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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89화 (89/227)

89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0)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드디어 서점을 찾은 노반이 책이 가득 쌓여 있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노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젠에게 물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미르 님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하셨을 것 같아요?”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려 받았다. 나였으면 어떡할 거냐고…? 당연히 여론 조작이지.

“맞은 척해서 드러눕거나, 주변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나는 방금의 노반처럼 돈을 막 뿌리고 다니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놈한테 내 돈이 들어가는 게 좀 아깝달까…. 나한테 사기 치려는 놈한텐 한 푼도 주기 싫다.

“음… 미르 님이었다면 그것도 먹혔을 것 같네요.”

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였다면 여론 몰이도 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안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건가?

“나였다면? 그럼 다른 사람은?”

순수하게 모르겠어서 물어본 내 질문에 젠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곧바로 입을 열었다.

“보통 어린아이가 그런 일을 당하고 있으면 한 명이라도 도와주기 마련이죠. 그 상인이 호리병을 깬 것을 본 목격자도 꽤 많았구요.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잖아요. 그 상점에서는 그런 일이 익숙한 거예요.”

“….”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그 상점이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단 건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뜻이고요.”

그렇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노반에게 너무 집중을 해서 그런가, 생각을 넓게 가지질 못했다.

“그러네…. 어떤 새끼지?”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고리만인가 그리만인가 하는 남작일 거예요. 찾아보면 바로 나올 테니 돌아가면 찾아봐요.”

이를 갈며 그 몰상식한 상인 놈을 보호해 주는 못된 놈이 누구냐 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하고 한 물음이 아니다. 젠은 정계에 참여하지 않아 돌아가는 꼴을 모를 테고, 나는 아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모를 거라 생각했던 젠이 예상을 깨고 짐작 가는 귀족의 이름을 말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구리만의 이름을 가진 남작을 찾으면 나오는 거 아니야.

“정계에는 전혀 참여 안 했다면서 은근 알고 있는 게 많네? 대단하다.”

“대충이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어요. 저도 조금은 알아 둬야 하니까요.”

“오….”

“반은 한나 때문이지만요.”

어쩐지. 젠은 정치, 경제, 행정 등등 그런 쪽에 관심 없는 게 눈에 보였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백작으로서 알아 둬야 했겠지만, 젠은 마이웨이로 정계에 참여하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대부분의 일은 한나가 했다고 들었지만 설마 전부 떠맡겼겠어?

“혹시… 이프리트가의 일은 한나가 다 했어?”

“네, 옛날부터 한나가 했어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진짜구나.

“넌 바지사장이었구나, 한나가 비선 실세고.”

하하.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혐의를 인정했다. 어쩐지 처음 한나를 만났을 때 세상 풍파 다 겪어 본 사람처럼 단정하고 침착하며 무게가 있던데, 그래서 그랬구나.

한나는 소녀 가장이나 다름없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오빠는 일하기 싫다며 밖으로 나돌고, 덕분에 일은 남은 자기가 다 떠맡고,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힘들었겠어.

“한나한테 잘해 줘야겠다.”

“충분히 잘해 주고 있어요.”

“아닌 것 같아.”

아닌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 젠은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프레오나에 온 후로 내가 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젠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내 옆에만 있었는데 그동안 이프리트가(家)로 전서 한 번 보내지 않았다. 한나와 만나자는 약속도 안 잡고…. 짐작이지만, 프레오나의 수도로 왔다는 말도 안 했을 거다. 한나는 자신의 오빠가 수도에 왔다는 소식을 소문으로 듣겠지. 아, 가엾어라.

“아! 저 대신 미르 님이 만나는 게 어때요?”

젠이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잘생겼어.

그래, 애도 아니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만나겠지.

“나도 한 번은 만날 거야. 그리고 젠은 동생 만나는 걸 나한테 미루면 안 되지.”

“저보다 미르 님이 더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음… 그건 그런 것 같아. 젠은 최대한 미루고 있잖아?”

생각해 보면 내가 만나고 싶어서 젠을 재촉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만나기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한나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 젠이 토벌을 나가면 젠을 닮은 한나라도 자주 봐야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조금 억지 같지만 그럼에도 젠의 흔적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왔네요.”

멍하니 땅을 보며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젠의 신호로 노반이 서점에서 나온 걸 확인했다. 노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만, 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레이첼! 이따 올게!”

노반이 서점 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려는 책을 미리 봐 놓은 거다. 아직 심부름 목록이 남아 있으니 무거운 책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나중에 한번 오는 게 더 편한 걸 알고 있는 거다. 크, 역시 우리 노반은 똑똑해.

“진짜 자랑스럽다. 내 새끼가 저렇게 똑똑한 아이예요~라고 자랑하고 싶어.”

“그럴까요? 크게 자랑할까요?”

내 손을 잡곤 당장이라도 일어나 거리에 대고 소리치려는 젠을 허둥지둥 막았다. 그때 노반이 뒤를 돌아보는 것 같아, 내 손을 잡은 젠의 손을 꽉 잡곤 눈에 보이는 아무 상점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들어온 상점은 흔히 마녀의 실험실 하면 떠오를 것 같은 물건이 많았다. 작은 액세서리부터 시작해 아기자기한 목각 인형, 금색의 포승줄, 동그라미 안경, 연기가 폴폴 나는 액체와 이리저리 널려 있는 플라스크, 표지에 상형 문자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책들, 화룡점정으로 개구리, 뱀, 박쥐 등등 징그러운 생물들이 색이 있는 액체와 함께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술을 담근 건지 뭔지 굉장히 해괴했다. 실제로 보니 꽤 그로테스크하다.

“그대, 마법사인가? 참 비실비실하게도 생겼구만.”

