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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74화 (74/227)

74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9)

“죄송합니다. 함께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황자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방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에멀슨 공자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준비된 방이 없다는 소식에 벙찐 나 대신 젠이 옆에 있던 에멀슨 공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입니까.”

“최대한 빠르게 준비할 테니 그동안은 임시 거처에서 지내 주셨으면 합니다. 임시라고는 하나, 불편한 것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저택이 꽤 큰 것 같은데, 대충 치워도 좋은 방 하나는 나오겠구만.

사과를 하는 공자의 표정이 많이 굳어 있었다. 하지만 미안함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형식상 사과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세네카의 사람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사과할 때는 죄송스런 표정이라든가 뉘앙스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지 않은가.

때문에 내게 그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 못한 사람’으로 찍혔다. 그런 사람이 좋은 방을 준비해 준다 해도 못 미덥다. 젠을 제외한 오스먼드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곳에 혼자 있는 것도 좀 불안하고.

나는 임시 거처로 안내해 준다는 시종의 말에 움직이지 않고 젠을 쳐다봤다. 와… 진짜 잘생겼네. 덕분에 좋은 생각이 났다. 그 좋은 생각을 알려 주려, 여태껏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나를 보고 있던 오스먼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제게 괜찮은 생각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고개는 빳빳하게, 눈은 살며시 내리깔고 이야기했다. 뭔가 조금 진중한 것 같아 보이게.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프리트 경과 함께 방을 써도 되겠습니까.”

“같은 방을?”

“예, 부끄럽지만… 낯선 곳에서 혼자 잠드는 걸 무서워합니다.”

그는 더 설명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오면 허락하지 않을 심산인 것 같았다.

“날이 쨍한 것을 보니 오늘 밤은 폭풍이 올지도 모르겠군요. 폭풍이 오기 전은 항상 지금처럼 고요했습니다.”

“고작 폭풍 따위에 겁을 먹는 것인가.”

“또한 누군가가 밤늦게 침입하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이프리트 경은 폐하께서도 인정한 검사이자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실례를 무릅쓰고 청하겠습니다.”

찔리지? 네가 들어왔었잖아. 갑작스레 발코니로 쳐들어와서는 자신은 황제가 될 것이니 얌전히 죽으라고 협박하고. 그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 침입의 장본인인 오스먼드는 내 말을 듣고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입도 꾹 다물고 가만히 있기에 그를 향해 샐긋 웃어 줬다. 아주 예쁘게. 이러면 넘어오던데.

“원하는 대로 하게.”

빙고. 예쁜 얼굴은 써먹어야 아깝지 않지.

언짢아 보이는 오스먼드가 적당히 대꾸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에 임시 거처로 안내하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종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이프리트 경의 방으로 안내해 주겠나?”

저택의 오른쪽 계단을 올라 시종이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왔다. 시녀인 마린의 방까지 안내를 마친 시종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떠났다.

적막한 방에 우리밖에 남지 않게 되자 빠르게 방 주변을 살핀 젠은 내가 껴안고 있던 노반의 뒷덜미를 잡곤 가볍게 침대로 던졌다. 침대로 던져진 노반이 짜증 난다는 듯 젠을 향해 끼잉 하고 울었다.

“가, 갑자기 노반은 왜…?”

“계속 안고 계셨죠?”

“아, 응.”

“팔이 저리실 것 같아서요.”

그의 말대로 팔을 의식하자 그제야 서서히 저리기 시작했다. 저린 팔을 풀어 보려 주먹을 쥐었다 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에 미간을 약하게 찌푸린 젠이 내 팔을 조심히 잡아 적당한 힘으로 아프지 않게 주물러 줬다.

“많이 저린가요?”

“아니, 많이는 아니고….”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라니,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야.”

또 혼나는 게 아닐까 눈치를 봤다. 내가 종이 인간도 아닌데, 무리라고? 그건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다.

“근육이 없으시니 충분히 무리가 될 수 있어요.”

“내가 근육이 왜…!”

아, 그러네. 없네.

내 팔을 주무르고 있는 젠의 팔뚝을 보니 알겠다. 내 팔은 그냥 뼈다귀에 살만 감싸져 있는 거였구나.

“미르, 많이 무거웠어?”

어느새 인간으로 변한 노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곧이어 젠이 잡지 않은 반대 팔을 잡고는 고사리 손으로 주물주물 반죽을 하듯 주물러 줬다.

“노반이 무거운 게 아니라, 내가 힘이 없는 거래. 그리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어. 힘들면 진작 내려 줬겠지.”

“그렇긴 해. 미르는 너무 말랐어.”

반죽을 주무르던 노반이 갑작스레 뼈를 때렸다. ‘미르는 약해도 괜찮아~’라든가 ‘미르는 그대로도 충분해~’ 같은 다정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마차 안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요즘 극딜을 배우고 있나?

“그래…?”

“응, 미르는 더 먹어야 돼. 셀비스도 걱정 많이 하더라고.”

그랬지. 셀비스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어봤었으니까. 그때 젠한테 처맞고 날아갔었는데, 멍은 잘 빠졌으려나.

“이제 괜찮아.”

멀쩡해진 팔을 휘두르며 빼내었다. 하지만 젠의 생각은 다른지, 아직 멀었다는 듯 빼낸 팔을 잡아 다시 주물렀다.

