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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67화 (67/227)

67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2)

“영혼의 맹세는 깨트릴 수 없습니다. 이미 찾아보지 않으셨습니까.”

오스먼드는 내가 황궁을 떠난 뒤, 영혼의 맹세를 깨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을 것이다. 거슬리는 나를 죽이기 위해서, 혹은 후에 있을 전쟁의 불씨를 위해서. 하지만 못 찾았으니 내가 멀쩡히 숨을 쉬고 있는 거겠지. 세상 제일 깔끔한 저놈이 날 살려 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 맹세는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지. 그대 스스로 그은 것인데 어찌 내게….”

“제가 폐하의 생각을 하며 목을 긋는다면, 폐하가 제게 해를 끼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궤변이 아닌가.”

“궤변인지 아닌지는 이대로 그어 보면 알겠지요. 어쩌시겠습니까.”

아직은 믿지 않는 오스먼드의 표정을 보고 칼날을 더욱 깊게 박았다. 그러자 심장을 강하게 부여잡은 오스먼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죽겠다는 건가, 고작 이프리트를 위해.”

“네, 그럴 겁니다.”

“어이가 없군, 이제 와서 빚을 갚겠다?”

“이렇게라도 갚아진다면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프리트를 살리지 않았다면, 그는 없었을 터.”

자신이 살렸으니 제 맘대로 하겠다는 건가? 가증스러운 새끼.

“제가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지도 않았겠지요. 어쩌시겠습니까. 그를 놔두고 폐하 혼자 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님 기어이 그를 데려가 저와 함께 죽으시겠습니까.”

오스먼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 내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이제는 젠의 발밑까지 닿았다.

“어찌 하시겠냐 물었습니다.”

난 아무 대답 없는 오스먼드를 재촉했다. 말해, 두고 가겠다고.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잖아.

검을 들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피가 부족해서인지 빈혈이 일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잘 버티고 있던 다리에 힘이 빠지자 재빠르게 다가온 젠이 검을 빼앗아 치우고는 쓰러지려는 나를 부축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조용히 하세요.”

아, 화났다.

낮게 깔린 젠의 목소리를 듣자, 목덜미에 소름이 끼쳤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가 짓고 있는 표정에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이때까지 그와 지내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당장 치료부터 하세요.”

“나 아직….”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크게 벌어진 상처를 잔뜩 굳은 얼굴로 바라본 그가 자신의 셔츠를 찢어 상처를 지혈해 줬다. 그러고는 내게 단단히 화가 났는지 나긋나긋했던 평소의 말투와는 반대로 매서운 명령을 내뱉었다.

“당장.”

날이 서 있는 젠의 눈빛에 서둘러 치유 마법을 썼다.

“<큐에라>.”

차고 있던 아크레나의 팔찌가 진동하며 마나의 사용량을 줄였다. 제대로 작동하긴 하는구나. 벌어진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피가 빠져 창백했던 피부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이제 멀쩡해….”

“황자님은 들어가 계세요. 폐하께선 절 찾아오신 것이니 제가….”

“나도 아직 안 끝났어.”

나는 내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마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게 하려는 젠의 손을 뿌리쳤다.

오스먼드는 아직 심장이 아린지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나를 괘씸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시겠습니까. 폐하는 이프리트 경에게 명령하실 수 없….”

“그만.”

심장을 잡고 있지 않은 손을 들어 말을 끊은 오스먼드가 천천히 나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손을 높이 들었고, 순간 뺨을 내려치는 줄 안 나는 어디 한번 때려 보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이것조차 그대에겐 해가 되겠지.”

잘 아네! 때리기만 해 봐라. 네 심장을 트위스트 시켜 버릴 거다.

“이프리트 경을 놔두십시오. 제가 폐하께 바라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오스먼드는 내 옆에 서 있는 젠을 쳐다본 다음, 이 상황이 꽤나 불편한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대의 뜻은 알겠으나 그건 불가능해. 내가 이프리트 경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아니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 않나.”

뭐야, 죽이려던 거 아니었어? 난 또 화살받이 하라고 부르는 줄 알았잖아. 나 괜히 생쇼한 거 아니야? 아니야, 어차피 한 번은 알려 줘야 했어. 나 건들면 너도 같이 뒤지는 거라고.

“그를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이미 예정되어 있던 일에 쓸 것이다.”

“그러니까, 어디요.”

말이 짧아졌다. 제국의 황제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지만… 내가 그런다고 해서 오스먼드가 뭐 어쩔 거야.

“언사를….”

“어디 말입니까.”

“높인다고 고운 언사가 되는 게 아니….”

“어디에 쓸 거냐고요.”

한 번 막 나가니 두 번은 쉬웠다. 해괴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한 오스먼드는 신경 쓰지 않는 게 정신에 이로울 거라 생각했는지 별달리 딴지를 걸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마물 토벌에 보낼 것이다.”

