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다 (13)
숨기지 말라니….
“응?”
“지금 힘드시잖아요.”
단호한 어투였다. 내가 힘들어하는 이유를 듣기 전에는 못 간다는 듯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중에 말해 주겠다 하곤 입을 다물었지만, 젠은 개의치 않는 듯 말해 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을 셈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젠이 원하는 대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이것저것 겹쳐서 그래.”
내가 곧 죽을 거라는 돌팔이 성녀의 예언, 말을 섞기만 해도 짜증이 나는 오스먼드와의 신경전, 본인에게 용서를 받았다지만 젠에게 했던 짓이 주홍 글씨가 되어 내 발목을 잡는 것 같다.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헬조선에선 멀쩡했던 인성이 이곳에 오고 나서 어째서 고물처럼 망가졌는지 자꾸만 못된 생각을 하는 내 모습에 머리가 아프다. 노반에게 나쁜 기억을 심어 준 그 젠장할 놈도 족쳐야 하고, 마린이 괜한 걱정 하지 않게 하고 싶다. 그런 얘기들을 말투가 뭉개질 정도의 속사포로 쏟아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다.
“이게 전부야.”
감정이 격해진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자, 젠은 날 진정시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잘하셨어요.”
“잘했다니, 너한테 투정 부린 거나 다름없는데….”
“전보다 나아졌나요?”
아까보다 나아졌냐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쏟아내서 그런가, 기분이 한결 편해졌다.
“그럼 됐어요. 투정 같은 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어요.”
다정하게 나를 달랜 젠은 누워 있던 내 몸을 일으켜 호숫가를 보게 했다. 구름에 달이 가려져 어두운 호숫가에 한 마리의 반딧불이가 찾아왔다. 그 반딧불이는 호수 위를 비행하며 연녹색의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성녀의 이야기는 에반스터 경한테 들었었어요.”
“뭐…? 그거 기밀 아니었어?”
“자세한 예언까지는 못 들었지만, 미르 님의 안전에 유의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상황은 알고 있었어요.”
그렇겠지. 안전에 유의해 달라는 부탁은 내가 위험해진다는 이야기니까.
“알고 있다고 왜 말 안 했어?”
“괜찮다고 억지 부리시면서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실까 봐서요.”
날 정말 잘 알고 있구나. 젠의 말대로다. 그 성녀는 돌팔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보다 네가 더 위험한 곳에 가는데 네 안전에 더 신경 쓰라고, 그렇게 억지 부리며 거절했을 거다.
난 그의 놀라운 선견지명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나를 본 젠이 작게 웃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싫다 하셔도 전 미르 님을 지킬 거예요.”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그의 말투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오나에겐 그저 순응한 척 따르는 편이 좋아요.”
“왜?”
“프레오나의 피를 이은 자들은 아랫사람이 같은 선상으로 올라오는 걸 재밌어하며 관찰하죠. 그러고선 흥미가 떨어지면 비참하게 버려요. 웬만하면 엮이지 않는 게 좋을뿐더러 엮였다면 가능한 빨리 벗어나야 해요.”
그것도 맞다. 오스먼드는 내 맹랑하고 발칙한 행동들에 흥미를 보인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해 거래의 흐름을 바꿨었다. 이전까지는 날 해칠 수 없을 테니 그저 쪼다라 생각했는데, 그놈이 나 죽고 너 죽고를 배워 버렸다. 진하게 엮이기 전에 벗어나야 했다.
“그건 늦은 거 같아.”
“아직 안 늦었어요.”
젠이 앞으로 오스먼드의 흥미를 끌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며 아까와 같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녁으로 단호박 먹었어? 오늘 엄청 단호하네.”
“네, 애피타이저로 나왔어요.”
“진짜로?”
“농담이에요.”
깜짝이야. 젠이 농담을 하다니, 그건 그거대로 신기했다.
“아무튼, 노반과 관련된 일은 저도 같이 찾아볼게요. 마린은 미르 님이 얌전히 계시면 걱정하지 않을 거예요.”
“응, 그렇지….”
“그리고 제 일은 미안해하지 마세요. 제가 원해서 따라온 거니까요.”
젠은 북쪽으로 밀려나기 전, 오스먼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줬다. 나를 죽이고 오스먼드의 편에 설 것인가. 내가 세운 계획을 따라 타루스를 죽이라는 제안에 젠은 나를 선택했다. 오스먼드가 해 준 이야기다. 젠은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다 버리고 날 선택했다고.
“그래도 내가 네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면 선택할 일도 없었을 거야.”
“그랬다면 저와 미르 님은 이렇게까지 가까워지지 못했을 거예요.”
괜찮다고 타이르는 그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젠은 어쩜 저렇게 마음이 넓은지, 나였다면 괘씸해서라도 하루 종일 못살게 굴었을 거다.
“마지막 사과 받아 드릴게요.”
“마지막 사과?”
“네, 딱 오늘까지만 미안해하기로. 내일부터는 미안해하시면 혼날 거예요.”
젠은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싼 뒤 마치 만두를 만지듯 주물렀다. 덕분에 씁쓸했던 표정이 단숨에 못생기게 변했다.
“약속하셨어요.”
“이궤 약숵. 읏!”
