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1)
젤리인지 뭔지 보기만 해도 말랑한 반지와 실제 뼈로 만든 듯한 작은 해골 모양의 머리 장식, 형광 녹색의 모래알이 들어 있는 시계, 짐승의 털로 보이는 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울 등등, 이런 해괴한 물건들 사이에서 젠은 잘도 멀쩡한 것을 찾아냈다.
평소라면 하잘것없어 보지도 않을 물방울 목걸이지만, 나락 같은 물건들과 비교하니 시시한 물방울 목걸이는 명품이 따로 없다.
“오, 좋다. 이런 걸 어떻게 찾았어?”
“구석에 박혀 있어서 더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이거면 얼마 하지도 않을 것 같고, 해괴한 물건을 사는 것보단 백배 나으니 꽤 만족하고 있을 무렵, 상인이 젠이 고른 물건을 흘깃 보고는 퉁명스레 물었다.
“그게 뭔지는 알고 사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겠냐? 여기서 제일 멀쩡하니까 사려는 거지.
그냥 아무거나 넣고 다니는 목걸이 아닌가? 여기에 형광 녹색 말고 진짜 모래알이랑 작은 소라나 조개껍데기를 넣으면 바다 느낌도 나고 예쁠 것 같았다. 하지만 상인의 물음 이후에 불안함이 느껴졌다. 마법사 상점이라 별것 아닌 거라도 다 이상할 것 같고, 조금 많이 불안하다.
“그게 뭔지는 아냐고.”
“모르죠.”
“넌 마법사인데 이걸 들어 보지도 못한 거야?”
“저 마법사 아닌데요.”
“무슨 소리야, 네 몸에 흐르는 게 마나인데.”
“안 흐르거든요.”
내 몸에 마나가 잘 흐르고 있으면 내가 왜 마나를 먹었겠니?
난 저 상인이 엄청나게 강한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마나 통로가 막혀 있는 것도 한 번에 못 보나 보다. 4황자의 기억에 따르면, 연륜이 있거나 꽤 강한 마법사는 다른 이의 마나 흐름이 보인다던데.
난 생각보다 허접한 상인이 못마땅해 혀를 찼다. 상인은 내게서 마나 회로를 확인하고 싶은 건지 가까이 다가왔다. 곧이어 내 명치 부분을 빤히 바라보다 신기해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 이것 봐라? 구멍이 막혀 있네?”
“그게 보여요?”
“당연하지. 아까는 관심이 없어서 안 봤지만, 자세히 보면 보여. 그나저나 너 잘도 살아 있네.”
상인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내 상태를 신기해했다. 상인의 자극적인 말에 물건을 구경하던 젠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상인을 향해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그의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잠깐만…. 이제 보나 마나 생성을 못 하는 애네?”
맞다. 필릭스나 보통의 마법사들은 심장에서 마나를 만들어 내서 회로를 통해 마나가 흐른다. 하지만 나는 보통 마법사들과 다르게 마나를 만들지 못하고, 회로도 막혀 있다.
“너 마법사 아니구나? 근데 어떻게 마나를 가지고 있지? 너 혹시 마나 마셨냐? 아니지, 마셔도 회로가 없으니 못 버틸 텐데….”
꽤 최근에 마시긴 했지.
“제가 그런 걸 어디서 구해요.”
“마법사를 죽이면 그 몸에 담겨 있는 마나를 채취할 수 있어.”
뭐…?
경악하는 내 표정을 본 상인이 별일이 다 있다는 듯 되물었다.
“뭐야, 모르는 거야?”
“보통 모르죠.”
“그런가…?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면 마법사를 죽이는 게 가장 빠른 방법, 보통은 시간을 들여서 자신의 몸에 있는 마나를 빼지. 쓸데도 없고 귀찮아서 안 하지만. 아무튼, 너 마나 마신 거 아니야? 누가 줬을 수도 있잖아. 잘 생각해 봐.”
