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93화 (93/227)

93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4)

“방금 이프리트 경이 전하를 향해 미소를 지었습니다!”

봤어.

레오스는 젠의 미소를 받은 나보다 더 신이 나서는 상황을 중계했다. 꽤나 실력 있는 기사들이 쉴 틈 없이 압박해 오는 상황이라 절대 여유를 부릴 수 없는데 기사들의 검격을 가뿐하게 받아치는 검술 실력과 그런 와중에도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미소까지 날려 주는 대단함에 또 한 번 놀랐다나 뭐라나.

점잖고 엄숙했던 레오스는 가벼우면서 묵직한 젠의 움직임을 본 다음부터 자신의 안에 있는 기사의 피가 들끓어 오른다며 연신 감탄을 했다.

“다치진 않겠지?”

“예. 다치는 건 이프리트 경이 아닌, 그에게 도전하는 기사들일 겁니다.”

젠은 아무런 보호구도 없이 겨우 검 하나로만 기사들을 상대했다. 쟤들은 다굴을 해도 젠 하나를 못 이겨? 실력 있는 기사라며? 갑옷이나 검, 방패 같은 장비도 지들끼리만 짱짱하게 챙겼으면서. 저건 기사의 수치다. 기사는 무슨, 글러 먹었네, 글러 먹었어. 젠이 이길 거라 확신하는 레오스 덕에 전보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지켜봤다.

공격하던 기사들이 지치면 방어를 하던 기사들이 공격했다. 지친 기사는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가 방어를 했다.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피할 구석이 없는 단단한 공방전이었다.

하지만 젠은 그에 밀리지 않고 차분하게 검을 휘둘렀다. 몰려 있는 기사들 사이에 검을 찔러 넣어 사이를 벌리고, 그 틈을 이용해 가까이 다가오는 기사들을 발로 차 넘어트렸다. 넘어진 기사는 다른 기사들의 경로를 방해했고, 덕분에 망가진 대형이 젠의 승리를 이끌었다. 다굴에는 장사 없다더니, 이런 경우도 있었네. 지켜보는 나도 지치는데 당사자인 젠은 지치지도 않는지 호흡과 움직임이 처음과 다름없이 멀쩡했다.

“괴물이네… 괴물이야.”

“저게 사람이야?”

“몇 시간째지?”

“몰라, 어두울 때부터 시작했으니 꽤 됐지.”

지켜보는 기사들도 젠의 괴물 같은 체력에 경탄을 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접전에 내 허약한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때쯤, 용케 알아차린 기사들이 간이 의자를 대령했다.

젠과 다굴 기사들의 접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군중 기사들은 한번 나를 인식하자 화들짝 놀라며 당황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점점 고조되는 젠과 전투 기사들의 접전에도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내가 불편하지 않게 꼼꼼히 신경 썼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내 옆에 서서 날아오는 흙먼지를 누가 대신 맞아 줄 거냐는 이야기부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기 위한 양산은 누가 들고 있을 것인지 같은 쓸데없는 신경전이 오갔다.

“팔 힘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 그러니 내가 양산을 들어야겠지!”

“팔 힘이 강한 건 중요하지 않아. 황자님의 시선에 거슬리지 않게 얼마나 감각 있게 드느냐 마냐지!”

“난 여기서 제일 덩치가 커! 흙먼지든 뭐든 다 막아 드릴 수 있다고!”

“난 날아오는 흙먼지를 전부 빨아들일 수 있거든? 넌 할 수 있냐?”

젠을 둘러싼 전장 하나, 나를 둘러싼 전장 하나, 이곳엔 총 두 개의 전장이 생겼다. 한껏 고조되어 있는 기사들을 말려 줄 레오스는 날 이렇게나 신경 써 주는 기사들이 있다며 기뻐하곤 자신의 기사단을 마저 훈련시켜야 한다며 가 버렸다. 덕분에 나는 나를 두고 싸우는 이 기사들의 싸움을 직접 말려야 했다.

