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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87화 (87/227)

87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8)

“이해했어요?”

“응, 했어. 그러니까 사탕 줘.”

“말해 보세요.”

이해한 것을 말해 보라는 젠에, 노반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몰라.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노반은 허공을 바라보며 기억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수,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대.”

“맞아요. 그리고요?”

“….”

기억이 나질 않는지 입술을 꾸깃거린 노반이 다시금 나를 바라봤다. 아, 귀여워라.

“그런 건 직접 겪어 보면서 체감하며 배우는 거지. 노반, 우리 심부름 하나 할까?”

“심부름?”

“응, 북쪽에서는 쉬웠지만 여기는 어려울걸? 넓기도 하고,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거든. 할 수 있겠어?”

북쪽의 상점가는 규모도 작고 사람들도 순해서 노반이 부담 없이 놀기에 적당했지만, 이곳은 수도이고 규모도 북쪽에 비하면 아주 커서 조금 불안하긴 했다. 그래도 딱 붙어서 미행할 거니까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노반 덕에 속전속결로 정해졌다.

“텟! 잠시 밖에 나갔다 올 테니 찾지 말거라!”

복도로 나와 크게 소리쳤다. 타이밍 좋게 계단을 올라오던 시종이 방에서 쉬고 있을 텟을 불러 줬다. 부름을 받은 텟이 헐레벌떡 나에게 달려오며 물었다.

“황자님! 호위도 없이 나가실 겁니까?!”

“이프리트 경이 있으니 괜찮네. 오늘 안에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말고.”

텟은 내 곁에 서 있는 젠을 흘깃 보고는 걱정 안 해도 된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항상 나와 같이 있던 마린을 찾아 눈을 돌리며 물었다.

“마린 씨와는 함께 가지 않는 겁니까?”

“아니, 같이 갈 거다.”

지금 찾으러 갈 거다.

생크림 케이크도 만들어야지, 간간이 내 간식도 챙겨 주지, 힘이 넘쳐 나는 노반이랑도 놀아 주지, 주방 상황도 확인하지, 회복 중인 랄프도 괴롭혀야지, 눈치 없는 텟도 갈궈야지, 하루 한 시간 이상은 임기 던지는 연습해야지, 암기도 정리해야 하고, 우리 중에 마린이 제일 바쁘다. 마음 같아선 편히 쉬라고 하고 싶지만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 할 테니 조금이라도 쉬게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지.

“그럼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텟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듯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에 부탁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참 당차구나. 단순해서 좋겠다.

마부를 부르러 간 텟을 뒤로하고 어느새 여우로 변한 노반을 안아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게 눈을 깜빡이는 노반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준 다음, 우리는 마린을 찾으러 주방으로 내려갔다.

바로 따라올 줄 알았던 젠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내가 입을 겉옷과 노반이 덮을 담요까지 챙겨 들고 내려왔다. 젠은 나와는 다르게 굉장히 섬세한 남자다.

“오늘 쨍쨍한데 많이 추우려나?”

“네, 해가 지면 쌀쌀해질 거예요.”

하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고. 젠의 말대로 해가 지면 쌀쌀함을 넘어서 추워 죽을지도 모른다.

“마린!”

주방으로 들어가니 의자에 앉아 칼을 정리하고 있는 마린이 보였다. 마린은 나를 보자 손에 들고 있던 무시무시한 칼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황자님, 별일 없으셨습니까?”

“응?”

“폐하께 불려 가셨잖습니까. 걱정했어요.”

마린은 사람 인 자로 구겨진 미간을 자랑하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했다. 확실히 별일 없었다. 협박당한 것도 없고, 그냥 나와 관계없는 일을 쪼금 했을 뿐이다.

“응, 별일 없었어.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린, 우리 밖으로 나가자.”

“어디를 가시려구요?”

“수도 상점가.”

안고 있는 노반을 마린에게 보여 주며 밖으로 나가자 했다. 그에 가볍게 웃은 마린이 잠깐만 기다리라 말하곤 주방 끝에 있는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야?”

“푸딩이에요. 바닐라 좋아하시죠?”

“응, 완전.”

북쪽 저택에 있었을 때, 아주 가끔 마린과 푸딩을 만들었었다. 설탕을 녹여 캐러멜을 만들고, 그 위에 젤라틴과 우유, 생크림을 저어 만든 액체를 부어 냉장고에 두고 굳힌다. 과일을 넣어 다양한 맛을 내기도 했지만, 나는 바닐라 향이 나는 평범한 푸딩을 좋아한다.

마린은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푸딩을 내게 쥐어 주곤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방으로 올라갔다.

보기만 해도 탱글탱글한 푸딩이 손에 쥐어졌지만 노반을 안고 있는 탓에 스푼을 들 손이 없었다. 그에 푸딩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푸딩을 담은 티스푼이 입가에 당도했다.

“아, 하세요.”

“아!”

들고 있던 담요와 겉옷을 팔에 걸친 젠이 손이 없는 나를 위해 푸딩을 직접 떠서 먹여 줬다. 탱글탱글한 푸딩이 입 안에서 으스러지며 부서져, 바닐라 향이 살짝씩 풍기며 부드러운 푸딩 알갱이가 살살 녹았다. 미친 존맛.