“제국은 군대가 따로 없습니까? 왜 잘 쉬고 있는 이프리트 경을 부르십니까.”

“그 군대를 통솔하던 게 이프리트다.”

“후임 없습니까?”

“그 경솔한 언사를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야.”

오스먼드는 더는 봐주지 않겠다며 담담했던 표정을 굳히고 황제의 위엄을 뿜어냈다. 더 이상 선을 넘으면 용서치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에 ‘어쩌라고, 나도 용서치 않겠다. 너 죽고 나 죽자!’고 할 순 없었다. 이것도 한 번만 먹히지 계속 쓰면 효과가 떨어진다.

“굳이 이프리트 경을 데려가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가장 믿음직하니까다.”

“이프리트 경이 없으면 망…. 힘드십니까?”

“그가 있는 편이 이득이기에 데려가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슬 대답해 주기 귀찮았는지 근엄했던 표정이 점점 짜증으로 물들었고, 말투에서도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에 입꼬리를 추욱 내린 채 상처받은 고양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내 표정을 확인한 오스먼드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숨을 쉬고는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세네카 제국과는 달리, 프레오나 제국은 군대가 움직이기 힘든 겨울이 오기 전 마물 토벌을 나가야 한다. 그대도 알다시피 이프리트만큼 검을 쓰는 자가 없으니 그가 있으면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질 것이며, 마음이 놓이지 않겠나.”

군사들을 생각해서 젠을 데려간다니, 꽤나 황제 같은 짓을 한다.

“그것이 폐하께서 직접 오실 정도로 중하신 일인 겁니까.”

“그대가 어찌 살고 있는지도 볼 겸 왔다만, 험한 꼴만 당했지.”

만일 지금의 상황이 만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그의 이마에 빠직 표시가 그려져 있었을 거다. 조금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오스먼드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자, 젠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을 따르겠다는 대답에 놀라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날 없는 사람인 듯 무시한 채 관심을 보이는 오스먼드에게 이어 말했다.

“일전에 받았던 명이었으니, 가겠습니다.”

그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오스먼드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시종일관 차분한 젠에게 눈을 돌려 그의 시선을 구걸했다. 네가 가겠다면 가는 건데….

“이번에는 본인이 괜찮다니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부르지 마십시오. 이프리트만 부르지 말고 다른 인재를 발굴해 내시라는 뜻입니다.”

젠을 대신해 오스먼드를 향해 도끼눈을 뜬 채 바락바락 대들었다. 네가 양심이 있으면, 어?! 그러면 안 돼, 인마! 나만 버렸어? 너도 같이 버려 놓고 이렇게 찾아와서 그러면 안 되지, 이 양심 없는 새끼야!

“하아…. 알았으니 그만 짹짹거렸으면 좋겠군.”

“이 정도는 짹짹에 짹도….”

“지금 당장 떠날 수 있게 준비하게. 일이 끝나면 바로 오지.”

오스먼드는 짹짹거린다는 내 말을 무시하곤 젠에게 명령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마음대로 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젠에게 손을 들어 대충 대답해 준 오스먼드는 같이 갈 것이라 소리친 내게 마음대로 하라 대답하고는 저택을 나갔다.

배웅은 필요 없는 건지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마차에 오르자 시종이 빠르게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쥐었고, 마차는 빠른 속도로 이곳을 떠났다.

오스먼드가 타고 온 마차는 크기만 클 뿐, 프레오나 제국의 문양이 찍혀 있지 않았다. 황족이 타는 화려한 마차가 아닌 걸 보면 공식적으로 온 건 아닐 거다. 다른 일이 있다 했으니… 정찰인가?

“당장 출발은 무슨, 일주일은 걸리겠구만. 그렇지…?”

살살 눈치를 보며 젠에게 말했다. 내 나름대로 대화의 창을 열어 보려 했지만, 그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젠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반응이 올지 계획을 짰다. 오스먼드의 이야기는 지금 상황에 좋지 않을 테니 넘어가고, 오늘 아침은 뭐 먹을지 얘기를 해 볼까? 아니야, 그건 너무 말을 돌리려는 것 같고. 오늘 잘생긴 것 같다고? 아니야, 젠은 항상 잘생겼지…. 그냥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서 할 말 없게 만들까? 그래, 그게 가장 나을 것 같다.

“저기, 젠….”

“황자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계획은 언제인지 거실로 나온 마린이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귀가 떨어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마린은 피 웅덩이 한복판에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발을 동동 구르며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닦달했다.

“이 피들은 다 뭐고, 황자님 옷은…!”

순백색이었던 셔츠는 전부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피는 마린이 놀라기에 충분했다. 마린을 따라 나온 노반도 얼굴이 창백해져서 내게 달려왔다.

“미르!”

“이거 내 피 아니… 맞긴 한데, 마법이야. 난 멀쩡해!”

노반은 유독 내 피 냄새를 잘 맡았지. 내 피가 아니라고 거짓말해도 소용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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