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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77화 (77/227)

77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12)

마음 한구석에 작은 심연이 피어올랐다. 성녀를 죽이면 내가 가게 될 일도 없이 해결되는 거잖아. 성녀가 프레오나로 오지 않는 게 걱정이라면 차라리….

“아.”

아니야, 이건 아니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를 다치게 해선 안 된다. 내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젠을 위험하게 만들었는데. 잘못된 선택은 한 번이면 족해.

“세네카에 가게 된다면 이야기 정도는 해 보겠습니다.”

소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은 채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오스먼드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듯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프레오나에 득이 되지 못한다면 세네카에 득이 돼서도 안 되는 법이지.”

아까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음침하게 빛나는 눈이 불편했다.

“전 성녀를 움직일 만한 명예도 권력도 없습니다.”

“그건 문제없어. 그대는 성녀와 대화를 나누면 돼.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알겠습니다. 뒷이야기는 황궁에 가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성녀도 생각하는 바가 있을 테니 행선지를 바로 정하진 않을 겁니다.”

아마도. 설마 하는 거지만 필릭스가 좋아 죽어 세네카에 있겠다 하면 세네카의 힘이 되는 걸 테니까. 그냥 교황청으로 가 버리면 안 되나.

단호한 오스먼드를 향해 지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에 이야기하자는 기색을 보이자 오스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 그래도 마지막 궁금증은 풀어야지.

“끼고 계신 반지가 무엇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아, 이거.”

오스먼드는 손에 감긴 실처럼 얇은 반지를 빼내어 내게 넘겼다. 넘겨받은 것을 살피니 이건 반지가 아니라….

“실…?”

방금까지 그의 손에 감겨 있던 얇은 반지는 그의 손을 떠나자 한 가닥의 실이 되었다.

“예부터 황궁을 벗어날 때 몸에 지녀야 한다고 전해 내려온 거라 무엇인지 확실하진 않아. 그대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런 거라면 보통 실은 아닐 테고, 매끈한 느낌이 우리 노반 털이랑 비슷한데….

“아뇨, 모르는 물건입니다. 그저 호기심에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금빛의 실이 오스먼드의 손으로 돌아가자 있어야 할 곳을 찾은 듯 그의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겼다. 신기하네.

그의 손에 감긴 반지를 빤히 쳐다보다 오스먼드의 헛기침에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

“하실 말씀은 끝나셨습니까?”

“그래. 내일은 해가 뜨기 전에 나가야 하니 체력을 허투루 쓰지 말게.”

그리 말한 오스먼드는 내게서 시선을 떼곤 나가 보라며 손을 털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스먼드를 향해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식당을 나섰다.

체력을 허투루 쓰다니…. 아직 그럴 단계도 못 갔다, 이놈아. 키스는커녕 뽀뽀도 못 했고 가장 진하게 나간 스킨십이 가넷의 위에서 허리를 잡힌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 야릇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런 기분만 들었을 뿐이지 진지한 감정의 교류 같은 건 아니었다. 오스먼드의 쓸데없는 오지랖 때문에 조금 많이 언짢아졌다.

식당 안과는 다르게 바깥의 공기는 상쾌했다. 방으로 안내해 주겠다는 시종을 거절한 뒤 저택의 모든 시종들이 쪼르르 대기하고 있던 곳을 지나고서야 숨이 좀 쉬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멈춰 서 굳어 있는 목을 좌우로 꺾어 가며 스트레칭을 하자 멀리 창문틀 위에 앉아 있는 젠이 보였다.

“젠! 나 기다리고 있었어?”

젠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앉아 있던 창틀에서 내려와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활짝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다가갔다. 젠은 내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네요.”

“응, 음식 맛도 없고, 할 이야기도 없어서. 언제 왔어?”

“노반을 재우고 나와서 얼마 안 됐어요.”

노반이 잔다고?

“벌써? 많이 피곤했나?”

“미르 님을 지켜야 한다고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에요. 따뜻한 우유를 먹기도 했고요.”

그랬구나. 어쩐지 이곳으로 오는 내내 노반의 털이 쭈뼛 서 있더라니. 편하게 여행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했는데… 이거 좀 미안해지네.

“아, 에멀슨 공자가 마차를 준비해 준대. 내일은 따로 탈 수 있을 거야.”

“다행이네요.”

젠은 내 발걸음에 맞춰 자신의 발을 옮겼다. 그에 조금 놀려 주고 싶어 거북이처럼 천천히 걷자 그도 내 속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내게 전부 맞춰 주는 그를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와 푸흐흐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에 젠도 발을 멈추곤 나와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밤은 달도 아름다우니 저와 산책 어떠신가요?”

젠이 등진 창문 너머로 환하게 빛나는 하얀 보름달이 달무리를 이루며 떠 있었다.

“좋아.”

“밖은 쌀쌀할 테니 모포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안 추워.”

