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
에멀슨 공자가 준비해 준 마차는 오스먼드가 타는 마차에 버금갈 정도로 큰 마차였다.
“지금 구할 수 있는 마차 중 가장 좋은 마차입니다.”
“그래, 고맙네.”
그래, 고마운데 너무 크다. 달리면서 덜그럭거릴 것 같은데. 엉덩이 아플 것 같다.
우리는 먼저 나와서 마차를 정돈하며 오스먼드를 기다렸고, 짐 정리를 다 했을 때쯤 나온 오스먼드에게 아침 인사를 한 뒤 마차에 탑승했다.
마린은 마부석에 앉았고, 나는 노반을 안아서 들어가려 했는데 노반은 경이로운 점프력으로 내 도움 없이 혼자서 마차에 올라탔다. 이제 아빠는 필요 없는 거니?
서운한 마음을 감추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탈 마차는 오스먼드의 마차 같은 침대는 없지만 의자로 위장한 큰 소파가 양쪽에 달려 있었다. 의자를 감싸고 있는 붉은색 벨벳 쿠션이 포인트다. 덜그럭거려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빵빵하게 솜이 채워져 있었다.
맞은편 소파에 올라탄 노반이 신나서 콩콩 뛰었고, 그 귀여움에 나는 참지 못하고 영상 구슬을 꺼내 들었다.
“잘한다, 잘한다!”
“낑!”
이건 정말 지칠 때 봐야지. 우울증이든 뭐든 전부 한 방에 해결이다. 하, 아니다.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봐. 세네카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마법사 놈들, 이걸 일회용으로 만들어? 백날을 밤새워서라도 영구적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낑…?”
내가 노반의 귀여움에 심취해 있을 때, 노반이 문 쪽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례할게요.”
황금색 쿠션을 손에 든 젠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마차를 끄는 말이 부족해 가넷을 달았어요.”
그 말인즉, 달릴 말이 없는 젠과 같은 마차를 타야 한다는 거다.
“가넷? 걔가 마차를 끈다고? 그 성격에?”
그 성질 더러운 말이 다른 말들과 합심해서 마차를 끌 거라고? 믿을 수가 없다. 잘은 모르지만 마차 끄는 말과 달리는 말은 다르지 않나? 무슨 품종이랑 그런 것도 나뉜다고 알고 있는데….
“잘할 거예요.”
퍽이나.
마차에 뚫려 있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앞을 살폈다. 우리 마차엔 다섯 마리의 말이 달려 있었는데 갈색 말 네 마리가 뒤에 있었고, 흑색의 가넷은 색색의 꽃목걸이를 두르고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저 꽃목걸이 젠이 걸어 준 거야?”
“네, 가넷은 혼자 돋보이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보이네….
“낑!”
어느새 내 무릎 위로 올라온 노반이 자신도 보고 싶다며 창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노반 것도 있어요.”
맞은편에 앉은 젠이 황금색 쿠션 뒤에 숨겨져 있던 작은 화관을 노반에게 씌워 줬다. 화관은 여우를 위해 만들어진 듯 노반의 머리에 딱 들어맞았다. 푸른빛이 도는 하얀 털 위에 붉은색의 꽃이 피어났다. 이건 찍어야 해.
“옳지! 우리 노반 이쁘다! 아구 이뻐! 여기 봐봐!”
“컁!”
새로운 영상 구슬을 꺼내 들고 예쁜 표정을 짓는 노반을 찍었다. 어우, 연예인 해도 되겠어.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
총총총 뛰던 노반이 어느새 젠의 무릎 위로 올라가고, 영상 구슬이 젠의 얼굴을 비췄다. 젠은 의자에 기대 앉아 나와 노반을 바라보며 따듯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대박, 엄청 좋은 거 건졌다.
“황자님, 출발하겠습니다.”
마차의 앞에서 출발하겠다는 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잠깐.
“마린! 마린도 들어와!”
“네?”
“명령이야! 마린도 마차로 들어와!”
황자를 모시는 시녀가 황자와 같은 마차를 타느니 뭐니 그런 소리가 나오겠지만, 상관없다. 황자의 여우를 돌보는 시녀라고 하면 되지. 젠도 들어왔는데 마린이 못 들어오면 서운하잖아.
곧바로 마차 문이 열리고 마린이 들어왔다. 마린은 내 대각선인 젠의 옆에 앉았다. 마린이 들어오자 노반은 젠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와 마린의 품으로 옮겼다.
“제가 들어와도 될까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조금 걱정입니다.”
“괜찮아. 마차도 넓고, 밖에 있으면 춥잖아. 어제도 들어오라고 할걸 그랬어.”
마린은 작게 웃으며 노반이 쓰고 있는 화관을 피해 노반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출발한다는 마부의 신호에 마차 바퀴가 움직이고, 나는 젠이 건네준 황금색의 쿠션을 껴안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쾌청했다.
“거기 가면 뭐 하지….”
“낑!”
“응, 노반이랑 많이많이 놀아야지. 노반, 불편하지? 인간으로 변해도 돼.”
그에 노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옆으로 건너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여기로 올라와도 돼.”
무릎 위에 올려놓은 황금색 쿠션을 치운 뒤 이곳으로 올라오라며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우리의 귀여운 노반은 괜찮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반, 나 서운해지려 해….”
“낑!”
“인간으로 변하든가, 올라오든가 둘 중 하나만 해 줘.”
노반은 나와 젠 그리고 마린을 보며 눈치를 봤다. 어차피 이 마차 안으로 들어올 사람도 없고, 사람이 가까이 온다면 젠이 알아채고 눈치를 줄 것이다. 노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젠이 노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송곳니를 드러내 씨익 웃은 노반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머리가 커지자 작아 보이는 화관에 노반은 시무룩해졌다.
