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2)
“그래서 이건 어떤 물건인데요.”
조금 신경질적인 내 질문에 상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해 줬다, 드디어.
“상대의 상태를 알 수 있는 목걸이야. 상대의 기분이 좋을 때는 이 안에 들어간 피가 상대의 기분만큼 요동치고, 슬프거나 우울해지면 빙빙 돌았었나…? 화나면 삐쭉거리고. 기분 탐색기야.”
오, 신기하다.
“단점이라면 엄청나게 싸우는 거지. 기분 좋다고 했는데 빙빙 돌거나, 뽀뽀했는데 삐쭉거리면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되지.”
“그렇겠네요.”
“장점은… 음… 생사를 알 수 있다는 거? 상대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바짝 말라. 죽으면 유리가 깨지고.”
그런 좋은 기능이 있으면 바로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젠이 토벌을 나가면 알 수 없는 안전을 그렇게라도 확인해야 하니까.
“개시하고 반년 정도밖에 못 써. 아크레나가 평생 쓸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걸 평생 쓴다 생각해 봐, 머리 아프지.”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요.”
“아가씨, 진지하게 생각해 봐. 애인의 감정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게 없다니까?”
“애초에 거짓말을 안 하면 되죠.”
쯧쯧. 상인이 혀를 찼다. 그러곤 나를 향해 연애 한번 안 해 본 풋내기라며 놀렸다.
“아직 어리구나. 하긴, 이런 건 직접 겪어 봐야 알지.”
“애초에 실망할 짓을 안 하면 되는 거라니까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아가씨, 이 늙은이가 하는 말 잘 들어 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한 부분을 숨기고 싶어 해. 그게 자존심일 수도 있고,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일 수도 있지.”
상인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편한 자세를 취한 게 딱 봐도 이야기가 길어질 느낌이다. 하아…. 나 빨리 가야 한다니까.
“그렇지만 상대는 숨기는 걸 싫어해. 뭐든 자기랑 상의했으면 하고, 기쁜 감정이든 슬픈 감정이든 나눠 가졌으면 하지.”
“….”
딱 젠이다. 젠은 내가 감정을 숨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나 혼자 무모한 짓을 할 것 같아 두렵다며 힘에 부치는 일이거나 힘들면 바로 말해 달라 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지만 난 숨기고 싶어. 왜? 자존심 때문이거나 또는 민폐를 안 끼치려고. 숨기면 해결되는 일도 분명 있어. 하지만 이런 요상한 걸 가지고 있으면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내 감정이 지금 어떤지’ 상대는 다 알게 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돼?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이렇게 된다니까?”
상인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쳤다. 이 목걸이에 맺힌 게 많은 건지 보는 내가 안쓰러웠다.
울분에 찬 상인의 외침이 계속되자 나는 서서히 감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젠은 상인의 생각과 철저하게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내가 그동안 많이 숨기긴 했지, 무모한 일도 꽤 하고….
“아무튼, 이런 걸 평생 써 봐야 좋을 게 없어. 반년이면 충분해.”
“그렇겠네요.”
“있는 거 다 주세요.”
젠이 상인을 향해 가지고 있는 목걸이를 전부 달라고 했다. 날 그 정도로 못 믿는 거야…?
“하, 하나만 있어도 되지 않을까?”
“아뇨,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네요. 아가씨는 생각보다 고집이 세시니까요.”
젠은 진심인 듯 상인을 향해 재고가 있는 대로 달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야. 그리고 이런 거 오래 쓰면 좋지도 않아. 나중 되면 상대의 말과 행동보다 목걸이를 더 믿게 되니까.”
“….”
“너도 아가씨 같은 풋내기구나? 둘 다 귀엽네.”
상인은 크하하 웃으며 풋풋한 우리를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러니까 진짜 늙은이 같네.
젠은 상인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나중 가면 상대보다 목걸이를 신용하게 된다는 상인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둘 다 손 줘 봐.”
상인은 마법으로 엄청나게 긴 바늘을 만들어 냈다. 그러곤 나와 젠의 검지손가락을 푹 찔렀다. 아악!
따끔을 넘어선 경악스러운 아픔에 눈이 찌푸려졌다. 당장이라도 상인 아저씨의 머리카락을 전부 뜯어 놓고 싶었지만, 나와 다르게 젠은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러니 내가 과장하는 것 같잖아. 안 되겠다. 이건 컴플레인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아프네.
“아프잖아요!”
“아프게 찔러야 많이 나오지. 찔끔찔끔 나와서야 하루 온종일 걸려.”
상인은 우리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각각의 목걸이 안으로 흘려 넣었다. 서로의 피로 물방울의 절반을 채운 다음 상인은 손가락을 좌우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무음 마법을 쓴 것 같다.
무음 마법을 할 정도면 필릭스와 대등한, 아니 필릭스보다 더 강한 마법사일 거다. 하기야, 자칭인지 뭔지 대마법사 아크레나의 제자라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됐다. 이건 아가씨 거, 이건 호위 기사 거.”
상인이 건네준 물방울 목걸이는 혈액의 붉은빛을 반사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를 넣어서 그런지 아까와 같은 마냥 허접한 목걸이가 아닌 것 같다. 느낌 있는데?
“아가씨, 지금 기분 어때?”
“조급해요.”
우리 여우 찾으러 가야 한단 말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봐, 살짝 요동치지?”
젠이 가지고 있는 목걸이 안에 담긴 피가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을 마구 던진 듯 퐁퐁 튀기며 올라왔다.
“잘 작동하네. 호위 기사는 지금 기분 어때?”
“평범합니다.”