“이러지 않아도 괜찮네만….”

“아닙니다! 황자님의 피부를 상하게 할 순 없습니다!”

“맞습니다! 제발 들고만 있게 해 주십시오!”

“흙먼지는 제가 전부 흡입하겠습니다!”

아무나 알아서 잘해 주면 안 될까? 나는 누가 양산을 들고, 흙먼지를 막든 먹든 전혀 관심이 없거든.

점점 커지는 소리에 잘 자고 있던 노반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완벽하게는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써 줄까 고민했지만 슬슬 일어날 때가 된 것 같아 굳이 마법을 쓰진 않았다. 기사들의 소란을 가만히 내버려 두자 기다렸다는 듯 노반이 잠에서 깼다.

“낑…?”

돌돌 감싸져 있던 포대기 위로 노반의 작은 얼굴이 뿅 하고 나왔다.

“아, 노반 깼…!”

잘 잤냐는 인사를 하기 위해 노반을 향해 고개를 숙였을 때, 가까운 거리에서 챙! 하고 날붙이가 멀리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확 들자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젠이 서 있었다.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바라봤다. 그와 눈을 맞추자 다급했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안정을 찾아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황자님!”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내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 안전을 확인했다. 이게 뭔 일이래.

“컁!”

그때 품에 안겨 있던 노반이 젠을 향해 강하게 짖었다.

“노반?”

카랑카랑 사납게 짖으면서도 노반의 작은 몸은 젠에게서 멀어지려 내게 착 달라붙었다. 뭔가 해서 주변을 살피니 전에 봤던 이상한 오러가 젠의 검을 휘감고 있었다. 아, 노반은 저거 무서워했었지…. 달라붙는 노반을 안아 주며 얼른 안정을 찾도록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줬다.

“황자님 다치신 곳은…!”

“난 괜찮네. 그대들은 괜찮은가?”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황자님께서는 많이 놀라셨을 텐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칼이 날아와선…. 이프리트 경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날아오는 흙먼지를 전부 흡입하겠다 말했던 기사가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해 줬다.

우리 쪽에서 소리가 커지자 젠을 다굴시키던 기사 하나가 정신이 흐트러져 손을 놓았고, 그의 손을 떠난 날카로운 검이 내 쪽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왔단다. 그때 기사 여럿을 상대하던 젠이 오러를 꺼내 모두를 한 방에 쓰러트리고 무서운 속도로 뛰어와 쳐 냈다…까지가 기사의 증언이었다.

완전 소설이네. 다급하게 뛰어오는 젠을 봤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봤던 그 표정이 얼마나 멋있는지…는 둘째치고 일단은 젠을 진정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

“젠, 진정해.”

“잠시 놀랐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젠은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의 검을 휘감고 있는 오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아마 검집이 망가져서일 겁니다.”

“응? 검집?”

랄프를 손봐 주다 금이 가 버린 그 검집? 오러가 사라지지 않는 게 검집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젠은 검을 크게 휘둘러 오러를 떨쳐 냈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오러가 젠의 손짓 한 방에 바람같이 사라졌다.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젠의 말대로 상황은 끝났다. 젠과 교전하던 기사들은 전부 바닥을 기고 있었고, 내 주변을 배회하던 기사들도 입을 다문 채 경이로움을 넘어선 공포를 느낀 눈빛으로 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기사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젠은 산뜻하게 웃으며 포대기로 감싼 노반을 안아 들었다. 이곳에 더 있기 싫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응, 가자.”

젠의 뜻에 따라 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내 곁에 서 있었던 기사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래, 이거지. 이런 게 바로 신분 사회의 참맛 아니겠어?

젠은 멀쩡히 서 있는 기사 중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기사에게 간단히 훈련 명령을 내리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훈련 감사했습니다!”

등 뒤에서 들리는 기사들의 우렁찬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훈련장을 떠났다.