상점에 전시되어 있는 해괴한 물건들에 시선을 빼앗겨 둘러보던 중, 주인으로 보이는 낯선 상인이 시시껄렁한 양아치 같은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

뭐야, 저 아저씨. 머리는 산발에 코는 뻘겋고, 수염은 왜 또 저리 길어. 상인은 마치 어린이 동화책에 나올 법한 산신령이 루돌프 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마법사인 걸 알아보는 걸로 보아 상인도 마법사인 것 같다. 프레오나에서 마법사를 보다니 신기했다.

“어이, 비실이. 내가 물었잖아, 너 마법사냐고?”

저 상인이 말하는 비실이는 명백하게 나를 뜻하는 말이다. 젠이 마법사도 아닐뿐더러, 키도 크고 체격이 좋은 젠에게 한 말은 아닐 테니 말이다.

노골적으로 나를 흉보는 말에, 나는 눈을 치켜뜬 채 아주 무섭게 상인을 흘겨봤다. 내 곁에 선 젠 또한 나를 따라 그 상인을 경계했다. 나도 젠처럼 멋지게 경계하고 싶었는데 어째 나는 어린애가 흘겨보는 것 같다.

“어어? 저놈, 저 눈 봐라?”

먼저 도발을 한 건 자신이면서, 상인은 도리어 나를 손가락질하며 나무랐다.

속으로 삼키긴 너무 빡치고, 그렇다고 이 빡침을 표출하기엔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 내가 마법사인 걸 알아본 것도 그렇고, 느낌상 ‘은둔의 고수’ 이런 냄새가 강한데 괜히 깝쳤다가 본전도 못 찾을 수 있으니 바로 옆에 있는 젠도 들릴까 말까 하는 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저 꼰대 새끼….”

“욕하는 거 다 들린다!”

내 입 모양을 본 상인이 큰 소리로 내게 눈치를 줬다. 욕인 줄은 아나 보네.

“욕 안 했거든요? 꼰대라고 했거든요?”

“그게 뭔데?”

“강해 보이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에요.”

“그래? 그건 요즘 어린애들이 하는 말인가 보지?”

“비슷해요. 그럼 수고하세요.”

나는 젠의 손을 잡고 상점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우리가 나가려는 것을 막는 듯, 문이 우리의 눈앞에서 스르륵 닫혔다. 그에 개의치 않고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손잡이를 향해 뻗은 내 손을 젠이 다급하게 막았다.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를 문에서 떨어트린 젠이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곤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강하게 뻥 찼다. 그에 큰 소리가 나며 닫혔던 문에 틈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벌어졌던 문이 다시 닫혔다.

“아무래도 쉽게는 못 나갈 것 같네요.”

“하아….”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상인을 돌아봤다. 그에 상인이 박수를 치며 영리한 젠의 행동에 감탄했다.

“똑똑하네. 만약 저 문을 만졌으면 단숨에 전기구이가 됐을 거야.”

상인은 뭐가 재밌는지 낄낄 웃으며 강매를 시작했다.

“들어오면 끝이지, 뭐라도 사고 나가. 마법사니까 그렇게 필요 없는 물건은 아닐 거야.”

“돈이 없어요.”

“그럴 리가. 돈 없는 애들은 이 골목으로 안 와.”

“여기 처음 와서 그런 거 몰랐어요.”

“돈 없는 애들은 그걸 본능적으로 알아.”

“그런 본능 없어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라면 안 왔겠지.”

“저 멍청해요.”

“그래 보여.”

저 새끼가…?

나와 재수 없는 상인과의 말싸움이 끊이질 않자 젠은 우리를 내버려 두고 상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고분고분한 게 조금 의아했다. 원래 같으면 상인에게 겁을 주든 무력으로 빠져나가든 그냥 나갔을 텐데. 아마 저 상인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 아닐까.

“아가씨 기사는 똑똑하잖아. 저거 봐, 빨리 사고 나가려는 거.”

뭐라고? 아가씨? 나와 연이 없는 단어에 잠깐 멍해졌다. 아가씨… 그래, 내가 예쁘게 생겼긴 하지. 뜻도 대충 맞고. 고자가 남자 소리 들어서 뭐 하겠어. 아가씨로도 충분하지.

“별로 마음에 드는 것도 없어요.”

“잘 찾아봐, 하나쯤은 있을 거야.”

“없어요. 내가 개구리를 사겠어요, 뱀을 사겠어요.”

내가 책장 맨 위에 장식되어 있는 징그러운 생물들 가둬 놓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상인이 그 생물들을 길게 응시하며 대꾸했다.

“저건 안 팔아. 나한테 모욕을 줬던 놈들이야.”

“모욕이요?”

“그래, 성질도 고약한 놈이라 제일 징그러운 동물로 변하게 했지. 꽤 애먹었어.”

“…저거 사람이에요?”

“그럼 진짜 개구리랑 뱀이게? 그런 걸 뭐 하러 장식해 놔.”

그건 그렇지…. 그런데 저 사람, 아니 저 생물들은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저런 꼴이 됐을까. 아니다. 궁금해하지 말자.

“아가씨, 이거 어떠신가요?”

때마침 내 곁으로 다가온 젠이 익살스럽게 나를 아가씨라 불렀다. 아까의 대화를 다 들었나 보다. 젠의 입에서 아가씨라는 단어가 나오다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이게 뭐야?”

내가 젠이 가져온 물건을 보며 물었다.

젠은 작은 물방울 모양의 유리가 달려 있는 목걸이를 가져왔는데, 액세서리라기엔 색도 없고 속이 비어 있는 굉장히 초라한 물방울이었다.

“이게 가장 무난해요.”

아, 그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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