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10)
건네받은 사탕 유리병은 노반에게 주면 하루 만에 다 먹을 테니 건강에도 치아에도 좋지 않을 거다. “많이 먹이면 이가 상하니 적당히 줘.”라는 말과 함께 깐깐한 젠에게 넘겼다. 노반이 싫어할 테지만… 그래도 이가 아픈 것보단 나으니까.
방을 나서기 전, 젠은 짧게 고개를 숙여 나를 배웅해 줬다. 그에게서 언짢음이 보였지만 특별히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내가 쓸데없이 따라온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건 싫은데…. 젠이 나를 귀찮아하진 않을까 걱정하며 멍하니 걷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건지 에멀슨 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님의 말씀대로 오늘 밤 폭풍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그거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건데.
“어릴 적에 세네카 제국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프레오나 제국과는 달리 조경이 화려해 놀랐었죠. 특히 수도가 정말 예뻤습니다.”
“그랬군.”
수도만 예쁘지 지방은 안 예쁠걸.
“신기한 문물도 많았었죠. 마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흥미가 일었습니다. 황자님께선 마법을 다루실 줄 아십니까?”
“조금은.”
“역시, 세네카의 황족다우시네요.”
“출중한 것도 아니니 띄우지 말게.”
“마법은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 들었습니다. 출중하지 못하시더라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그 이후에도 공자의 입은 쉬지 않았다. 공자가 어떤 질문을 하든 전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쯤 하면 입 닫고 조용히 갈 만도 한데, 그의 친화력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하아….”
조금 피곤해졌는지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에 잘 걷다 뚝하고 멈춰 선 공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직구로 꽂혔다. 난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공자를 쳐다봤다. 그런 내 시선에도 그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꽤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또라이가 나타난 것 같아 당황했다.
그나저나 뭐라 대답을 한담. 아니라고 잡아떼기에는 지금껏 너무 대충 대답했었고, 솔직하게 말하기엔 찝찝한데.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복도 한복판에 멈춰 선 그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하지만 눈에 띄게 조용해진 공자의 태도에 괜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결국 무시는 길게 가지 못했다.
“냉대는 그대가 했지, 내가 한 것이 아닐 텐데.”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을 구긴 건 너였잖아.
어디 한번 들어 줄 테니 해명해 보라는 뜻으로 공자를 응시했다. 그에 고개를 숙이며 공자가 말했다.
“냉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죄송한 마음에 지루해하시는 것 같아, 혹여나 제가 불편하신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젠이 에멀슨 공자에 대해 이야기했던, 처세술이 강하다는 말이 이해가 됐다. 말투도 정중하고, 말의 물꼬를 트는 것도 자연스럽다. 학식이 높은 집안 자식인 건 티가 나는데…. 아, 모르겠다. 내 인생에 관련도 없는 사람을 분석해 봐서 어쩌자는 거야.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이다. 괜히 시간 낭비 말고, 얻어 낼 것만 얻어 내야지.
“그대는 이미 사죄하지 않았나. 끝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
“황자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혹여 불편한 것이 있으시다면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사양 않고.
“아, 그러고 보니 불편한 게 하나 있네.”
노골적이라 싶을 정도로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에 에멀슨 공자는 눈웃음을 살짝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황자님의 편의를 위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차를 준비해 줄 수 있겠나? 오는 길에 마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내 의도치 않게 폐하께 폐를 끼쳐서 말이네.”
“예, 문제없이 준비하겠습니다.”
“덕분에 폐하께서 편히 갈 수 있겠어. 고맙네.”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화사하게 웃는 에멀슨 공자를 따라 나도 같이 화사하게 웃었다. 웃는 건 내가 더 예쁘지.
한 건 해결했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저택 한번 되게 크네. 오스먼드를 늦게 보는 건 좋지만 공자와 걷는 건 조금 어색해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 에멀슨 공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프리트 경과는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못 지낼 건 또 뭔가.”
“그자는 옛날부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뭐야, 진짜 친구가 없던 거였어? 밀어내거나 눈치를 못 챈 게 아니라?
젠이 정말 그랬었냐는 물음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걸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정말인가?”
“본인에게 물어보셔도 같은 대답일 것입니다.”