젠의 말대로 내가 가진 목걸이 안에 담긴 피는 그저 잠잠했다.
“사실 이걸로 자잘한 기분은 알 수 없어. 거대한 감정만 알 수 있지.”
“그럼 저건 왜 반응을 하는 건데요?”
“네가 어지간히 조급하다는 거지.”
아, 그렇구나.
“문 열어 줄게. 가도 돼.”
“아직 값을 지불 안 했는데요?”
“재밌는 거 보여 줬잖아.”
상인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상인은 나와 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인간도 마법사도 아닌 놈, 인간을 초월한 놈. 쉽게 볼 수 없는 조합이잖아?”
“놈…?”
“아가씨 아닌 거 다 알아.”
상인이 말을 마치자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곤 강한 바람이 불어와 나와 젠을 눈 깜짝할 새에 문밖으로 밀어냈다.
“즐거웠어. 기회 되면 또 만나자.”
상점의 문이 닫히고 상인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문전 박대까지는 아니지만, 강제로 쫓겨난 기분에 순간적으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특한 사람이네….”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어요.”
젠이 담담하게 상인에 대해 말했다. 젠이 강하다고 한 사람은 처음 아닌가? 그동안 특별히 젠과 비견될 적수가 없기는 했지만. 오우거도 몇 분 안 돼서 간단히 잡는 젠이 자신을 늙은이라 칭하는 상인을 강하다고 말하니 조금 의외였다.
“그래…? 젠이 못 이기는 사람이야?”
“음… 제대로 싸우면 피해는 입겠지만 제가 이길 것 같아요.”
“이기는 건 좋은데, 피해 입는 건 안 돼. 난 네가 다치는 꼴 못 봐. 쟤 좀 세 보인다 싶으면 버티지 말고 도망가, 알았지? 도망가는 건 창피한 게 아니야. 힘들 걸 뻔히 알면서 멍청하게 달려드는 게 창피한 거야.”
“네, 도망갈게요.”
나는 ‘명예보단 목숨이 중요하다’라고 열과 성을 다해 외쳤다. 그에 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내 마음을 달래 줬다.
토벌에 나갔을 때도 제발 위험하다 싶으면 뒤로 빠졌으면 좋겠다. 토벌대를 지휘하는 자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어쩌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너무 어두워졌다.”
겨울이 다가와 해가 빨리 지는 것도 있고, 상점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걸음을 서둘러 약속했던 카페로 갔다. 카페의 문을 열자 방금 갈았는지 원두 향이 확 끼치며 갓 내린 커피의 고소한 향이 났다.
카페 구석, 기다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마린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내가 들어오자마자 달려와서 반겼을 텐데 보이지 않는 노반이 어디 있나 찾았더니, 노반은 독서를 하고 있는 마린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황자님.”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뗀 마린이 살며시 웃으며 반겨 줬다.
“마린!”
“구경은 잘하셨나요?”
“응, 중간에 일이 있어서…. 노반은 아무 일 없이 잘 왔어?”
고롱고롱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노반을 안아 올리려 했지만, 내가 들기에 꽤 무거워 안지 못했다. 쩝. 내 모습을 본 젠이 다가와 가뿐하게 노반을 들어 안았다. 운동해야지….
“네, 중간에 미르 님의 기운이 사라졌다고 말하긴 했지만, 젠 님과 함께 계셔서 크게 걱정은 안 했다고 하더라구요.”
“알고 있었구나….”
노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굳이 그 해괴한 마법 상점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는 말이다.
“여관은 따로 잡아 놨습니다. 오늘은 거기서 주무시면 될 것 같아요.”
“여관?”
마린은 카페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곤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다며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지금 시간이면 황궁 문을 닫았을 겁니다. 황자님이시니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소란스러워질 테니 하룻밤 주무시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좋은 생각이네. 고마워, 마린.”
오늘 여관에서 자고 내일 황궁으로 돌아가면 텟이 시끄러울 것 같지만 괜찮다. 젠을 앞에 세워 두면 텟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니 젠만 있으면 멀쩡한 귀가 나가떨어질 일은 없었다.
닫을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우리를 위해 지금까지 카페 문을 열어 준 이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조금의 팁도 냈다. 밖으로 나가니 찬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여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얇은 피부는 찬기를 버티지 못하고 점점 붉어졌다. 온몸이 점점 시려 올 때 젠이 내 앞에 서서 찬 바람을 막아 줬다.
“안 추워?”
“네, 전 괜찮아요. 마린, 아공간 주머니에 로브랑 담요가 있을 거예요. 꺼내 주시겠어요?”
마린은 젠의 말대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담요와 로브를 꺼냈다. 그리고 젠의 부탁에 따라 나에게 두꺼운 로브를 걸쳐 줬다. 나만 입기 뭐해 마린에게 양보했지만 준비성이 철저한 마린은 애초부터 따뜻한 털 로브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미 입고 있는 로브 위에 한 겹 더 껴입었다.
젠은 마린에게 건네받은 담요로 안고 있던 노반을 돌돌 싸맸다. 이렇게 보니 갓난아기를 포대기로 둘러 싸맨 것 같다.
“젠, 진짜 안 추워?”
“네. 전 원래 익숙하기도 하고, 아까 그 대마법사의 제자가 했던 비유에 따르자면, 초월을 하고 난 뒤부터는 추위나 더위를 잘 타지 않아요.”
“오… 그렇구나.”
걱정하는 나를 위해 주는 변명이 아니라 정말 그럴듯했다. 인간을 초월한 자를 소드 마스터라 부르나? 젠은 그거랑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런 경지에 오르면 추위나 더위쯤은 체온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