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3)
점심 오찬을 준비했다는 텟의 안내에 따라 로테 별궁의 만찬실을 가장한 식당으로 갔다. 예전에는 내 방에서 혼자 먹었지만 이제는 젠, 노반 그리고 마린까지 다 함께 먹고 싶어서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우리가 북쪽 저택에서 살 때 암묵적으로 정한 룰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다. 밥을 잘 거르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조항이었지만 이제는 가족 약속처럼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서운하다.
“이거 실화냐.”
“네, 현실이에요.”
하나뿐인 상석엔 황자인 내가 앉고, 나의 왼쪽에는 젠, 오른쪽에는 여우인 노반, 그리고 노반의 옆에 마린이 앉았다. 이건 좋았다.
“그 주방장 아직 살아 있구나.”
까드득.
어디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그 소리의 주인공은 마린이었다. 마린은 우리 앞에 놓인 접시의, 육즙이 좔좔 흐르는 돼지 스테이크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눈빛과 함께.
“심각하군요. 전에도 이런 걸 드셨나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비슷해.”
그래, 스테이크는 좋다. 좋은데, 어떤 미친 새끼가 돼지를 핑크빛이 돌게 굽냐. 이건 설익은 정도가 아니다.
“컁!”
육류의 생식이 가능한 노반만이 핑크빛이 도는 돼지 스테이크를 반겼다.
“노반은 먹어. 날것 괜찮지?”
“컁컁!”
먹으라는 신호에 신나게 고기를 물어뜯었다. 인간일 때는 안 된다 했겠지만 지금은 여우니까 상관없겠지. 하지만 우리는 여우가 아니다. 인간이 이런 거 먹었다간 식중독으로 고생하다가 뒤질 수도 있는데 쉽게 넘어갈 수는 없지.
“텟, 주방장을 불러오게.”
“옙…!”
식당 문에 딱 붙어 멍하니 우리를 지켜보던 텟이 내 명령을 듣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주방장 얼굴을 드디어 보겠구나. 그동안은 직접 부르기도 뭐했고, 불러도 내가 서 있는 위치가 낮아 할 말이 없어서 넘어갔지만 지금은 다르지. 너 이 새끼 오늘 뒤졌어.
내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노반에게 넘기고 텟이 데려올 주방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주방장은 어디다 두고 텟 혼자 돌아왔다. 오다 꼴까닥 죽은 게 아니라면 용서하지 않으리.
“주방장을 데려오라 말했을 텐데?”
“그, 그게….”
텟은 우물쭈물 말을 늘이며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에 천천히 기다렸지만 텟은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난 그런 그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말해.”
“그… 바쁘시답니다….”
실화냐. 황자 취급 왜 이래.
당장이라도 달려가 턱주가리를 뽀사 주고 싶었지만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을 긁어모아 참았다. 하지만 젠은 참지 않았다.
“안내하게.”
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껏 가라앉은 표정으로 텟에게 명령했다. 그에 완전히 쫄아 버린 텟이 빌빌거리며 화가 나 있는 젠에게 길을 안내했다.
난 젠의 행동력에 놀라 그 뒤꽁무니를 멍하니 쳐다보다 정신을 퍼뜩 차렸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무서운 표정의 젠을 따라갔다. 이를 갈던 마린도 잔뜩 신이 나서 따라왔다.
“젠! 잠깐만!”
한 발 차이로 주방으로 들어가려는 젠을 막아섰다.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나를 본 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시죠?”
“무작정 들어가지 말고, 잠깐 기다려 봐.”
당장이라도 주방장을 부수려던 젠을 말리자 함께 신이 나 있던 마린도 진정했다.
난 주방 문을 살짝 열어 안을 살폈다. 그 안에는 주방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붉은색 의자에 앉아서 주방 보조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바닥에 무릎을 꿇려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건 뭐지? 혼내는 건가?”
“글쎄요.”
우리는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우리 아버지가 이번에 소피아의 명작을 구하신 거 있지? 근데 실제로 보니까 별거 없더라. 너네도 보고 싶겠지만, 아직 한참 멀었어. 보고 싶으면 나처럼 성공해!”
