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4)
펑펑 울고 난 다음 날,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려가니 마린이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황자님, 좋은 점심입니다. 오랜만에 푹 주무셨네요.”
“좋은 점심이야, 마린.”
“아, 젠 님은 괜찮으신가요?”
마린이 내게 늦은 아침 인사를 해 줬다. 곧이어 아침부터 보이지 않는다는 젠의 소식을 물었다.
“아마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황자님이 잘못했을 테니 반성하세요. 카펫을 적시던 피도 수상하고….”
“그거 다 가짜 피야. 마린이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었어.”
나에 대한 신뢰도보다 젠을 향한 신뢰도가 높은지, 마린은 젠이 내게 화가 난 것을 본 뒤부터 의심을 했다. 또 내가 무모한 짓을 벌이지는 않았는지, 무리를 하지 않았는지 등등, 하나라도 걸리면 아주 작살을 낼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마린 네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하긴 했지.
“이번만 믿겠습니다.”
“응, 고마워.”
이번뿐이지만, 어쨌든 믿어 주겠다는 마린 덕분에 숨을 돌렸다. 마린은 은근 집착이 심해 자신이 알아야 하는 거라면 끝까지 알아내니까. 오죽하면 암살을 독학했겠어. 최근에는 암기도 직접 다듬는다던데.
“가지고 가실 짐은 전부 챙겼습니다. 가벼운 짐은 가방에, 무거운 짐은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만, 따로 챙기실 물건이 있으신가요?”
“딱히 챙길 건 없어. 고마워, 마린.”
“아닙니다. 솔직히… 프레오나 황궁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황자님께서 가야 하신다니 가야죠.”
마린은 세상에서 가장 쓴 초콜릿을 삼킨 듯한 얼굴을 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마린의 눈치를 봤다.
“나, 나도 싫은데 젠 혼자 가면 외로울 테니까….”
“정말 그 이유뿐인가요?”
“그럼, 그 이유 말고 또 뭐가 있겠어. 하하.”
눈을 게슴츠레 뜬 마린이 정말 그것뿐이냐며 눈치를 줬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대충 감이 오긴 하지만, 젠과 함께 있고 싶어서 고집 부렸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하니.
“로테 별궁 주방장의 일자리를 빼앗겠다는 집념이 강하셨으니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해서요.”
“아.”
맞다. 내가 그놈 다시 만나면 조져 놓기로 마음속으로 열심히 생각했는데. 드디어 조질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물론 주방장 때문에 힘들다고 신세 한탄 조금 하면 굳이 내가 조지지 않아도 마린과 젠이 조져 줄 것이다.
“저도 준비를 해야겠어요. 챙길 게 많아지겠군요.”
순식간에 날이 선 눈빛을 한 마린은 챙길 게 많아지겠다며 주방에서 무뎌져 쓰지 않는 식칼을 꺼내 들고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뭘 하려고 그걸 들고 가…?
“미르, 마린 누구 죽이러 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우리를 보고 있던 노반이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물었다.
“네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니?”
“응. 그래도 즐거워 보여.”
무딘 식칼을 들고 사라진 마린을 향해 누구 죽이러 가냐 물었으면서, 그것이 또 즐거워 보인다는 노반은 평소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곤 안아 달라며 손을 뻗었다.
그래, 네가 300살인 걸 잊고 있었다. 마냥 아기는 아니었지.
“노반, 우리는 프레오나 황궁으로 갈 거야.”
“응, 들었어.”
“같이 가도 괜찮겠어?”
“응, 미르가 있으면 괜찮아.”
부드럽게 목을 감아 오는 노반을 껴안아 줬다. 황궁으로 가면 귀족들이 많을 거다. 그것 때문에 노반이 겪었던 과거의 상처가 다시 떠오르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내가 있으면 괜찮다고 하니 아마 괜찮겠지.
“그래도 조금 불편할 것 같은데? 여우로 있어야 하잖아.”
특별히 신원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 어려울 것이다. 이곳이 세네카였다면 빈민가에 구경 갔다가 발견해서 데려왔다 하고 입 무거운 시종 한 명에게 부탁해 입적시키면 되겠지만 이곳은 세네카가 아니니 그런 과정을 거치는 건 조금 어려울 것이다.
“난 정말 괜찮아!”
우리의 작은 여우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
“힘들면 꼭 말해 줘, 알았지?”
“응, 그럴게.”
노반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스먼드한테 단단히 말해 둬야지. 우리 노반 건드리는 새끼들 있으면 다 죽여 버릴 거라고. 물론 진짜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내 부탁을 안 들어 주면 어떻게 되나 두고 보라지. 진정한 분탕질이 뭔지 보여 줄 것이다. 단시간에 제국이 망하는 걸 보여 주마.
“점심은 간단하게 먹을까?”
“좋아! 난 텃밭 정리해야 돼. 아직 심어 놓은 게 많으니까….”
순식간에 울상이 돼 버린 노반을 달래 줬다. 배추를 뽑자마자 다른 씨앗을 심었으니 언제 싹을 틔울지 몰라 걱정되는 거겠지.
“음…. 아직 씨앗이니까 평범하게 자라게 두면 괜찮을 거야.”
“불안한데….”
“마커스한테 봐 달라고 하면 되지.”
“마커스 불안한데….”
“그럼 달리?”
“달리도 불안해.”
“그럼 루독은?”
“안 돼, 루독도 불안해.”
마커스도 싫고, 달리도 싫고, 루독도 싫으면 누가 남았지? 셀비스랑 미네르바? 영주성에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네르바나 셀비스는 어때?”
“미네르바는 안 돼. 많이 약해져 있었어. 세르비스는 미네르바랑 있어야 돼서 부르기 미안하고.”
