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5)
“얼른 와!”
식탁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노반이 젠과 나를 불렀다. 1인당 두 개의 크루아상이 배분되고 마린과 노반에겐 사과 주스, 나와 젠의 앞에는 오렌지 주스가 놓여 있었다.
“사과 주스?”
“오렌지 주스가 다 떨어졌어. 그래서 나랑 마린은 사과 주스!”
“노반은 오렌지 좋아하잖아. 내 꺼 먹어도 돼.”
“미르도 오렌지 주스 좋아하잖아. 난 괜찮아!”
송곳니가 보이게 활짝 웃은 노반이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말했다.
아아- 예뻐라.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온다면 우리 노반이 아닐까? 악마도 있는데 천사가 왜 없겠어. 혹시 몰라, 드로이프의 다른 이름이 천사일지도.
“노반 마셔. 나는 어떤 주스든 좋아해.”
내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노반의 사과 주스와 바꿔 줬다. 그에 눈이 커지고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노반의 모습에 참고 있던 웃음이 터졌다. 우리 노반 오렌지 주스 먹고 싶었구나? 게다가 기특하게 젠한테도 오렌지 주스를 줬네.
나와 젠에게 오렌지 주스를 넘겨준 마린과 노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이런, 오렌지 주스가 부족하네요. 남은 두 명은 어쩔 수 없이 사과 주스를 마셔야겠어요.’라고 마린이 말했다면, ‘그럼 미르 주자! 미르가 오렌지 주스 좋아하니까!’라고 노반이 말했겠지.
‘젠 님도 오렌지 주스를 좋아하는 걸요?’라는 마린의 대답이 돌아오면, 노반은 ‘으으… 그럼 젠한테도 주자. 나도 사과 주스 먹을게….’라고 대답했을 거다.
양보를 가르치려는 마린과 양보를 배우려는 노반의 모습을 상상하며, 부모님이 지을 법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자리에 앉은 젠이 내 사과 주스를 자신의 오렌지 주스와 바꿔 주었다.
“이거 드세요. 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정말?”
“네, 괜찮으니 드세요.”
“으음… 마린은 오렌지 주스 안 마시고 싶어?”
“전 사과가 더 좋습니다.”
평소처럼 살풋 웃은 마린은 오렌지 주스보다 사과 주스가 더 좋다며, 내가 바꾸지 못하게 자신의 주스를 한 모금 마셔 입도장을 찍었다. 결국, 인기가 없는 사과 주스는 어른스러운 마린과 젠에게, 인기가 좋은 오렌지 주스는 가장 어린애 같은 나와 노반에게 왔다. 사실상 나이는 노반과 내가 제일 많은데 말이지.
“맛있어!”
어느샌가 한입 가득 크루아상을 베어 먹은 노반이 식당이 울릴 정도로 크게 쩌렁쩌렁 소리쳤다.
“노반이 직접 만들어서 더 맛있나 보다.”
“응! 진짜 맛있어! 일주일 동안 이것만 먹어도 좋아!”
“일주일은 무리지만, 3일 정도는 먹을 수 있을 거야.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난 크루아상을 손에 든 채 잠시 추억에 잠겼다. 자취할 때 잘 써먹었었지. 가끔 너무 많이 만들어서 옆집도 나눠 줬었는데, 상대가 그린 라이트인 줄 알고 착각해서는 스토킹도 당했었지.
“미르 님.”
멍하니 크루아상만 보고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빵을 거의 다 먹어 가던 그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응? 아, 응.”
“미르, 얼른 먹어!”
지켜보고 있던 노반이 주는 눈치에 크루아상을 베어 먹으려 입을 벌렸을 때 저택 밖에서 묵직한 마차를 이끄는 말발굽의 소리가 들렸다.
아, 설마.
“젠장할 새끼.”
“…제가 나가 볼 테니 미르 님은 드시고 계세요.”
젠이 자신이 나가 보겠다며 일어나려던 나를 제지했다. 그는 옆으로 빼 둔 검을 허리에 찬 뒤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내려놓은 크루아상을 위장으로 쑤셔 넣었다. 전투적으로 씹으며 그 즉시 소파에 걸쳐 있는 겉옷을 들고 젠을 따라나섰다.
문 밖으로 나가자 혹시나가 역시나. 반갑지 않은 오스먼드가 나를 불렀다.
“4황자.”
“…프레오나의 태양을 뵙습니다.”
처음 올 때는 달랑 지 혼자 왔으면서 지금은 몇십 명의 군사들이 오스먼드의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얼굴 보면 바로 욕을 해 주려고 했는데,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 그럴 수 없었다. 저거 일부러 데려왔겠지, 나 허튼짓 못 하게 하려고.
“예상보다 늦게 오셨군요,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이야기하시더니.”
“그대도 알다시피 바쁜 몸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폐하께서 이 먼 곳까지 직접 오셨다는 게 많이 놀랍군요.”
