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2)
젠과 함께 둘러본 로테 별궁은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망가진 곳 없이 아름다운 외관과 별궁을 둘러싼 정원도 그대로였고, 스치듯 지나가는 시종들의 얼굴도 익숙했다.
한길로 뚫려 있는 정원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프레오나 황궁 도서관이, 반대쪽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있는 에테궁이 나온다. 생각만 해도 짜증 나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레이와 한나와의 시간은 즐거웠다.
“그때가 제일 재밌었어, 한나랑 레이랑 얘기했을 때. 그전까지는 타루스한테 쫓기고 오스먼드의 눈치만 봤었거든.”
“한나가요? 걔가 그럴 애가 아닐 텐데….”
젠이 자신의 동생을 부정했다. 평소 밖으로 나돌았다면서 꽤 동생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응, 재밌는 건 레이가 재밌었어. 한나는 똘똘한 게 보였었고.”
내가 그의 부정에 동조하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던 곳과 다르게 이곳의 남매들은 사이가 좋은 것 같다. 한국은 ‘오빠를 팝니다’, ‘호적메이트’, ‘우리 엄마 딸’처럼 남보다도 못한 느낌인데, 이곳은 참 남매간 우애가 두텁다. 로이랑 클로에도 그렇고, 잘은 모르지만 젠이랑 한나도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보인다.
“정말 백작저로 안 가도 돼?”
“네, 괜찮아요. 기사단을 관리하기에도 이곳이 편하고, 멀리 떨어지는 것보단 미르 님과 함께 있는 게 마음 편하니까요.”
젠은 수도에 도착하면 이프리트 백작저로 가지 않고 로테 별궁에 나와 함께 있어 주겠다고 했었다. 그곳엔 그동안 못 봤을 한나도 있을 테고, 급히 떠난 바람에 놓고 간 것도 꽤 많을 텐데. 그것과 별개로 생활을 하기엔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 편할 테지만, 젠은 상관없다며 내가 있는 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난 은연중에 젠이 내 곁에 남을 거란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백작저로 돌아간다 했으면 속상했을걸.
“그래도 한 번은 들러야 하지 않을까? 한나도 만나 봐야 할 거고, 할 것도 많은 것 같은데.”
“….”
“왜 그래?”
“미르 님은 절 원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뭐…?”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제가 떠나길 바라시는 것 같아요.”
젠이 조금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 뭐야, 귀여워.
“아니, 그게 아니라….”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제가 미르 님을 떠나 백작저로 가길 바라시나요?”
젠이 별궁 앞 정원의 입구에 멈춰 서서 물었다. 금세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난 서둘러 아니라고 정정했다.
“아니야! 사실 예의상 물어본 거야. 난 네가 여기 있어 줘서 좋아! 네가 간다 했으면 분명 서운했을 거고.”
“그것도 예의상 하는 말씀 아닌가요?”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는 보석 다 걸 수 있어! 믿어 줘.”
“정말 제가 미르 님의 옆에 있어도 되나요? 제가 하는 게 뭐 있다고요.”
“당연하지! 제발 있어 줘! 내가 너를 얼마나 원하는데! 네가 없으면 밤에 무서워서 잠도 못 잘 거고, 밥 먹을 때도 덜 맛있을 거고, 숨 쉴 때도 어색할 거고, 하루하루가 심심할 거야.”
열정적으로 젠이 필요한 이유를 대자 젠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 말을 미르 님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어요. 들으니까 좋네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번부터 말장난도 치고 은근 장난꾸러기다. 사람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으로 가면 성격도 바뀐다고, 북쪽으로 오면서 젠의 성격도 장난꾸러기로 바뀐 것 같다. 나한테만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참 사람 심장 떨리게 한다.
“네가 잘생겨서 다행인 줄 알아. 아니었으면 처맞았어.”
외모지상주의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젠이 저런 고혹적인 외모가 아니었다면 뭐 같은 게 추파를 던진다며 당장에라도 곤장을 대령했을 거다. 잘생겼으니 잘 풀리는 거지.
“그런가요? 제가 게이라서 다행이네요.”
“푸흡!”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척 정원을 걷자 처음 정원에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누굴 만났었던 것 같은데. 분명 여기쯤이었지.
“여기 피어 있던 꽃이 뭔 줄 알아?”
내가 로테 별궁으로 막 왔을 때 여름내 이곳엔 하늘색의 수술을 둘러싼 여덟 장의 노란 꽃잎이 달린 수수한 꽃이 피었었다.
“그저 수수하기만 한 꽃이었는데, 내 눈에는 정말 예뻤었어.”
“그런가요?”
“응, 이름이 제노아스래. 나도 누가 알려 준 거야.”
타루스를 피해 도망치던 날, 정원에서 만난 남자가 있다. 얼굴은 못 보고 목소리만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잘생김이 보이던 친구였지.
“목소리가 엄청 좋은 남자였는데, 그때 내가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못 듣고 가는 바람에 누군지 몰라. 그때 이름을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찾으시려고요?”
“아니. 고맙긴 한데, 그 남자를 찾아도 해 줄 게 없어. 아, 보석 몇 개 정도는 줄 수 있다. 전에 필릭스한테 뜯어낸 게 좀 있어서. 나 보석 부자야.”
히히. 실없이 웃었다. 그에 나를 마주 본 젠이 피식하고 가볍게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전 보라색 보석이 좋아요.”