“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세네카의 황자는 왜 다시 와서는…. 쯧, 한동안 귀찮아지겠어, 그치?”
“예, 예… 그렇죠….”
주방장은 혼자 떠들었고, 가끔씩 주방 보조들의 머리를 손으로 치기도 하며 기분 나쁜 행동을 했다. 주방 보조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주방장의 말을 맞춰 주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땅에 볼모로 왔으면 조용히 사리고 있다 돌아가지, 별것도 아닌 일에 바쁜 랄프 님을 불러내고, 안 그래?”
“예, 예…. 랄프 님의 말이 전부 맞습니다.”
“아, 그 몰락한 이프리트도 함께 왔다면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다곤 하지만, 그 남창이 뭘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겠어! 그러고 보니 세네카의 황자랑 이프리트 사이에 뭐가 있다지? 분명 서로 더럽게 굴렀겠지.”
나와 젠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보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만히 지켜보다가 누르면 반사적으로 멘트가 나오는 곰돌이 인형처럼 동조하는 대답만 하던 주방 보조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세네카의 황자가 웬만한 계집들보다 이쁘게 생겼다고들 하던데. 전에 스치듯 봤는데 사내 새끼였는데도 섰다니까. 살짝 웃는 게 어찌나 야릇하던지, 그 음탕함을 너네도 봤어야 해. 그 황자랑은 한 번쯤 같이 뒹굴어도….”
주방장의 말이 선을 넘었을 때, 날카로운 암기 하나가 주방장을 향해 날아갔다. 마린의 한이 담긴 강력한 암기였다. 하지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주방장은 풀어진 신발 끈을 매려 고개를 숙였고, 암기는 허공을 베며 타일 벽에 박혔다.
“와, 쟤 평생 쓸 운 다 썼네.”
“아뇨… 항상 저랬습니다.”
“응?”
마린의 말을 들어 보면 방금처럼 암기를 쓰든, 트랩을 설치하든, 펄펄 끓는 기름에 물을 끼얹든 주방장의 목숨을 노린 적이 꽤 많이 있었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전부 피해 갔단다. 주방 보조들도 주방장을 견디기 힘든지 빨리 저세상 가라고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린단다.
하지만 그 기도의 주인공은 둔하긴 얼마나 둔한지 벽에 암기가 박혀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대놓고 설치한 트랩은 쥐를 잡는 거라 생각하며 넘기고, 기름이 튀어도 항상 있는 일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단다. 게다가 그런 일을 바로 앞에서 겪었는데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멀쩡하다고….
운이 어마어마하네. 혹시 조상이 지켜 주는 건가? 집안에 덕이 많으면 조상이 지켜 준다는 설을 들은 것 같은데.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그건 그렇고, 이번 토벌대에 내 형님이신 왈도 형님이 선발되셨다. 우리 가문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지는군!”
주방장은 타일에 박힌 암기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지 박혀 있는 그대로 놔둔 채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주방 보조들도 그러려니 모른 척하고 주방장의 조잘거림을 들었다.
“마린, 식당에 가서 그거 그릇째 가져와 줘.”
“네, 황자님.”
마린은 내 부탁으로 스테이크를 가장한 생고기를 가지러 떠났고, 남은 우리는 살짝 열어 뒀던 주방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 누구…! 엇! 황자님!”
조잘조잘 떠들던 주방장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전형적인 ‘허세 허풍 놈’이다. 줄여서 허허놈.
“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지.”
엄한 표정을 지어 주방장을 압박하자 주방장은 꽤 그럴듯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요리에 불을 올리는 데 제가 없으면 안 된다느니, 보조들로는 업무를 이어 갈 수 없다느니 등등 꽤 그럴듯했지만 내겐 통하지 않을 변명이었다.
“음식은 이미 나왔는데, 무슨 음식을 준비한다는 거지?”
“황, 황자님께 올릴 디저트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허세, 허풍을 이어 구라까지.