이대로 가자는 내 말에 젠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포가 필요할 거라며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세웠다. 시종은 젠의 명령에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모포라기보단 이불로 보이는 두툼한 것을 가지고 나왔다.

“이 정도면 따뜻하겠군요.”

거기선 모포를 똑바로 가져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소리 없는 의문에도 젠은 시종에게 건네받은 두툼한 이불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밖을 향해 걸었다. 아마 만족하는 것 같다.

문을 지키고 있는 시종의 인사를 받으며 젠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가넷을 타고 가려나 생각했지만, 우리는 마구간에 가지 않고 환한 보름달을 따라 서쪽을 향해 걸었다.

“가까운 곳에 호수가 있대요.”

“호수?”

되묻는 내게 고개를 끄덕인 젠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이불을 한번 접어서 내게 둘러 줬다.

“호수 근처는 추울 거예요. 감기라도 들면 큰일이니까 무거워도 두르고 계세요.”

“응, 알았어.”

젠은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게 자신의 어릴 때 이야기를 해 줬다. 어렸을 때의 젠은 집에 있기보다는 항상 멀리 나가서 마물 사냥을 했었는데, 하루는 백작부인인 어머니에게 잡혀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젠을 가르치러 온 교사는 프레오나 수도에서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어떤 남작 가문의 부인이었는데 말주변이 없는 젠을 그렇게 구박했단다.

“그때도 에멀슨 공자와 비교를 당했었어요. 알고 보니 웬만한 귀족 자제의 수업은 그 부인이 맡아서 했었대요.”

“그랬구나…. 난 아카데미 같은 곳이 있나 했었는데 전부 집에서 수업했구나? 지루했겠네.”

“몇십 년 전에는 있었대요.”

“정말? 근데 왜 지금은 없어?”

“평민 차별 문제, 교사의 횡령 등등 그 외 여러 가지가 문제가 돼서 사라졌다고 알고 있어요.”

어딜 가나 사회적 문제는 똑같구나.

“궁금하지 않아? 내가 살던 곳에는 아카데미… 그러니까 학교라는 곳이 있었는데, 난 병원 신세 지기 전까지는 친구들도 많았고 재밌게 놀았었어.”

“…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 하지만, 미르 님과 함께라면 재밌었을 거예요.”

스트라이크로 들어온 플러팅에 잘 걷고 있던 다리가 돌처럼 굳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곤 빠른 걸음으로 쭉 걷자 젠은 작게 웃으며 내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근데 난 경보로 걷는데 왜 젠은 여유 있게 걷는 거지?

“거의 다 왔어요.”

젠과 내 다리 길이의 차이를 생각하며 빠르게 걸었더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젠이 말한 호수는 파동 하나 없이 고요했고, 까만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보름달을 담고 있었다.

“달이 두 개가 떴네.”

“그러네요.”

잔디가 무성하게 난 평원에서 호수를 보고 있자니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보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잔디 위에 대자로 누웠다. 이불에 풀물이 들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걸.

그런 나를 지켜보던 젠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다리를 굽혀 앉고선 내가 두르고 있던 이불을 꼼꼼히 여며 줬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까만 밤하늘 가운데 환한 달 하나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별이 없네. 있었다면 더 예뻤을 텐데.”

이불의 포근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있잖아….”

생각한 걸 입 밖으로 꺼내기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곧바로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듣고 있어요.”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좋을 수 있다니. 그 다정함에 마음이 잠시 풀어졌다.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가고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조금 버겁다. 무거운 짐을 지고 싶지 않다.

“우리 이대로 도망갈까?”

막장의 끝을 달리는 아침 드라마 주인공처럼 처량하게 말했다. 옆에 앉아 있는 젠은 내 말을 들었음에도 침묵을 지켰다.

“장난이야.”

장난이라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 그냥 해 본 소리야. 벌려 놓은 게 꽤 많은데 이제 와서 어떻게 사라지겠어. 힘들어 도망치려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럼 볼모가 무서워 도망간 4황자랑 다를 게 뭐야.

한국에서의 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된 건지. 치졸한 생각이 민망해 손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가요.”

돌연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눈을 가리고 있는 내 손을 조심히 떼어 냈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든 따라갈게요.”

그는 떼어 낸 내 손을 꽉 잡아 줬다. 손을 타고 넘어오는 온기가 따스했다. 그 온기에 울컥하고 가슴이 울렸다. 난 이 사람한테 사랑받고 있구나.

“나중에… 나중에 내가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말해 줘.”

“지치기 전에, 제가 도와줄 수 있게 말해 주세요.”

그래, 그럴게. 차분해져 있는 그의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흰 구름이 서서히 몰려와 보름달을 감쌌다. 달이 구름 뒤로 숨자 호숫가는 어둑해졌다. 이제 슬슬 돌아가려 잡은 손을 놓고 일어나려 했지만, 내 손을 아직 놓아 주지 않은 그가 단호하게 이어 말했다.

“아직 제게 못 한 말이 있으시잖아요.”

“….”

“숨기지 말고 전부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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