“보라색? 너 뭘 좀 아는구나. 보라색이 제일 비싸. 투명색이 가장 싸고,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순으로 마력이 커져….”
응? 잠깐…. 설마. 에이, 설마.
“아니지?”
네가 그 남자냐는 의미가 함축된 질문에 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진짜 그 남자가 젠이야? 진짜로?
“운명입니다.”
“응…?”
“이 꽃의 꽃말이요. 그때 물으셨잖아요.”
의심은 확신이 됐다. 그 남자에게 제노아스의 꽃말을 알고 있냐 물었지만 타루스 때문에 듣지 못한 채 떠났었다. 아귀가 들어맞는 상황에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그에 젠이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꽃말이 저희와 비슷하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운명이다.
“왜 말 안 했어?”
“딱 한 번 말했었어요.”
“언제?”
언제냐는 질문에, 알아서 생각해 보라는 건지 젠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언제였지? 딱히 생각나는 날이 없…. 아, 오스먼드 앞에서 자해 공갈을 한 뒤 젠에게 혼날 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무모한 짓 하지 말라는 말 뒤에, ‘갚으신다던 은혜도 아직 갚지 않으셨구요.’라고. 그 은혜가 이 은혜였다니.
“아.”
“기억나셨나요?”
“응, 기억났어. 그건 말해 준 게 아니라 힌트만 준 거였네.”
“전 말했었어요. 기억하지 못하신 미르 님이 나빠요.”
그렇지…. 내가 나빴지. 은혜 갚는다 해 놓고 원수로 갚았으니.
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에멀슨 공자의 저택에서 묵었을 때 밤 산책을 했던 그날 저녁의 약속이 있어 사과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나 기억력 좋은 편이야. 널 기억 못 했던 건 아마 얼굴을 못 봐서 그런가 봐. 북쪽에서 네 얼굴 처음 봤을 땐 목소리고 뭐고 아무것도 안 들렸었어.”
실제로 젠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잘생겨서 같은 남자로서 박탈감은커녕 그저 놀랍고 경이로웠었다. 저게 사람 얼굴인가, 책에서만 보던 엘프인가 싶었다. 현실성 없는 외모랄까. 그나마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녀서 다행이지, 올백하고 다니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거다. 본 사람들은 다 쓰러져서.
내가 다시금 젠의 얼굴을 감상하며 넋을 잃자 그는 정신 차리라며 내가 보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왜 가려!”
“너무 쳐다보셔서요.”
“좋은 건 많이 봐야 한단 말이야. 닳는 것도 아닌데 좀 보자.”
“안 돼요. 많이 보면 질리잖아요.”
이 무슨 개미가 로 킥으로 코코넛 깨는 소리지?
“질리다니? 절대 그럴 일 없어. 볼 때마다 짜릿해. 늘 새로워. 네가 최고야.”
젠은 얼굴을 가린 채 푸흐흐 웃었다. 그에 살며시 손을 내렸고, 가려졌던 보물이 드러났다. 난 손을 동그랗게 말아 망원경처럼 눈 위에 가져다 댔다. 이러면 더 잘 보이겠지?
“뭐 하세요?”
“내 마음속에 저장.”
“저장이요?”
“응, 생각나면 꺼내 보게. 나중에 보고 싶으면 어떡해.”
“보고 싶을 때마다 보면 되죠.”
“너 토벌 가면 한동안 못 보잖아.”
계속 생각해 왔던 거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니 느껴지는 기분이 달랐다. 순식간에 시무룩해져 손 망원경을 내리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화가를 부를까요?”
“화가?”
“네, 그림으로 남기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한나한테 물어볼게요. 이프리트 가문과 잘 아는 화가가 있을 거예요.”
젠은 늘어진 나를 살살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여긴 사진이 없으니까 화가를 초대해 그림으로 남기는구나. 여긴 왜 이렇게 없는 게 많아. 대한민국 과학 기술을 따라잡으려면 몇백 년은 걸릴 듯하다.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아무리 대단한 화가가 와도 널 완벽하게 담을 순 없을 거야. 시간 낭비니까 부르지 마.”
사진에도 젠의 미모가 담기지 못할 것 같은데 그림은 오죽하겠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림을 보면 그리움이 더 커질 것 같다. 없는 게 나아.
“제가 필요해서 그래요.”
“응?”
“이어진 게 없으니 그림이라도 가져가야 할 것 같아서요.”
젠이 오른쪽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것을 곧바로 내게 건네줬다.
“회중시계?”
건네받은 것은 은색의 회중시계였다. 이프리트가의 문양을 나무 덩굴이 감고 있는 우아한 모양이었는데 모서리에 달린 작은 이음새가 벌어져 있었다.
“열어 보세요.”
이 회중시계는 안을 열 수 있는 로켓 형태로, 한쪽 면에는 젠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릴 적의 한나로 보이는 어여쁜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고, 반대쪽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그곳에 미르 님을 그리고 싶어요. 허락해 주시겠어요?”
“여기에? 그래도 돼? 중요한 것 같은데.”
뭔가 잘 설명할 순 없지만 가문의 문양도 그려져 있고, 가족적으로도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곳에 나를 그리겠다고? 얼떨떨한 기분에 정말 그래도 되냐 되묻자 젠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는 허락으로 갚아 주세요.”
은혜를 허락으로 갚아 달라는 그의 말에 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