진심으로 좀 많이 놀랐다. 와도 항상 붙어 있는 비서 놈이나 서신을 전달할 귀족 놈이 오려니 했지, 누가 본인이 올 줄 알았냐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얼 못 하겠나.”
“원하는 것은 얻으셨습니까.”
“덕분에.”
덕분은 개뿔. 내가 없었다면 지금 당신에게 가장 쓸모 있는 젠을 마음대로 휘둘렀겠지.
오스먼드의 눈은 서늘한 뱀과 같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기백에 조금 움츠러들 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쳤다. 한 번 쫄지, 두 번은 안 쫄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래, 그대가 없었다면 계획했던 일정이 전부 어그러졌겠지. 고마운 마음뿐이네.”
그는 전부 내 덕이라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작게 웃었다. 난 오스먼드가 웃는 영문을 모르겠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거 비꼬는 거지? 이상하게 칭찬같이 느껴지네?
비꼬는 건 오스먼드가 이 구역 짱이다. 타루스가 살아 있을 적, 자기 형한테 했던 말의 반의반이 비꼬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비꼬는 말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내가 자해를 하며 자신을 협박했던, 어제 있었던 일은 제 가장 큰 치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혹여나 꼬투리가 잡힐까 싶어 입 밖으로 꺼내진 않겠지.
“그대가 크로스반 후작을 도왔다고 들었다. 전보다 기운이 없어 보여 놀랐지만 그것조차 그대 덕에 회복한 거라더군.”
아, 그거.
“잘했다.”
한번 고까운 사람은 뭘 해도 고까워 보이는지, 악의 없는 칭찬을 해 주는 저 모습도 전부 가식 같았다.
“꽤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습니다. 해독약이 없는 독을 관찰해 해독약을 연구하고, 제 몸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열과 성을 다했었죠.”
“애썼군.”
“아무리 제가 타국의 사람이라지만, 생명은 소중한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타국의 황자인 내가 너희 제국을 위해 노력했으니 너도 그에 대한 포상을 줘야 하지 않겠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듯, 많이 뜯어낼수록 좋은 거 아니겠냐고.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황제가 돼서 맨입으로 꿀꺽하진 않겠지. 특별 보상을 내놓거라!
오스먼드는 내 뻔뻔한 행동이 어이없는 듯, 평평했던 미간을 단번에 찌푸렸다. 그러고는 가까이 서 있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곤 말했다.
“내 그대의 공을 높이 살 터이니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보거라.”
“황송하오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예의상 하는 말인 거 알지? 대가를 바라고 한 일 맞으니까 여기서 끊어 치기만 해 봐. 내가 너 평생 저주할 거야. 콜록콜록. 가련하지만 끈기 있는 소녀 만화 주인공의 모습을 따라 해 봤다. 그에 다물렸던 오스먼드의 입이 벌어지고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사양하지 말고 말하게, 그대는 받을 자격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제게 상을 주시고 싶으시다면….”
오스먼드는 뻔뻔하게 웃음 짓는 내가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날렸고, 나는 그런 그를 무시했다.
뭘 해 달라고 하지? 앞으로 우리 눈앞에 띄지 말라고 그럴까? 쯧,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인데 그건 너무 예의 없는 것 같고. 깔끔하게 궁전 하나 지어 달라고 할까? 아니면 소왕국을 사 달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프레오나 돈 많잖아. 가지고 있으면 어디 쓸데가 있겠지. 퍼디스를 혼낼 수 있다거나, 퍼디스를 망하게 할 수 있다거나, 퍼디스를 족칠 수 있다거나 같은.
무엇을 달라 해야 잘 뜯었다고 소문이 날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오스먼드가 기다리기 지쳤는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장 원하는 게 없다면 나중에 말해도 좋으니 천천히 생각하게.”
“그래도 괜찮습니까?”
“그래, 정해지는 대로 알려 주면 숙고해 본 다음 보상을 주지.”
“예,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오스먼드의 말대로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유예 기간은 젠의 토벌이 끝나기 전까지다. 아, 회복하는 시간도 포함. 토벌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바로 떠나지는 못하겠지.
“서둘러 준비하게, 갈 길이 머니.”
“예, 그리하겠습니다.”
난 최대한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편하게 살았더니 높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기분이다. 급할 때는 4황자의 기억을 꺼내면 되지만, 항상 쭈그린 기억밖에 없는 저자세라 재수 없는 오스먼드를 대하기엔 내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구역의 짱인 오스먼드를 향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사회적으로 난 쩌리니까.
오스먼드에게 허락을 맡고 젠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가 접시에 곱게 놓인 크루아상을 가져와선 젠의 입에 쑤셔 넣었다. 밥은 먹고 가야지! 목이 막힐까 봐 주스도 챙겨 건네줬다.
이 정도면 망가질 법도 한데 꾸역꾸역 먹는 모습까지 멋있다. 난 그가 크루아상 하나를 전부 먹는 것을 본 다음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아,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