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6)
“황자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따스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기분 좋은 날이다. 견과류를 갈아 넣은 딸기잼을 마린 특제 부드러운 빵과 함께 먹던 난 텟의 망발로 인해 입맛이 뚝 떨어졌다.
뭔데. 왜. 또 왜! 왜 부르는데!
“무슨 일이지?”
“그것은 따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황자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텟은 찰랑이는 긴 머리칼을 자랑하며 큰 눈을 깜박였다. 저 머리는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언제까지 오라는 말씀은 안 하셨나?”
“준비되시는 대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선 제국의 정무를 살피시느라 항상 집무실에 계십니다. 식사도 집무실에서 하시니 시간은 상관없다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네. 점심 전에 갈 터이니 때에 맞춰서 준비하게.”
“예, 알겠습니다!”
지금 가기엔 귀찮고, 점심 후에 가면 할 이야기가 길다면서 오래 있으라고 할 것 같으니 패스, 점심 전에 가면 같이 식사를 하자 할 것 같지만 먹고 왔다고 하면 되고, 텟에게 잠깐 들은 이야기로는 꽤 바쁜 것 같으니 아마 밥도 잘 안 챙겨 먹을 거다. 그러니 할 말만 빠르게 하고 떠날 수 있는 점심 전이 가장 현명한 시간대다.
오스먼드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대충 짐작은 간다. 성녀 아니면 랄프겠지. 그것 외에 나를 부를 일이 있겠어?
“미르, 이따가 그 바다뱀 보러 가?”
“응, 바다뱀이 오라고 하네.”
오스먼드의 마차에 탔었던 그날부터 노반은 오스먼드를 바다뱀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냐 했더니 전에 알려 줬던 바다의 색이 오스먼드의 머리 색이랑 비슷하고 교활해 보이는 게 뱀이랑 똑같아서 바다와 뱀을 합쳐 바다뱀이라 부른단다.
바다뱀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오스먼드처럼 안 생겼을 거다. 오스먼드가 성격은 좀 그래도 얼굴은 꽤 생겼으니까. 그런 흐물흐물한 뱀이 잘생겨 봐야 얼마나 잘생겼겠냐.
“그래도 우리 젠이 최고지.”
“네?”
“아니야, 하던 거 계속해.”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 아래에서, 젠과 마린은 아침 식사를 빨리 마치고 체스를 뒀다.
어젯밤, 방을 뛰노는 노반을 구경하다 구석에 박혀 있던 체스를 발견했다. 그 체스는 내가 알고 있던 체스와 똑같았다. 체스판은 물론이고 체스 말도 킹, 퀸, 록, 나이트, 폰 그리고 말 대가리까지 전부 똑같았다.
체스는 귀족의 놀이라서 이프리트가(家)의 젠과 로테스가(家)의 마린은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은 체스를 처음 봐서 잘 알지 못하는 노반을 위해 설명을 해 주다 경쟁에 불이 붙었다. 나는 체스나 장기, 바둑 같은 고전 놀이라면 치를 떨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체스의 말을 잡으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
“미르, 내가 같이 가 줄까? 바다뱀 싫어하잖아.”
젠과 마린의 대국을 지켜보던 노반이 내게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마음도 써 주고 귀여워 죽겠어, 증말.
“괜찮아. 노반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
“젠과 약속했었지?”
노반은 북쪽에서 프레오나 황궁으로 오는 동안 잠시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젠과 약속했었다. 어제는 막 도착해 피곤해서 쉬었다지만 오늘은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진짜로?”
“응, 진짜.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젠이 도와줄 거고, 나도 힘 세.”
“맞아. 못돼 처먹었잖아!”
응…?
체스에 빠져 있던 젠과 마린도 노반의 해맑은 디스에 깜짝 놀라 우리를 바라봤다.
“노반,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미르 완전 못됐잖아! 어제도 막 시궁창 물 떠서 주고, 무서운 말 하고! 완전 멋있어!”