젠이 떠먹여 줘서인지, 마린이 맛있게 만들어서인지, 이번 푸딩은 전에 먹었던 그 어떤 푸딩들보다 훨씬 맛있었다.

“진짜 맛있어. 젠도 먹어 봐.”

“전 괜찮아요.”

“안 먹으면 후회할 정도로 맛있어.”

그에 고개를 끄덕인 젠이 푸딩을 한입 떠 그의 입에 넣었다. 엇, 저거 간접 키스…. 아니야, 우린 어른인데 이런 시시한 간접 키스에 연연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푸딩의 맛을 음미한 젠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별로인가?

“별로야?”

“지금까지 먹었던 푸딩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그치? 뭐 좋은 거 넣었나 봐.”

젠은 자기도 먹여 달라며 컁컁 짖는 노반에게 남은 푸딩을 큼직하게 떠서 먹어 줬다. 입 안 가득 푸딩을 머금고 씹던 노반이 맛있다는 뜻으로 신나게 눈을 깜빡였다.

“맛있다, 그치?”

“컁!”

때마침 편한 조리사 복장에서 신데렐라 같은 연한 파란색의 드레스로 갈아입은 마린이 돌아왔다. 이제 출발하자며 냉장고에 남아 있던 자기 몫의 푸딩을 꺼내 든 마린에게 무슨 푸딩이 이렇게 부드럽냐 물었더니 마린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주방 보조 하나를 가리켰다. 그 주방 보조는 오른손을 붕대로 칭칭 감은 랄프였다.

“뭐야…?”

“저놈을 시켜서 저었어요.”

부서진 오른손 말고, 멀쩡한 왼손으로 저으라 시켰나 보다. 잘했네.

랄프는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는데, 왼손으로 썩거나 아직 익지 않은 콩을 골라내 쓰레기통에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회복될 때까지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회복이라뇨, 두 손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왼손은 멀쩡하니 괜찮아요.”

그러네.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도 아깝고, 한 손 멀쩡하면 써먹어야지. 손은 잘 먹고 잘 자면 나을 거다. 안 나으면 어쩔 수 없고.

우리는 주방을 나와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가는 와중에도 나는 간간이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봤는데, 그걸 본 마린이 내게 따끔하게 말했다.

“그놈은 동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린이 꼬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중에 랄프를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마린일 거다. 음식으로 당한 게 꽤 있으며, 실제로 랄프에게 해를 입히려 여러 가지 시도를 했었다. 모조리 실패했지만…. 아무튼 세네카에 있을 땐 자애로운 마린이었는데….

“황자님은 너무 착하셔서 탈이에요.”

내가 착하다고? 그럴 리가. 나 살겠다고 모르는 사람을 사지로 내몰고, 새파랗게 어린 애를 상대로 계약을 한다든가, 공경해야 할 노인을 할망구라 부르고, 제국의 황제 앞에서 공갈 자해나 하는 놈이 퍽이나 착하겠다. 누가 착해? 지나가던 멍멍이도 웃겠다.

“푸훗.”

“젠 님?”

“아, 별거 아니에요.”

젠이 듣기에도 내가 착하단 소리는 꽤 웃긴지 그가 마린을 향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제가 잘못 말한 건가요…?”

그에 마린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젠을 향해 묻자 젠은 별것 아니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니에요. 그저 미르 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알 것 같아서요.”

응…?

“무슨 생각?”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저런 일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착한 사람이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서요.”

천재다. 신이라도 들린 듯한 젠의 예측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쩜 나를 이렇게 잘 아는지.

“맞나요?”

젠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그에 동조하며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젠은 마차의 문을 열어 주며 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미르 님은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착하세요.”

“…그럴 리가.”

착한 사람 다 죽었어? 내가 착한 사람이게? 조금 양보해서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 해도 착한 사람은 아니다. 가끔 정에 휘둘리긴 하지만 그것도 내가 가볍게 책임질 수 있는 한에서만 휘둘리는 거고, 단호해야 할 때는 또 단호하다.

“제 눈에는 영악한 척하는 속 깊은 사람으로 보여요.”

“네 눈에만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나쁜 사람을 못 보셔서 그래요. 미르 님은 착하세요.”

젠이 살포시 웃으며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나쁜 사람이라면 꽤 많이 봤다. 사람 열 명이 모이면 그중 하나는 반드시 쓰레기가 나온다고, 오가다 보게 되는 나쁜 놈들이랑 비교하자면 나는 착한… 편이지.

“그런가….”

“네, 그럼요.”

마린은 텟이 불러온 마부를 밀어내고 마부석에 앉았고, 가넷을 타고 갈 줄 알았던 젠은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황궁으로 올 때 같이 타고 온 시간이 있어 익숙해졌나 보다. 좋다.

“옛날 같았으면 가넷을 타고 간다고 그랬을 텐데, 같이 가니까 좋다.”

“같이 타고 가는 게 더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응?”

“가까이에 있으면 더 잘 지킬 수 있으니까요.”

젠은 활짝 열린 마차 문을 천천히 닫았고, 준비가 끝나자 마차는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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