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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86화 (86/227)

86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7)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그자의 머리를 도려내 광장 한복판에 걸어 두고 싶지만, 전 괜찮습니다. 제 나름대로 벌도 내렸고, 그것을 죽음으로 벗어나게 두기엔 제가 그리 관대하지 못합니다.”

난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 죽이는 건 찝찝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기에는 성이 차지 않으니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이라도 철저하게 괴롭혀 줄 요량이다.

“그런가.”

“예, 그러니 넘어가십시오. 그편이 폐하께서도 좋지 않습니까.”

“그렇지, 귀족들의 원성을 일부러 살 필욘 없으니.”

오스먼드는 그리 말하며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이게 끝이면 가라고 하든 더 있으라 하든 말을 할 것이지 사람 불러다 놓고 뭐 하는 거야!

“하실 말씀은 끝나셨습니까?”

“일단은 끝났지. 성녀 이야기를 하고 싶다만 이프리트 경이 토벌에서 돌아온 다음에 하자고 할 것 아닌가?”

그렇지. 성녀 만나러 가려면 세네카에 가야 하는데 나 혼자 가기엔 심심하고 찝찝하니까.

“맞습니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네만.”

대화의 릴레이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오스먼드는 꾸준히 서류만 볼 뿐이었다. 그에 짜증이 나 작게 혀를 찼더니 그걸 또 들었는지 그가 내내 처져 있던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이 새끼가?

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눈이 정수리에 달리지 않은 이상 그가 내 표정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스먼드는 외계인이었는지 버릇없는 내 표정을 알아차리곤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 보인다.”

보이면 뭐, 어쩌라고.

“예.”

예의 바르게 대답은 했지만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얼른 돌아가고 싶다. 1분이 1년 같다. 오늘은 특별히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어 준다던 마린이 보고 싶고, 내게 못돼 처먹었다고 한 노반도 보고 싶고, 한결같이 다정하고 숨만 쉬어도 잘생긴 젠이 보고 싶다.

“읽어 보게.”

오스먼드는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오른쪽에 놓여 있던 종이 두 장을 내게 넘겼다.

“이게 무엇입니까?”

“국무.”

“프레오나의 국무를 제가 왜 봅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두 눈은 오스먼드가 건네준 종이를 살폈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몇몇 불성실한 영주가 세금을 과도하게 걷고 세금을 내지 못할 시 영지민을 착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비슷하구나.

“그대라면 어찌하겠나.”

“흔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 제국민을 위하려면 영주에게 벌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귀족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으려면 모른 척 넘어가야겠지.”

“전 제왕학을 배운 적이 없어 정치 같은 어려운 일은 모릅니다.”

“세네카는 교육에 박한 제국이었던가.”

오스먼드가 고개를 저으며 내가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다.

“전 4황자니까요.”

“흠?”

서류만 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을 듣고 싶은 건지, 궁금하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해 보라 재촉했다.

“어미는 반역자이고 명성이 드높았던 가문은 멸문했으며 저 혼자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황제의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요. 덕분에 제가 황좌에 앉을 가능성은 개미 발톱만큼도 안 됩니다. 그런 자에게 황제를 위한 교육을 시켜 줄 리 없지 않습니까.”

4황자는 반역자의 자식이라 해도 세네카의 모든 제국민에게 사랑받았다. 인형같이 예쁘고 성격도 착해 다들 좋아했지만, 그들이 4황자를 좋아해 주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불우한 환경 때문이었다. 불쌍하니까.

“그래서, 그들을 원망하는가?”

모른다. 내가 4황자도 아니고, 그의 기억은 읽어도 감정을 읽을 순 없다. 4황자는 매일 웃는 얼굴을 했으며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은 척만 했다. 잘 사는 것 같으면서도 속은 그러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습니다.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즐겁게 살았습니다.”

약초 공부도 하고, 약초 공부도 하고, 약초 공부도 하고, 아는 거라곤 약초밖에 없지만 그렇게 자란 거치곤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 줬다.

“그런가. 그럼 내가 친히 교육해 주지.”

미쳤네. 단단히 미쳤어. 갑자기 왜 저런대. 답지 않게 동정하는 건가? 줄 거면 돈으로 주지, 이런 동정은 사양이다.

“괜찮습니다.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손을 이용해 거절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혔지만 오스먼드는 개의치 않는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만족할 만한 해답을 찾게.”

“…예?”

“그 안건은 그대에게 맡기지.”

그가 내가 쥐고 있는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갑자기…? 쟤 진짜 미친 거야? 이 중요한 걸 왜 나한테 맡긴대?

“싫습니다. 전 이런 거 싫어합니다.”

“내가 만족할 해결책을 내기 전까지는 보내 주지 않을 테니 열심히 생각해 보게.”

진심인가?

“제게 폐하의 일을 떠넘기시는 겁니까?”

“그래, 그렇겠군.”

“어째서 저입니까? 귀족 중에서도 영민한 자들이 있을 테고, 밖에 서 있는 시종도 있지 않습니까.”

왜 똑똑한 사람들 놔두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시키냐는 말이다.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에 잠시 서류에서 눈을 뗀 오스먼드가 가볍게 목을 꺾어 굳었던 몸을 펴며 대답했다.

“단순한 재미이기도 하고, 그대는 프레오나가 어찌 되든 상관없을 테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겠지.”