아, 랄프.
“노반, 그건 멋있는 게 아니에요.”
놀란 내가 멍하니 노반을 바라보고 있자 딱 맞춰 체크메이트를 외친 젠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노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완전 멋졌는데!”라고 말했고, 젠은 그런 게 아니라며 노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정정했다.
젠과의 체스에서 패배해 잔뜩 풀이 죽은 마린이 울적한 얼굴로 노반에게 말했다.
“황자님은 그 극악무도한 놈에게 벌을 내린 거예요.”
“이게 바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예요, 노반. 지식이 쌓이면 판단력이 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게 돼요.”
오, 방금 되게 선생님 같았다. 아무튼 내가 또 잘못했다. 애 앞에서 할 짓이 아니었지. 다음부턴 노반 눈에 안 띄는 곳에서 몰래 해야겠다.
“그래… 노반, 공부 많이 해야겠다…. 나 지금 갈게….”
원래 계획은 점심 전이었지만, 지금 가야겠다. 아침 식사 시간은 지났으니까 지금 가도 괜찮겠지.
“무사히 다녀오세요, 황자님.”
“같이 나가요.”
“미르! 나도 갈래! 나도 데려가!”
마린은 다 끝난 체스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돌이켜보고 있고, 젠은 같이 나가자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가 함께 가자며 따라붙는 노반을 보고 들었던 겉옷을 내려놨다.
“아니야! 나 혼자 다녀올게. 텟! 지금 갈 테니 준비하게!”
아이 교육은 젠이 할 테니 난 도망가야지. 도망가는 곳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쩌겠어. 아빠는 떠난다!
빠르게 준비하느라 분주한 텟을 잠시 기다리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노반이 쫓아올까 봐 마차는 포기하고 두 발로 걷기로 했다. 조금 멀지만 혼자 산책한다 생각하지 뭐.
“저, 황자님. 사실 황자님이 안 계시는 동안 제가 시종장이 됐습니다.”
“그랬구나. 축하해.”
“네! 그리고 곧 혼인을 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도 저를 좋아하는 것 같지 뭡니까. 혼인을 하게 되면 바로 아이도 낳을 생각인데 두 명이 좋겠죠? 흠… 세 명도 욕심이 납니다…. 그치만 시종장이 됐으니 바빠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아내가 많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군요.”
아, 혼자가 아니었지. 겁나 시끄럽네. 그리고 쟤는 아직 연애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벌써 결혼하고 애 낳는 생각을 하냐? 김칫국도 적당히 먹어야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여인이 마린은 아니지?”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마린 씨는 절대 아닙니다. 마린 씨는 너무 무서우…. 아무튼 마린 씨는 아닙니다.”
“아니라면 됐네.”
휴, 다행이다. 그 여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평생 텟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살 거라 생각하니… 내가 다 피곤하다.
“그 여인에게 고백을 하려 합니다. 아무래도 망설이고 있는 것 같은데 사내답게 먼저 고백하는 게 멋있을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대는… 입만 다물면 괜찮을 거야.”
“네? 입을 다물고 어떻게 고백을 합니까?”
텟이 그게 말이 되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표했다. 쟤는 비꼬는 것도 모르는구나. 그래, 어제부터 조금 조용하다 싶었다. 넌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말없이 반지를 건네주는 건 어떤가.”
“오! 그거 정말 멋진 계획이군요! 아무래도 반지는 보석이 달린 게 좋겠죠?”
“그래, 그대가 준비할 수 있는 가장 큰 보석이 달린 반지로 준비하게.”
“예! 녹색에 둥글고 큰 옥보석이 달린 반지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옥보석? 옥반지? …장난해?
“….”
“왜 그러십니까?”
“요새는 투명한 보석이 유행이라더군.”
“투명한 보석 말입니까?”