노반은 약해진 미네르바와 그녀의 곁을 지켜야 하는 셀비스는 안 된다며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보라 했다.
또 누가 있지? 노반이 믿을 수 있고, 작물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아, 시아가 있구나. 하지만 시아한테 시킬 수는 없잖아? 걔가 과일 가게를 하고 있어도 일단은 왕자인데.
시아의 이름을 절대 내뱉지 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울상을 짓고 있는 노반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럼 시아한테 물어볼까?”
“시아 형이면 괜찮을 것 같아.”
그래, 네가 만족한다면 왕자님이든 왕님이든 무슨 상관이겠어. 시아 정도면 믿음직하다 생각하는지, 울상이던 노반의 얼굴이 활짝 웃고 있었다. 웃으니까 예쁘네, 우리 노반이.
“그럼 시아한테는 내가 따로 물어볼게. 파드가 잘 전해 줄 거야.”
“응, 고마워.”
주에 한 번 정도면 충분하겠지. 혹시 모르니 마커스한테도 말해 놔야겠다. 제일 만만한 게 마커스지.
칼을 열심히 갈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린을 대신해서 오늘 점심은 내가 하기로 했다. 이미 메뉴도 생각해 뒀다.
“이건 피크닉 때 싸 가려고 아껴 뒀던 건데, 오늘 만들어 먹자.”
“뭔데?”
“감자 샐러드를 만들 거야. 감자로 샐러드를 만들어서 빵이랑 같이 먹는 거지.”
대학생 때, 시간이 없는 날에는 감자 샐러드를 대량으로 만들어 며칠 동안 그것만 먹었던 적이 있다. 나중엔 전부 상해서 버렸지만.
감자와 달걀을 삶기 위한 물을 올리고, 샐러드 안에 넣을 부재료로 양파, 당근, 샐러리, 옥수수 그리고 조금 매콤한 맛을 위해 선물로 받았던 록타스 허브를 준비했다.
“노반은 옥수수 알갱이 분리해 줘. 이렇게 하면 쉬워.”
노반에게 포크와 옥수수를 쥐어 준 뒤 옥수수와 알갱이의 사이에 포크를 꽂아 넣고 떼어 내는 것을 시범으로 보여 줬다.
“오오! 대단해! 미르 천재였구나!”
“내가 한 똑똑함 하지.”
인터넷에서 봤던 거지만, 그걸 기억해 낸 내가 똑똑한 거라고 하지 뭐.
노반의 서투른 포크질에 옥수수 알갱이가 이리 튀고 저리 튈 때 나는 옆에서 양파, 당근, 샐러리를 썰었다. 원래 샐러리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곳의 샐러리는 그 특유의 쓴맛이 강하지 않아 밥 생각이 없을 땐 생으로 먹기도 했다.
알맞게 삶아진 감자와 달걀의 껍질을 깐 뒤 큰 볼에 담아 주걱으로 으깨다가 옥수수 분리를 끝낸 노반에게 쥐어 줬다. 감자를 으깨는 전문 도구인 매셔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없는 관계로 주걱으로 으깨야 했다.
“달걀 식감이 있으면 좋으니까 너무 으깨지 말구, 감자만.”
“알았어!”
노반이 잘 으깨고 있는 볼에 옥수수 알갱이와 잘게 썬 양파, 당근, 샐러리를 넣었다. 록타스 허브까지 잘게 갈아 뿌린 뒤 노반에게 볼을 넘겨받아 주걱을 이용해 크게 섞었다. 그런 다음 버터 향이 고소하게 풍기는 부드러운 크루아상에 완성된 감자 샐러드를 터질 정도로 가득 채워 넣었다.
그릇 위에 산더미처럼 올려진 크루아상을 본 노반이 입을 떡 벌리며 물었다.
“이거 다 먹을 수 있어?”
“당연하지. 꾸역꾸역 위장으로 넣다 보면 다 먹게 돼.”
“그건 먹는 게 아니라…. 아니야, 맛있으면 됐지.”
나를 향해 어이없는 눈빛을 보낸 노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린을 부르러 갔다. 젠은 언제쯤 오려나. 크게 소리치면 듣고 오려나? 나는 저택 밖으로 나가 숨을 크게 들이켠 후 내뱉으며 젠을 불렀다.
“젠~!”
“네, 미르 님.”
“악!”
젠의 낮은 목소리가 등 뒤편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 발을 삐끗해 넘어질 뻔했다. 젠이 어깨를 잡아 주지 않았다면 흉하게 넘어졌을 거다.
“놀라셨나요?”
“응, 엄청. 언제 왔어?”
“방금이요.”
“젠, 너 무슨 순간 이동 그런 것도 해?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
순간 이동 같은 것도 하냐는 내 말에, 그가 눈을 예쁘게 휘곤 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붕 위에 있었어요. 고양이가 올라갔더라구요.”
“고양이?”
“네, 지금은 없어요. 날이 추운데 얇게 입고 나오셨네요.”
그가 내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체온을 확인했다. 따듯한 손이 차가워진 뺨을 데워 줬다. 나보다 밖에 더 오래 있었는데 어쩜 이리 따듯한지. 그에 그치지 않고, 젠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줬다. 아, 따뜻해.
“잠깐 너 부르려고 나온 거라. 얼른 들어가려 했어.”
“무슨 일 있으세요?”
“점심 먹자고 불렀어. 나랑 노반이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너무 잘된 거 있지? 진짜 맛있어.”
“미르 님이 만드신 거라면 뭐든 맛있죠.”
그리 말한 그는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아 배가 고프다며 겉옷이 걸쳐진 내 어깨를 그러잡곤 저택으로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