처음 로테 별궁에서 지냈을 적에 디저트는 전부 마린의 손에서 나온 것만 먹었었다. 그 증거로 조리대 위에는 디저트는커녕 밀가루, 설탕 등등 디저트에 들어갈 재료도 보이지 않았고, 오븐에는 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호오, 무슨 디저트지?”
“지금 만들려고 했습니다! 얇은 핫케이크입니다.”
“핫케이크에 뭐가 들어가는지는 알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 10분 주겠다. 만들어서 내게 직접 가지고 오거라.”
그때 딱 맞춰 온 마린이 들고 온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접시를 받아 들고 주방장의 발밑으로 내던졌다.
챙그랑!
접시가 깨지며 튕겨 나간 돼지고기 스테이크가 주방장의 신발 위로 나동그라졌다. 순간 놀랐던 주방장의 표정이 급하게 구겨졌다.
“이게 무슨…!”
“핫케이크는 잘 익었으면 좋겠군.”
“황자님!”
“9분 남았네. 손이 잘려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얼른 움직이지그래.”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주방장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텟, 다른 주방장을 알아보게, 저놈은 곧 관둘 것 같으니.”
“예, 알겠습니다. 따로 선호하시는 주방장이 있으십니까? 고기 요리를 잘한다거나, 해물 요리를 잘한다 같은, 특별히 원하시는 전문 분야가 있으시다면 찾아보겠습니다.”
텟은 그동안 얼굴을 마주 봤던 주방장이 잘리든 말든 상관없는 듯, 내게 물었다. 이놈도 은근 인정사정없네. 하긴, 그러니까 내가 타루스한테 팔려 갈 때마다 관심도 없던 거겠지.
“글쎄….”
아, 오디션을 열어 볼까? 젠이 토벌 나가면 할 일도 없고 심심할 텐데.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나.”
“시험 말입니까?”
“그래, 신분 상관하지 말고 요리에 소질이 있는 자라면 아무나.”
시험을 보게 되면 하나하나 뽑는 게 귀찮긴 하겠지만 지금의 주방장 같은 엉터리는 안 오겠지.
“황실에서 일할 임원은 프레오나의 재상이 관리합니다. 신분과 관계없이 뽑으실 거라면 재상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텟은 재상의 허락 없이 평민을 포함해 내 멋대로 뽑는 건 안 될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적국의 황자인 내가 황궁에 누굴 들일 줄 알고 허락하겠냐. 귀찮네…. 세르비스를 데려와야 했는데….
“그럼 그대가 아무나 괜찮은 사람으로 몇 명 추려서 오게.”
“예, 알겠습니다.”
“가 보게. 저 주방장은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가도 괜찮다는 내 말에 텟은 고개를 숙이곤 새로운 주방장의 리스트를 작성하러 갔다. 가능하면 저놈도 갈아치우고 싶지만 크게 불편한 건 없으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예전이라면 모터 주둥이로 끊임없이 말을 했겠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조용하다. 젠이 있어서 그런가?
살며시 젠을 바라봤다.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젠이 나와 눈을 마주치곤 나직이 말했다.
“그 주방장은 명백한 황족모독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렇지, 황족모독죄지. 하지만 그 법을 걸고넘어지면 프레오나가 꽤 시끄러워질 거다. 내게 잘 보여야 하는 오스먼드도 나서서 처리해 주겠지만, 내켜 하진 않을 테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는 격이니까. 자신의 웅덩이를 흙탕물로 만들고 싶진 않겠지.
“우리 선에서 해결하자. 황족모독죄는 바로 뒤지는 거지만, 그런 것보단 괴롭혀 주다가 없애 버리는 게 더 시원할 거 같아.”
“….”
“괴롭히는 건 마린이 할 거야, 그치?”
나보다 마린이 더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아무것도 못 했었고, 몰래 무슨 일을 벌려도 전부 다 멀쩡했다 하니. 쯧.
마린에게 의사를 묻자 마린이 씨익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당연하죠. 오늘 저녁부터 주방으로 들어가 톡톡히 갈궈 줄 겁니다.”
“그래, 너무 강하게 하진 말고. 도망갈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마린이 신이 나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 마린 할 일이 참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