“그래. 루비, 다이아, 사파이어, 토파즈, 에메랄드 등등 색깔별로 많으니 그 여인과 어울리는 보석으로 사게.”
그에 텟이 나를 경외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이 좀 많이 부담스러웠지만 연애 고자라 뭘 모른다 생각하며 그러려니 했다.
그 뒤로도 텟의 주둥이는 쉬지 않았다. 전에는 오스먼드 자랑만 하더니 이제는 자기 이야기도 슬슬 한다. 완전 업그레이드한 모터다. 아, 나 지금 귀에서 피 나오는 것 같은데.
“그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황제가 머무는 본궁은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궁보다 화려했다. 내가 프레오나에 처음 온 날, 선황제와 황태자를 만났을 때와 변한 것 없이 똑같았다. 텟은 활짝 웃으며 기다린다 했고, 나는 때맞춰 마중 나온 오스먼드의 시종인 보리언의 안내를 받았다.
황궁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와 똑같은 복도였다. 처음 들어갔던 알현실을 지나 계단을 타고 올라가 가장 큰 문으로 들어갔다. 집무실로 가는 동안 보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누구 씨랑은 참 비교가 됐다.
“빨리 왔군.”
오스먼드가 고개를 들지 않고 인사를 했다. 그는 거대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 서류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책상엔 당장 확인할 양만 올려져 있지만 그의 뒤로 사람만 한 서류가 잔뜩 실린 카트가 몇 대나 밀려 있었다. 저러다 죽겠다.
“예, 바쁘신 것 같아 지금 왔습니다. 제가 잘 맞춰 온 듯하군요.”
내 말이 끝나자 오스먼드가 서류만 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피식하고 웃었다.
아, 맞다. 자극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렇군. 앞에 앉게.”
오스먼드의 맞은편에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작은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의 뜻대로 그 소파에 앉았지만 그는 내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높게 쌓인 서류를 확인하며 침묵했다.
젠이 노반을 교육할 때까지는 시간이 꽤 있지만 여기서 시간 때우는 것도 찝찝하고… 차라리 로테 별궁으로 돌아가 관능의 방에 들어가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시간이 조금 널널하다지만 오스먼드는 나를 앉혀 놓고 한참을 방치했다. 난 가까이에 놓여 있는 서류를 힐끗힐끗 훔쳐봤다. 기사단 문제라거나, 귀족들의 세금, 황무지 탐사, 개발 지역 탐사 등등 황제가 이런 거까지 해? 라고 생각될 만한 것들도 꽤 있었다. 이런 걸 내가 봐도 되는 거야?
“다 보입니다.”
“상관없네. 본다 한들 그대가 뭘 하겠나.”
“제가 기밀문서를 보면 어떡합니다. 저라도 말을 전하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라면 이미 다 끝냈다. 이것들은 자잘한 것들이니 별로 상관없어.”
그런 자잘한 일을 왜 황제가 하냐고, 재상 같은 업무 보는 애들 뽑아서 걔네한테 맡기지 않나? 저러다간 죽어서도 일하겠다. 그의 뒤로 있는 서류 지옥이 끔찍해 보였지만, 오스먼드가 일을 적게 하든 많이 하든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빠 보이는 그를 재촉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있지.”
그는 두 눈을 서류에서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저도 바쁩니다.”
“나만 할까.”
내 알 바냐.
“저희 집 여우가 외로움을 많이 타서 제가 없으면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니 최대한 빨리 가야 합니다.”
“그렇군. 어제 일을 벌여 놨더군.”
“아.”
랄프인가 보다. 사나흘은 지나야 알려질 거라 생각했는데 꽤 빠르다.
“내가 그자를 어떻게 해 주길 바라지?”
“그 말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했지 않은가, 그대가 원하는 건 다 들어 줄 생각이라고.”
드디어 서류에서 눈을 뗀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말해 보게. 그대가 원한다면 그대를 모욕한 그자를 당장이라도 내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