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4)
지체할 것 없이 식당으로 돌아간 우린 아직 고기를 뜯고 있는 노반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맛있어?”
“끄잉!”
고기를 신나게 뜯으며 대답도 하느라 컁이 끄잉이 됐다. 아, 너무 귀여워.
별다른 향신료 없이 불판 위에 살짝 올려놓은 듯한 스테이크는 인간이 먹기엔 위험하지만 다행히 노반의 입맛에는 맞았나 보다. 프레오나의 고기 질이 좋아서 그런가 보네. 다행이다.
마지막 고기까지 다 뜯은 노반을 잘 먹었다 칭찬해 준 다음 정원으로 나갔다. 주방장에게 줬던 10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정원에 놓인 티 테이블 위에 푹신한 방석을 올린 다음 노반을 그 위에 올려 줬다.
“컁!”
“꽃이 안 펴서 아쉽다. 봄이나 여름이었다면 활짝 피어 있었을 텐데.”
별 볼 것 없는 정원을 구경했다.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났을 무렵 주방장이 나타났고, 그는 약속한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한 손에 그릇을 든 채 느긋하게 걸어왔다.
“컁컁!”
푹신한 방석 위에 우아하게 앉은 노반이 느긋한 주방장을 향해 얼른 오라며 컁컁 짖었다. 그에 조금 더 빠르게 걸은 주방장이 손에 든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릇에는 다른 플레이팅 없이 다섯 개의 핫케이크가 겹쳐 올려져 있었는데, 맨 위에 있는 핫케이크만 노릇하게 구워져 있고, 밑에 깔린 핫케이크는 전부 거뭇거뭇했다.
“분명 10분이라 했는데, 지금 몇 분이 지난 줄 알고 있나?”
“황자님이 드실 음식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늦었습니다.”
“앉게.”
생각해 놓은 바가 있어 주방장에게 앉으라 명령했다. 그에 주방장이 젠의 옆에 있는 의자를 빼내려 하자 젠이 그 의자에 발을 턱하고 올렸다. 주방장이 의문을 표하며 젠을 바라보니 젠은 바닥을 턱짓하며 간결하게 말했다.
“바닥.”
그러자 얼굴이 벌게진 주방장이 젠을 향해 소리쳤다.
“신분을 잃어버린 그대가 어찌 내게 명령하는 것인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가! 나는 시저킹 남작 가문의 차남 랄프 님이시다!”
가지가지 한다. 비록 젠이 백작위를 잃었다지만, 황자인 내가 두 눈 뜨고 똑똑히 보고 있는데 저런 말을 한다고? 남작 가문이라면 못 배우진 않았을 텐데, 태생적으로 멍청한 건가. 그리고 이름이 뭐 저 따위야. 랄프 시저킹? 가위왕 랄프? 주먹왕 랄프 짭이야, 뭐야.
“지금 누구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거지?”
화가 난 마린이 눈치 없는 랄프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콧방귀를 뀐 랄프가 나와 마린 그리고 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랄프 님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프레오나의 높은 사람뿐이다! 적국의 황자와 그의 시종, 그리고 제국을 버리고 적국의 황자와 도망친 그대에겐 발언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네, 처맞는 말. 저런 놈은 뒤질 때까지 처맞으면 정신을 차릴 텐데.
“팰까?”
“제가 해도 될까요?”
“응, 몇 대만 패 줘. 뼈는 멀쩡하고 멍만 들게.”
내 허락을 구한 젠이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로 뽑아 랄프를 향해 휘둘렀다.
“악! 이게 무슨…! 악!”
퍽. 목에 한 대. 퍽퍽. 옆구리에 두 대. 퍽퍽퍽. 궁댕이에 세 대. 그 외에도 골고루 처맞았다. 젠이 많이 봐주고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꽤 아플 거다. 저 검집은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강도이기 때문에 랄프의 몸이 부서지면 부서졌지 검집은 절대 부서지지….
“헐.”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다이아몬드와 비슷할 정도로 단단했던 그 검집에 금이 간 것이다.
나와 마린, 그리고 노반까지 깜짝 놀라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도대체 저 새끼 조상이 누구길래…. 이순신 장군이야? 세종대왕이야? 아니, 서양이니까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이런 애들이야?
“나 이제 좀 무서워…. 온 우주가 저 새끼를 지켜 주는 거 아니야?”
젠도 놀라운지 금이 간 검집을 살피느라 잠시 매타작을 멈췄다. 그러자 맞지 않게 된 랄프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검집을 살피는 젠을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신분 없는 도망자 나부랭이가! 당장이라도 귀족 회의를 열어 네놈을 처단하겠다!”
보통 또라이라면 처맞다 보면 정신을 차리는데, 간혹 백 년에 한두 명 정신을 못 차리고 나대는 저런 놈들이 있다.
“<파로>.”
움직임을 멈추는 마법을 쓰자 손목에 감긴 아크레나 팔찌가 진동하며 마나의 사용량을 줄였다. 랄프는 젠에게 달려드는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
“죽은 건가요?”
마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죽기엔 아직 창창한 나이잖니.
“아직 살아 있어. 그냥 몸만 못 움직이는 거야. 저 상태로 오래 놔두면 죽겠지만.”
굶어서 아사(餓死)할 수도 있고, 밤에는 추우니까 동사(凍死)할 수도 있고, 화를 못 참아 분사(憤死)할 수도 있고, 다양한 요인으로 죽을 수 있겠지. 근데 저 새끼는 안 죽을 것 같단 말이지…. 쟤는 사형당할 때도 전날 처형대가 무너지거나 단두대의 날이 두 개로 갈라져 목숨을 부지할 것 같다.