맞다, 본인 입으로 말하긴 했다. 자신은 처세술, 사교성, 그리고 붙임성이 없었다고. 그래도 사람이 안 온 게 아니라 자신이 거부한 거잖아? 자발적 아싸 같은. 그건 어울리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신기하군. 이프리트 경이 워낙 훤하게 생겨서 그런가, 난 친우가 많은 줄 알았거든.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이가 없었나? 아님 연인이 있었다거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혀 없었으니.”
에멀슨 공자는 그리 말하며 얕게 웃었다. 우리의 소문을 듣고는 내가 질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거 질투 아니다. 그냥 단순한 궁금증이지. 젠이 자기 입으로도 연인은 없었다고 했고, 소문도 남색을 즐긴다는 그런 것뿐이었으니 그냥 혹시나~ 혹시나 제3자의 눈으로 봤었을 때 그런 사람이 없었나~ 하는 단순한 궁금증이다.
“꽤나 지루하게 살았겠군. 그리고 딱히 걱정 안 했네. 내가 그런 것을 걱정해서 뭐 하겠나.”
진짜다. 걱정 안 했다. 안 했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에 능청스런 웃음을 지은 에멀슨 공자가 무언가 갑작스레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아, 몰베인 공작 전하를 알고 계십니까?”
몰베인 공작 전하라면… 레이가를 말하는 거지?
“알고 있네. 그자가 왜?”
“이프리트 경이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이가 몰베인 공작 전하입니다. 덕분에 다른 이들과 교류가 없던 이프리트 경이 남색가란 소문이 났었지요.”
그래서 젠이 남색가란 소문이 돌았던 거구나. 하긴, 레이도 화려하게 생겨서 오해할 만한 건덕지가 좀 있지. 그래, 너무 뜬금없는 소문이긴 했다. 젠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항상 마물 사냥을 하러 가고 수도에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는데 남색을 언제 어디서 하겠냐고.
“그랬었군.”
“제게는 평범한 우정으로 보였지만, 다른 영애들의 눈에는 아니었나 봅니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게이나 돼 버려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하게 잘생긴 애 옆에 잘생긴 애 있어서 그렇게 보인 걸 수도 있다. 당시의 영애들은 한창 상상력이 풍부해지는 사춘기를 겪고 있을 청소년이었을 테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마음에는 안 들지만.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은 쉽게 신뢰할 수 없지.”
젠과 레이가 친하게 지낸 무렵이라면 레이의 곁에서 누이와 부모님이 떠났을 때일 거다. 많이 힘들었지만, 곁에 있던 이프리트가(家) 덕에 잘 이겨 냈다는 그때 말이다. 게다가 레이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다며 내게 연애 상담을 했었고, 젠은… 확실하게 말은 안 했지만 나를 좋아하잖아? 그러니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맞습니다. 그저 소문일 뿐입니다.”
에멀슨 공자는 소문은 신뢰할 수 없다는 내 말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긍정을 해 줬다. 덕분에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식당 문 앞에 섰다. 이 문만 넘으면 오스먼드가 있는 거지? 하, 들어가기 싫다. 같이 있으면 머리 아프단 말이야.
“이곳입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난 거북이와 같은 속도로 천천히 식당에 들어갔다. 화려하진 않지만 매끈하게 관리되어 있는 흰 도자기가 한 줄로 나란히 장식되어 있었고, 한쪽 벽에는 내 키를 웃도는 거대한 수족관이 놓여 있었다.
“보리언.”
상석에 앉아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읽던 오스먼드가 그의 시종인 보리언의 이름을 불렀다. 그를 들은 보리언은 오스먼드의 오른쪽에 있는 의자를 내게 빼 주곤 에멜슨 공자와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갔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자리에 앉아 오스먼드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볼 뿐이었다. 잠시 후,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보리언이 오스먼드와 내 몫의 식사를 테이블 위에 늘어놨다.
“전부 확인했습니다.”
“그래, 나가 봐.”
어떤 확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보며 말하는 것을 보니 아마 못 먹는 음식을 확인했거나, 독의 유무를 확인한다거나 그런 거 아닐까?
보리언은 나가 보라는 오스먼드의 명령에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먹게.”
보리언이 나간 뒤, 오스먼드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자신의 앞에 놓인 고깃덩이를 잘랐다. 나이프를 쥔 손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얇은 금색 실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저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