“괜찮대도….”

“충분히 풀어 줘야 다음 날 아프지 않아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가는 내게 젠은 단호하게 쓴소리를 했다. 난 깊이 반성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오늘처럼 하루 종일 노반을 안고 있을 것 같으니 아프면 안 되지.

“내일은 책이라도 미리 빼 가야겠어. 오스먼드 앞에서 아무것도 안 하려니 지루하더라.”

“새 마차를 준비해 달라 하면 돼요.”

“누구한테? 에멀슨 공자?”

“네, 그가 이곳의 주인이니까요.”

그 주인이라는 사람은 날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네. 내 얼굴을 봤다면 웬만해서는 날 싫어할 수가 없는데. 예쁜 사람한테 원수졌나?

“걔가 나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어? 내 첫인상이 안 좋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저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걸지도요.”

“널 안 좋아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보다 더 충격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흑심을 빼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도 젠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말해 봐야 입 아플 정도로 잘생겼지, 성격도 모난 부분 없이 완벽하지, 무뚝뚝해 보이지만 엄청 다정하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남들이 말하는 거 들어 보면 칼질도 수준급이라 하고, 내가 건들지만 않았어도 신분 높은 백작에다가, 그것도 모자라 똑똑하기까지. 그런 젠을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어?

“같은 백작 가문의 장자였고, 나이도 비슷했어요. 덕분에 서로 비교를 많이 당해서 불만이 많았을 거예요.”

아아- 열등감 같은 거구나. 그렇겠네, 젠은 너무할 정도로 완벽하니까.

“하긴… 비교당하는 건 피곤하지.”

“에멀슨 공자는 저와 다르게 처세술에 강했거든요. 사교성이라든가, 붙임성도 좋아서 비교가 많이 됐었어요.”

“그랬어?”

“네, 에멀슨 공자의 곁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죠. 혼자 있는 저와는 다르게 인망이 두터운 자였어요.”

에멀슨 공자가 인망이 두텁든 머리털이 두껍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젠이다. 젠이 혼자 있었다고? 말이 안 되는데…. 혹시 그거인가, 자발적 아싸 같은?

생각할 수 있는 루트는 두 개다. 젠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본인이 의식하지 않아 인기 있는 줄 모르는 루트. 남은 하나는 젠의 그 멋진 분위기에 밀려 멀리서만 지켜보자 같은 연예인 분위기가 형성된 루트.

이렇게 잘생겼는데 친구가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분명 본인이 알게 모르게 다 쳐 낸 거라 장담한다. 그리고.

“친구 같은 거 없어도 돼. 다 부질없거든.”

“그런가요?”

“응. 아, 물론 인생에 도움되는 친구는 필요하지만, 진짜 친구는 찾기 힘들어.”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여유롭게 뒹굴고 있던 노반이 여우의 모습으로 변했다. 트집 잡힐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열자 사탕이 가득 담겨 있는 거대한 유리병을 안고 있는 에멀슨 공자가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에멀슨 공자라 했나. 무슨 일이지?”

에멀슨 공자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내가 앉아 있는 이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내 앞까지 온 그는 턱을 빳빳하게 든 채 누군가의 말을 전했다.

“폐하께서 저녁 식사에 4황자님을 초대하셨습니다. 간단한 식사이니 거절 말고 오시라 하셨습니다.”

황제의 말을 전해서인지, 전할 말이 끝나자 에멀슨 공자는 다시금 얌전하게 고개를 내렸다. 오늘 하루 종일 오스먼드의 얼굴을 봤는데 밥 먹을 때까지 오스먼드를 보라고? 밥은 무슨, 체하지만 않으면 다행이겠다.

“폐하께서 나만 부르셨나?”

“네, 그렇습니다. 황자님께서 데려오신 여우와 이프리트 경의 식사는 따로 준비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물론 그것도 걱정이긴 하지만…. 우리 노반 요즘 위가 늘었는지 많이 먹는데 괜히 이상한 사료 같은 거 주는 건 아니겠지?

“내 것도 준비해서 가져와 줬으면 하네. 폐하의 앞에선 신경 쓸 게 많아 음식이 넘어가질 않으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용건은 그게 끝인가?”

괜히 얄미운 마음에 퉁명스레 물었다. 삐쭉빼쭉한 내 질문에도 개의치 않는지 계속 안고 있던 거대한 유리병을 내게 건넸다.

“수도 가장 유명한 제과점에서 파는 사탕입니다. 아까의 무례함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준비했습니다.”

“사죄의 뜻이라니?”

“머무르실 방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황자님께 불편함을 드렸습니다. 그에 대한 사죄입니다.”

“그대의 마음은 고맙지만, 이쪽도 미리 알리지 못했으니 따로 사죄할 필요는 없어.”

에멀슨 공자는 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주는 선물은 괜히 의심쩍으니 거절했다. 딱히 내가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젠을 싫어한다니 조금 괘씸하니까. 사탕 그까이 꺼 못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낑…!”

에멀슨 공자가 내민 손을 거두려 할 때, 침대에 웅크리고 있던 노반이 내게 안겨 와선 다급하게 발을 굴렀다. 아, 우리 노반 사탕 좋아했었지.

“…고맙게 받겠네.”

“마음에 드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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