“걱정 말게. 그대가 나로 인해 죽게 된다면 그대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동상을 하나 세워 주지. 어렵지 않아. 그저 그대의 시체 위에 구리를 입히면 될 뿐이니.”
내 말을 들었는지 움직이지 못하는 랄프의 몸이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이런 게 협박이지. 10분 정도 지나면 마법은 저절로 풀리겠지만 가만히 있기엔 시간이 아까우니 그때까지 조금 놀아 줄까.
“시저킹 남작가의 위상은 어떻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가문입니다.”
아, 물어볼 대상이 잘못됐다. 젠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니 이름 있는 공작, 백작 가문이면 몰라도 수십 개나 있는 남작 가문을 하나하나 알고 있진 않을 거다.
“어느 가문이든 상관없지. 높아 봐야 나보다 높겠어?”
크기로 따지자면 넌 제국의 한 부분이고, 난 제국이니까.
“내가 가학적인 건 안 좋아하는데, 넌 좀 맞아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내가 문제를 하나 낼게. 못 맞히면 한 대씩 맞는 거야, 알았지?”
자리에서 일어나 멈춰 있는 랄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바로 앞에 선 뒤 못 들었다는 변명을 하지 못하게 천천히 말했다.
“이거 몇 개?”
주먹을 쥔 채 중지 손가락 하나만 올리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답은 하나야. 말 못 했으니까 이따가 한 대 맞자.”
움직일 때 때려야 더 아프지.
“두 번째 문제, 이건 몇 개?”
양손의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정답은 두 개야. 아까는 말 잘하더니 왜 그래? 정신 차려. 이번에도 대답 못 했으니까 한 대 추가야.”
한 몸에 두 개뿐인 가운뎃손가락을 다 썼다. 발가락을 쓰는 건 보기 흉할 것 같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음… 장르를 스릴러로 바꿔 볼까?
“세 번째 문제, 넌 언제 죽게 될까?”
사람 몇 죽여 본 연쇄 살인마처럼 스산하게 물어봤다. 캬, 나였음 무서워서 지렸다.
“끄….”
엇, 움직였다. 아직 10분 안 지났는데…? 쟤 진짜 대단하네. 조상신이 아니라 천신인 아딘이 보호해 주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랄프에게 건 마법이 곧 풀어질 것 같아, 서둘러 마무리를 지었다.
“이번 답은 네 입으로 들을게.”
랄프의 뒤쪽으로 가, 신발의 뾰족한 부분으로 랄프의 양다리를 사정없이 찍었다. 딱 두 대. 답을 하지 못한 대가였다. 내가 찍어서 다행이지, 젠이 찍었으면 네 다리뼈는 산산조각 났을 거다.
곧이어 마법이 풀리고, 랄프의 두 다리가 접히며 그의 상체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털썩, 주저앉은 랄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 정신을 차린 건가?
“정답은?”
“예?”
마법이라는 미지의 무서움을 느낀 랄프는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답은 들어야지.
“네가 언제 죽게 될까? 5초 줄게. 답을 못 한다면 5초 후가 그 답이 되겠지.”
“그, 그….”
“오, 사, 삼….”
“오, 오십 년 후에 죽고 싶습니다!”
사색이 된 랄프가 내 바지의 밑단을 잡았다. 그때 가까이 다가온 젠이 내 바짓단을 잡은 랄프의 손을 발로 거칠게 떼어 내곤 두꺼운 뒷굽으로 짓이기며 밟았다.
젠 많이 화났었구나.
“아악!”
“이제 정신 차릴 거야?”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랄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에 랄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젠은 놔줄 생각이 없는 듯 랄프의 머리채까지 잡아 가며 나름 주방장인 그의 오른손을 부쉈다. 뽀각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손, 손이…!”
“왼손이 있잖아. 왼손까지 못 쓰고 싶어?”
그에 랄프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사하지, 한 손만 부러트려서?”
“끄, 끄윽…!”
“묻잖아, 감사하냐고.”
자기 객관화가 확실한 내가 봐도 지금의 나는 깡패가 따로 없다. 아니, 그냥 깡패다. 쉐끼, 그러게 누가 내 뒷담 까래? 뒷담 정도가 아니지 성희롱이었지. 대가리 안 부숴트린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오른손 정도면 싸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 넌 진짜 감사해야 해. 네가 자랑 삼는 시저킹인가 스톤킹인가 하는 가문이 황족모독죄로 3대가 깡그리 생매장당할 뻔했으니까, 그치?”
“헉…!”
랄프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뜬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 새끼 때문에 힘들어한 걸 생각하면 이것도 풀리지 않는다. 이놈이 매일 구워 줬던 버터에 빠진 스테이크가 아직도 위장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 급체할 것 같은 냄새의 향신료를 잔뜩 바른 고기는 또 어떻고. 이놈 때문에 영영 고기를 먹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될 뻔했다.
음식으로도 빡치는데 아까 들었던 뒷담을 넘어선 성희롱, 그리고 젠을 모욕하는 말은 그냥 넘어가기엔 잘못이 너무 크다.
“꼬우면 너네 아빠한테 일러. 나도 우리 아빠한테 이를 거야.”
“아, 아닙니다! 이른다니…. 큭! 아닙니다!”
그만 발을 떼어도 된다는 뜻으로 젠을 바라봤다. 젠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만족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를 지켜보는 나와 어린 노반을 살피며 랄프의 손을 짓밟고 있는 발을 살며시 뗐다.
“믿을게. 아, 너 밥은 먹었니?”
“예…? 예, 먹었습니다!”
랄프는 피가 나진 않지만 너덜너덜해 보이는 오른손을 부여잡았다. 그러곤 밥을 먹었냐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었구나.
“그럼 디저트 먹어야겠네. 이거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