점점 더 강하게 주무르자 내 얼굴이 만두에서 바짝 눌러진 호떡이 되었다.
“고개 끄덕여 주세요.”
난 젠의 손이 떨어질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의사를 확인한 젠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젠에게 일으켜 달라는 뜻에서 손을 내밀자 젠은 날 일으켜 주는 대신 내민 손을 그저 다정하게 잡아 줬다.
“호수에 별들이 찾아왔어요.”
별들이 찾아왔다는 그의 말에 호수를 바라봤다. 안개 낀 호수에는 반짝이는 반딧불이가 셀 수 없을 만큼 가득 모여 연녹색의 빛을 내며 부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호수에 뜬 별이었다.
“진짜네…. 호수에 별이 떴어.”
“별이 보고 싶으시다 해서 왔나 봐요.”
아까 전 내가 스쳐 가듯 별이 보고 싶다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것에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방금까지 씁쓸하고 울적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올라가는 입꼬리가 주체되지 않았다. 가능한 힘껏 입꼬리를 진정시키고 얌전하게 싱긋 웃자 그도 나를 보며 웃었다.
쟤는 웃는 것도 진짜 잘생겼네.
“네가 게이라 다행이야.”
“네?”
“아니야.”
젠이 게이가 아니었다면 진작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와 혼인을 했을 거다. 젠이 게이인 건 천만다행이었다.
“게이가 뭔가요?”
젠의 물음에 잠시 정신에 버퍼링이 왔다. 궁금하다는 젠의 표정에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아니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건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처럼 잘생긴 사람.”
“그런가요?”
“응, 잘생긴 사람을 게이라고 해.”
어차피 나만 아는 단어인데 이상하게 알려 줘도 상관없겠지.
젠은 잡고 있던 내 손을 놓고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날 일으켜 줬다. 그러고선 다시 이불을 꽁꽁 감싸 줬다.
호수 위에 부유하는 반딧불이를 기억 속에 저장하고 저택을 향해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걷던 젠이 갑작스레 이상한 질문을 했다.
“미르 님한텐 저보다 세르비스가 더 게이인가요?”
세르비스가 더 게이라니? 아니, 게이가 아니라 젠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라니? 그게 말이 돼?
“무슨 소리야! 난 너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세르비스가 말해 줬어요, 미르 님이 저보다 세르비스가 더 잘생겼다 하셨다고.”
“내가 언…! 아, 그거.”
셀비스 녀석, 젠한테 그걸 언제 말했대.
“내가 전에 한번 말했었지, 미네르바가 정보 가지고 협박했었다고?”
“네.”
“그때 협박했던 내용이 너보다 자기 손자가 더 잘생겼다고 인정하라는 거였어.”
그 말에 젠은 어이가 없는지 피식 소리가 나게 웃었다.
“너도 어이없지? 근데 그 할망구는 진심이었어. 워낙 강고해서 인정 안 하면 정보 안 준다고 하길래 이프리트보다 셀비스가 더 잘생겼다~ 했지. 너네 가문에서 한 명 정도는 셀비스보다 못생긴 사람이 있길 바라면서.”
“하하하.”
뭐가 웃긴 건지 젠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웃겨?
“역시 영리하시네요. 아, 그러고 보니 저희 가문에선 한나가 가장 못생겼어요. 태어났을 때 망아지가 나왔다면서 웃음거리가 됐었는데.”
“누구…?”
한나가 뭐? 망아지? 장난쳐?
“한나 아프리트요.”
“아니, 한나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희 집은 눈이 정말 높구나. 하긴 높은 곳에서 자라면 그렇게 될 만도 하지….
“되게 자괴감 든다. 내가 살던 곳에선 너희 같은 외모는 신처럼 받들어. 망아지는 무슨, 난 처음 한나 봤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알았는데.”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나 하는 말이야.”
“그런가요?”
“어!”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멀리 저택이 보이자 몸을 감싸던 이불을 젠에게 넘겼다. 내가 그래도 황자인데 꼴사납게 이불을 두른 채 시종을 볼 수는… 개뿔! 겁나 추워!
“뭐야? 여기 왜 이렇게 추워?”
“슬슬 겨울이 오고 있으니까요. 밤에는 추워요.”
급격하게 덮쳐 오는 추위에 팔로 몸을 감싸자 젠은 넘겨받은 이불을 다시 내게 둘러 줬다. 입김이 나올 날씨는 아니지만 방금까지 따뜻하게 있어서 그런지 추위가 더욱 잘 느껴졌다.
“너는 안 추워? 괜찮아?”
“네, 저는 괜찮아요.”
이불 한쪽을 펼친 뒤 젠에게 같이 덮자 제안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와, 이렇게 추울 줄 몰랐어. 이불 안 가져왔으면 내일 감기 걸렸겠다.”
“다행이에요.”
“응.”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이 가까이 보였다. 저녁에 보니 더 무섭다. 평범한 저택이 아니라 대저택 같다. 천둥이 치고 뱀파이어가 나타나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였다.
이불을 꼭 싸매고 저택으로 들어가자 현관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정중하게 각진 인사를 했다. 그에 나와 젠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의 공기는 밖과 달리 따듯했기에 꽁꽁 싸맨 이불을 벗어 지나가던 시종에게 넘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노반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끼잉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