올 때는 걸어왔고, 갈 때도 걸어간다. 계속 앉아 있어서 걷는 건 상관없지만 젠이 나와 한 발자국 떨어져 걸었다. 옆에서 걸었으면 좋겠지만 내 생각을 해서 떨어져 걷는 걸 거다.

“옆으로 오면 안 돼?”

“뒤에서 걷겠습니다.”

“말투는 왜 그래? 젠이 극존칭하면 어색하단 말이야.”

로테 별궁 정원에서 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젠은 내게 극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말 가끔 신분을 신경 써야 하는 자리에선 사용했지만 그때가 지나면 어김없이 평소의 말투로 돌아왔다. 남들이 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둘이 있을 때는 괜히 서운하다. 내가 서운한 티를 내자 젠은 평소처럼 부드럽게 달래 줬다.

“이곳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니까요. 별궁이랑은 다르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아. 귀족들 사이에서 내 이미지는 벌써 망했을 거야. 랄프 조져 놓은 게 엊그제인데 뭐. 그런 거 신경 썼으면 그런 짓 못 하지.”

4황자는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벌써 소문이 다 났을 거다. 로테 별궁에서 일하는 시종이나 시녀들의 입을 타고 날랐을 테니까.

“아닐 거예요. 사용인들은 주인의 말을 전하면 안 되니까요.”

“주둥이 가벼운 놈이 하나 있잖아. 이미 다 퍼졌을 거야.”

“…그렇겠네요.”

그 주둥이 가벼운 놈은 텟을 뜻한다. 일단은 내 시중보단 황제의 명을 따르는 놈이니 신뢰도가 아주 낮다.

“그나저나 옷은 왜 그런 걸 입었어?”

젠은 평소 입는 단조로운 튜닉 셔츠가 아닌 내가 입을 만한 포엣 셔츠를 입었다. 손을 움직이면 소매도 함께 펄럭여서, 아까 전 기사들과 훈련할 때 굉장히 불편했을 거다.

“원래는 한나를 만나려고 했어요.”

“한나?”

“네, 한나는 제가 망가지는 걸 좋아하니까요.”

응…? 망가지는 걸 좋아한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제게 이런 셔츠는 어울리지 않잖아요. 한나는 제가 창피해하는 걸 좋아해요.”

“아… 그래서 이걸 입은 거야? 안 어울리니까?”

“네, 아마 좋아할 거예요.”

아마 아닐 거다. 포엣 셔츠든 튜닉 셔츠든 젠이 입으면 광대 옷조차 제복을 입은 것처럼 빛이 날 거다. 물론 광대 옷을 입기 전에 다 찢어 버릴 거지만.

“그럼 오늘 한나 만나는 거야?”

“네, 한나에게 서신이 왔어요. 도망가면 각오하라고 하더라고요.”

“도망 못 가겠네.”

하하. 젠은 포기한 듯 허탈하게 웃으며 안고 있는 노반의 이마를 살짝살짝 건드렸고, 노반은 머리를 털어 젠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럼 나는 별궁 탐사해야겠다.”

젠은 한나를 만나야 하니 시간이 없을 테고, 나는 젠에 비해 시간이 많은 편이니 타루스가 말했던 그 지하실이나 찾아볼까. 밑져야 본전이니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때 젠이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 미르 님도 저와 같이 가셔야 해요.”

“응?”

“한나가 보낸 서신에 미르 님도 함께 오라는 추신이 달려 있었어요. 많이 바쁘신가요?”

한나가 먼저 날 보자고 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많이 떨렸다. 곧 만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만난다니 조금 불안했다. 시누이를 만나는 기분이 이런 건가 보다.

“아니, 안 바빠. 만나야지…. 나 혼나지 않을까?”

“미르 님을 어떻게 혼내겠어요.”

“아니, 그래도. 자기 오라버니 고생시키는데 밉진 않을까?”

“글쎄요… 한나는 절 생각해 줄 정도로 심성이 고운 애는 아니라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은 젠은 사람이 보이자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떨어져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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