깜짝이야. 마법사를 죽여야만 마나가 나오는 건 줄 알고 놀랐다. 내게 마나를 준 4황자의 어머니는 누구를 죽일 정도로 못된 사람은 아니었고, 필릭스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을 죽여서 얻은 마나라면 찝찝해서 먹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이게 뭔데요.”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너 진짜 신기하다. 일반인이 어떻게 마나를 품고 있는 거지?”
빨리 나가 노반을 쫓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 쓸데없는 대화를 마치고 나가려 했지만, 내 희귀한 상태가 상인의 흥미를 끌었는지 상인은 우리를 쉽게 보내 주려 하지 않았다.
“저도 몰라요.”
“생각해 봐. 마나를 생성할 수 없으면 회로도 없어야 해. 그치만 넌 회로는 있는데 마나를 생성할 수 없잖아? 근데 마나가 있어. 어떻게 그러지?”
“당신 말대로 마나를 먹었나 보죠.”
“아니아니, 그럼 죽었겠지. 일반인이 마나를 먹으면 백이면 백 전부 죽어.”
상인은 자신의 정보를 확신하고 있는 듯 망설임 없이 단언했다. 회로가 막혀 있고, 마나 생성도 못 하는 나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마나가 있고. 저 상인의 말에 의하면 나는 죽었어야 할 텐데.
“버틸 수도 있잖아요.”
“일반인이 마나를 먹으면 평범한 몸이 마나를 못 견디기도 하고, 만에 하나 버틴다 해도 회로가 없으니 마나가 고여서 죽어.”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런데, 마나가 있으면서 회로가 막혀 있는 넌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마나가 고이면 마법사도 버티기 힘이 든다니까?”
상인은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난 돌연변이인가. 마나가 생성되는 마법사도 아닌데 회로가 있고, 회로가 막혀 있는 일반인 주제에 마나에 타 죽지 않고. 이게 뭐야.
“그럼 전 뭘까요.”
“내가 어떻게 알아. 운이 좋은 일반인이거나, 운이 나쁜 마법사겠지.”
“….”
“네가 뭐든 살아 있는 게 좋은 거 아니냐.”
상인의 말대로 살아 있는 게 좋은 거다. 마나가 생성되지 않으니 회로가 있을 필요 없고, 마나가 고여 있는 것 때문에 죽는다면 진작 죽었어야 했다. 내 몸은 보통과 다르게 이상하긴 하지만 문제없다. 그럼 된 거다.
“아무튼 문제없으니 됐죠. 이거 얼마예요?”
“이게 뭔지는 알고 사는 거냐?”
“아, 모른다고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허접한 물방울 목걸이가 뭐길래 저러는 거지? 목걸이를 꺼림칙하게 바라보고 있자, 상인은 그런 취급을 받을 물건이 아니라는 듯 자만했다.
“이건 말이다, 연인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물건이랄까. 여러모로 편리한 물건이지. 너 사귀는 도련님은 있냐?”
사귀는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젠을 바라봤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거 비슷하지 않아? 썸 같은 그런 거….
젠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듯한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상인에게 퉁명스레 물었다.
“사귀는 도련님 없으면 안 팔게요?”
“응.”
“있어요.”
“누구? 옆에 호위 기사?”
상인은 음흉한 눈빛으로 나와 젠을 번갈아 봤다. 이제 보니 연륜 있는 강한 마법사는 개뿔, 그저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저씨다. 우리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자 제 입맛대로 받아들인 건지 상인은 홍홍홍 웃으며 즐거워했다.
“뽀뽀는 했어?”
“손은 잡았어요.”
“아, 사귄 지 얼마 안 됐구나? 좋을 때다~.”
“그래서 이건 어떻게 쓰는 건데요.”
“옆에 똑같은 거 있었지? 그거랑 한 쌍이야. 가져와.”
상인의 말에 젠은 목걸이를 찾았던 곳에서 똑같은 걸 가져왔다. 이 허접한 목걸이가 세상에 두 개나 있다니.
“원래는 눈물로 하는데, 눈물보단 피가 더 효과가 좋아. 뭘로 할래?”