“반대로 제국이 망하는 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그거 하나 잘못했다고 제국이 망하진 않아.”

하긴.

“제가 폐하께서 만족하시는 해결책을 내면 보내 주시는 겁니까?”

“그래.”

그 말에 손에 쥔 종이를 훑으며 생각했다. 오스먼드는 제국민을 위해 줘야 하며, 그렇다고 귀족들의 반감을 사고 싶지도 않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해결책이 필요하단다.

“아직인가.”

내가 답을 낼 동안 몇십 장이 넘는 서류를 처리한 오스먼드가 답을 재촉했다.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한 마리 반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들 중 영주의 대리를 맡은 자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들을 골라내 벌을 내리십시오.”

보통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는 귀족이다. 영지가 크고 토지가 비옥할수록 높은 지위의 귀족이 다스린다. 공작에서 남작까지 그 지위가 참 다양하다. 몇몇 귀족들은 영지도 다스려야 하고 정계의 일도 해야 해 바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그들이 선택하는 게 대리 영주다. 자신은 수도에 남아 있고, 영지의 일은 임의로 사람을 고용해 그에게 맡기는 거다.

“대리 영주를 잡아다 벌을 내리면 귀족들은 경계할 테고, 찔리는 구석이 있다면 자기들이 알아서 정리할 겁니다. 그럼 제국민도 행복하고, 귀족들의 피해도 적지 않겠습니까.”

“대리 영주의 잘못은 그 일을 맡긴 귀족의 잘못이지 않은가. 그 귀족에게도 벌을 내려야 할 것인데 피해가 적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그치만 모든 귀족을 벌하기보단 악질인 귀족 몇을 벌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대리 영주를 크게 벌하고, 그를 고용한 귀족에겐 영지의 세금을 당분간 받지 말라 하거나 벌금을 걷어 황궁의 국고를 채우십시오.”

오스먼드는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서류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나쁘지 않군.”

오스먼드는 가져간 서류에 이것저것 쓰더니 내가 제시한 해결책 말고도 다른 것을 추가했다. 그래, 너 참 현명하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당분간 부르지 마십시오. 부르셔도 안 갈 겁니다.”

나는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직접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던 보리언이 황궁 밖까지 동행했다.

“황자님! 빨리 나오셨네요!”

황궁 밖으로 나오자 아까보다 더 기분 좋아 보이는 텟이 다가왔다. 빨리 나오긴 개뿔이.

“그래.”

내 곁에 서 있던 보리언은 다가온 텟을 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곤 돌아갔다. 정말 누구 씨랑은 다르다.

“로테 별궁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래.”

“네! 돌아가실 때는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오, 센스 있다. 얼른 들어가고 싶었는데 마차를 준비했다니 빠르게 갈 수 있겠다.

텟이 준비한 마차를 타고 로테 별궁으로 빠르게 달렸다. 걸어서는 꽤 걸리는 거리가 마차로는 순식간이었다.

로테 별궁에 도착해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새로 들인 책상에 앉아 있는 노반과 젠이 보였다. 둘은 딱 붙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노반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재미없어. 완전 재미없어…!”

“다 끝나면 빨간색 사탕을 줄게요.”

“그 사탕도 미르가 주는 거였잖아!”

“미르 님이 제게 주셨으니 주는 방법은 제 마음이죠.”

젠은 에멀슨 공자에게서 받은 사탕을 담보로 노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육아와 교육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재미없어!”

“평소에는 잘했으면서 오늘은 왜 그럴까요. 집중하세요, 노반.”

“재미없는 걸 어떡해!”

맞아, 진짜 재미없어 보인다. 나였으면 당장 자리 박차고 나갔을걸? 물론 말이 그렇단 거지 실제로는 꾸역꾸역 했겠지만….

“이 부분은 중요하니 다시 읽어 보세요.”

“그 부분만 다섯 번째잖아!”

“중요하니까요.”

난 겉옷을 벗고 침대에 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아까까지 뒤숭숭하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아까는 정말 불편했다.

“미르! 나 이거 진짜 싫어!”

“그럼 하지 말까?”

“응!”

“그래! 하지 말자! 그거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에 앉아 있는 노반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헉!”

가벼울 줄 알았던 노반의 무게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거웠다. 덕분에 팔과 허리가 뽀사지는 줄 알았다. 결국 번쩍 들어 올리지 못하고 노반이 앉아 있는 의자에서 5센티미터 정도 들고 털썩 쓰러트렸다.

“앗! 미르, 미안!”

“아, 아니야. 난 괜찮아. 멀쩡해!”

깜짝 놀란 노반이 도도도 달려와선 내 허리를 톡톡 두드려 줬다. 걱정하는 노반의 표정에 으슬으슬 아리던 허리를 곧게 펴고 멀쩡한 척했다.

“정말 괜찮아?”

“응, 괜찮아.”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멀쩡하다고 어필했다. 그러자 젠이 다가와서는 아직 무거운 노반을 번쩍 들어선 다시 책상에 앉혔다.

“이건 알아야 해요.”

나는 무거워서 들지도 못하는 노반을 아주 손쉽게 들어 올렸다. 이게 바로 피지컬의 차이인가.

“하기 싫어!”

“이것만 해요.”

젠은 애처럼 하기 싫다 생떼 쓰는 노반을 어르고 달랬다. 그에 사나웠던 기세가 누그러진 노반이 다시 한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계속 저렇게 공부를 시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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