“이거 작아졌어….”
“나갈 때 쓰면 돼.”
난 시무룩해진 노반을 달랬다. 금세 기운을 차린 노반이 화관을 잡고 젠을 향해 물었다.
“이거 젠 네가 만든 거야?”
“네, 마음에 드나요?”
“그냥 조금.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 줘, 나중에 미르한테 만들어 줄래.”
노반은 완전히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긴 싫은지 젠에게 틱틱댔다. 그러자 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황궁 가서 할 게 하나 생겼네. 거긴 꽃도 많이 피어 있으니까 화관, 꽃팔찌, 꽃목걸이 등등 만들 건 많겠다.
“아, 이번에 가면 별궁의 지하를 찾아봐야겠어. 보물이 있다잖아. 트레저 헌터 하면 되겠다.”
“트레저 헌터?”
“응, 보물 사냥꾼. 노반도 같이 찾아볼까?”
“난 보물에 관심 없어.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잖아.”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건 아니고, 적당히 있으면 편해.”
괜히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칠라. 욕심이 없는 건 좋지만 너무 없이 사는 건 안 되지.
“그런 거야?”
“응, 항상 적당히는 있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마음 같아선 평생 일하지 않고도 편하게 살 만큼 벌어 주고 싶지만, 일하지 않은 자 먹지 말라고 돈은 벌어 봐야 가치를 알고 지혜롭게 쓸 수 있다. 게다가 노반은 인간의 수명을 훌쩍 넘어 오래 사니까 드레곤 레어 정도는 털어 줘야 남은 생 풍족하게 살 거다.
네가 행복하다면 드레곤 레어쯤이야 털도록 노력해 볼게. 레어를 못 털면 드레곤을 털면 되지. 힘으로든 말발로든 어떻게 해서든 털어 볼게. 미래의 나 파이팅.
아무도 모를 무모한 생각을 하며 씨익 웃자 귀여운 노반이 나와 같이 방긋 웃어 줬다.
* * *
황궁까지는 금방이었다. 황제 전용 지름길로 왔더니 간간이 쉬었음에도 빠르게 도착했다.
오는 길은 평화로웠다. 오스먼드가 쓸데없는 일로 불러내지도 않았고, 낯선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저 평화롭게 아무 일 없이 잘 도착했다.
“두 번씩이나 이 거지같은 성에 버려지다니.”
해적에 관한 유명한 영화 중 한 장면의 대사가 절로 나왔다.
“아, 모터 주둥이 온다.”
“낑?”
화관을 올린 노반이 마린에게 안긴 채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쉬지도 않고 말하는 놈이야. 노반, 오늘부터 쟤가 너의 시종이야. 시킬 거 있음 막 시켜, 알았지?”
“컁!”
노반의 경쾌한 응답이 들리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텟이 90도로 인사한 뒤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못 본 새에 머리를 어깨까지 길렀다. 안 어울리게 뭐야, 저게.
“황자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랜만이군.”
“이렇게 다시 뵈니 정말 좋습니다! 황자님이 계시는 동안 성심성의껏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어째 머리카락을 기른 만큼 방정도 는 것 같다. 말이 많은 것도 그렇고, 목소리도 올라간 게 더 시끄럽게 들린다.
“예! 그럼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에 내가 쓰던 방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 방이 이 로테 별궁에서 조경이 가장 아름다운 방입니다.”
“그래, 위치는 알고 있으니 굳이 안내해 줄 필요 없네. 아, 이프리트 경의 짐도 내 방으로 옮겨 두게.”
“예, 알겠습…. 예…?”
텟이 무언가 잘못 들은 듯 되물었다. 이 쉐키가 감히 황자의 말을 되물어? 너 이놈 시키 내가 오스먼드였어도 되물었을 거냐?
“어허! 어딜 버릇없게 황자님의 말씀을 되묻는 것인가!”
내 뒤에 서 있던 마린이 텟을 엄하게 꾸짖었다. 난 마린이 뿜어내는 기백에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마린을 바라봤다. 마린,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저희 황자님께서 마음이 넓으시니 이번만은 봐주겠지만, 다음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예, 옙! 알겠습니다!”
텟은 마린을 이상하게 쳐다보면서도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마린은 겉으로는 참 순한 사람인데 텟한테 왜 그러지…? 아, 물론 텟의 무한 오스먼드 찬양은 꼴 보기 싫지만….
“이프리트 경의 짐도 황자님의 방에 옮겨 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우는 앞으로 당신이 황자님을 모시듯 모셔야 하는 귀한 존재이니 특별히 신경 써 주셔야 합니다.”
“예, 예….”
텟도 본래의 마린 성격을 알고 있는지라, 자신이 알고 있는 마린과 180도 다른 그녀가 당황스러웠는지 1초에 백 번씩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이프리트 경은 별궁을 둘러볼 테니 점심 전까지 깨끗이 정리해 주게.”
“네, 황자님.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예! 다녀오십시오, 황자님!”
싱긋 웃은 마린이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눈치를 보던 텟도 고개를 숙였다.
아, 가기 전에 꽤 신나 보이는 마린이 모터 주둥이 텟을 잘 갈굴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
“우리 노반이 오는 길에 먹은 게 없어 배고플 테니 최상급 음식을 준비해 주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마린이 알려 줄 거야. 아, 그리고 우리 애가 졸리다 하면 푹신한 곳에서 곱게 재우게. 음악은 거창할 거 없이 새소리면 충분하겠군. 이것도 모르겠으면 마린이 알려 줄 거야.”
“예, 예!”
“마린이 말했다시피 그 아이를 대할 때는 나를 대한다 생각하게. 절대 스트레스 주지 말고, 알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쩌렁쩌렁한 텟의 목소리가 별궁 주변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