“이게 무엇인지 설명부터 해 주시겠습니까.”
여태껏 한발 물러나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던 젠이 상인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상인은 조금 놀란 듯 젠을 바라보았다.
“와, 너네 둘 조합 되게 웃기다. 한 명은 인간도 마법사도 아니고, 한 놈은 인간을 초월했네.”
나와 젠을 놀리는 건지 정말로 우리를 보고 놀라는 건지, 손뼉까지 치며 하는 상인의 말에 무표정이던 젠이 상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상인이 피식 웃으며 우리를 향해 말했다.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니야. 정말 놀라서 그런 거니까 너희가 이해해. 이런 곳에 처박혀서 나이를 먹고 있으니 신기한 일을 접할 순간이 거의 없거든.”
인생을 다 산 듯한 상인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미네르바가 떠올랐다. 미네르바와 대화를 나눴을 때 그녀는 가끔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다면서 하늘을 보며 옅게 웃곤 했었다. 미네르바 잘 지내고 있을까. 많이 지쳤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미네르바를 생각하며 사색에 빠져 암울해져 있을 때, 그것을 깨우는 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다짜고짜 우는 것도 그러니 혈액으로 하자. 괜찮지?”
“설명이 필요하다 말했습니다.”
“아아, 맞다. 그랬지.”
요새는 잘 보지 못했던 기사 같은 젠의 말에 뜻 모를 소름이 돋았다. 낮은 목소리, 미간을 찌푸렸는데도 잘생긴 얼굴, 금방이라도 칼을 뽑을 것 같은 자세가 너무너무 멋있어 소름이 돋았다. 아, 이건 너무 콩깍지였나….
젠의 견고한 태도에 상인은 짧은 사과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자, 이 이야기를 하려면 옛날 과거의 영광부터 말을 해야….”
“시간이 없으니 요점만 말해 주세요.”
“에잉, 쯧. 재미없게…. 아까도 말했듯이 지켜보고 싶은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는 목걸이야. 아크레나가 자신의 애인을 위해 만들었던 첫 작품이자 졸작이지. 이 몸이 조금 손을 봐주긴 했지만 졸작인 건 변하지 않아.”
아크레나…? 내가 아는 그 아크레나?
“아무리 반 마법사라고 해도, 아크레나는 알고 있겠지?”
“모르면 바보 아니에요? 시대를 대표하는 대마법사잖아요.”
“그 녀석이 그 정도야? 나한테 찍소리도 못했던 놈인데.”
저 상인이 아크레나와 아는 사이라면…. 뭐야, 왜 이렇게 젊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태평한 상인을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나?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아크레나의 제자라고 생각해.”
상인은 자신을 아크레나의 제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반대 아니야? 스승이 제자에게 찍소리도 못했다고?
“아가씨, 크로스반 영주가 말했던 아크레나의 제자가 저자 아닐까요?”
헐, 대박.
예사로운 젠의 말에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 들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맞네, 그렇겠네. 기사의 나라인 프레오나에 마법사가 오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아무리 마법사라도 아크레나와 관련되기도 쉽지 않지.
“크로스반? 아, 그 북쪽 땅 말인가?”
상인은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크로스반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한때 거기서 지냈었지. 마물 몇 마리 없애 주고, 거기 영주가 머물 집을 줘서 답례로 물건도 몇 개 줬었…. 아가씨는 그런 변방의 땅도 알고 있는 거야?”
귀해 보이는 아가씨… 굳이 따지자면 도련님이지만, 그런 사람이 험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어떻게 알고 있냐는 뜻이었다.
“그곳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이곳은 잠시 일이 있어서 온 거예요. 그나저나 아크레나의 제자가 왜 프레오나에서 썩고 있는 거예요?”
“아, 세네카는 정떨어졌거든. 질리기도 하고.”
상인은 그리 말하며 모든 걸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유라면 인정. 그 땅에서 사는 놈들이 좀 그렇지.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샌다. 얼른 노반을 따라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