 그와 멀찍이 떨어졌다. 충분히 거리를 벌린 뒤, 검을 사선으로 들어 올려 목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스륵. 첨예한 칼날에 내려져 있던 머리칼이 조금 잘렸다.

“폐하께서는 지키지 못하셨습니다.”

“….”

“이프리트 경을 제게 보내신 이유가 그 답이며, 폐하의 변덕으로 인해 제 죽음이 가까워진 것 또한 답입니다.”

목 위에 드리워진 날카로운 검날이 연한 살을 강하게 짓눌렀다. 살갗이 벌어져 검날을 타고 내려간 붉은 피가 카펫을 적셨다.

그와 동시에 담담히 앉아 있던 오스먼드가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그는 왜 자신의 심장이 아픈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프신 게 놀랍습니까. 이것은 폐하께서 만들어 낸 결과이므로 절 해치고 계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오스먼드의 맹세는 나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 악감정을 가졌을 젠을 북쪽으로 보내어 나를 만나게 했다. 고의가 다분했지. 만일 젠이 내게 해를 끼쳤다면, 나와 젠을 만나게 한 오스먼드의 심장이 조였을 것이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얼굴은 아마 백짓장처럼 새하얘졌을 것이다. 바로 뒤에 서 있는 젠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분명 화가 났겠지.

“이대로 제 숨이 끊어진다면 폐하의 숨도 함께 끊어지겠지요.”

“네가….”

“그러니 혼자 돌아가십시오. 이프리트 경은 드릴 수 없습니다.”

오스먼드는 답을 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난 침묵을 지키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계속 버텨 봐,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