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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94화 (94/227)

94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5)

별궁으로 돌아온 우리는 노반에 의해 한방에 모였다. 주방에 있던 마린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올라왔다.

“무슨 일이야?”

“어제 선물 산 거 주려고!”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노반은 우리에게 직접 고른 선물을 주는 게 기쁜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런 노반을 보자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미안했다.

우리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큼직한 소파에 둘러앉아 곧 시작될 노반의 선물식을 기다렸다.

“자, 이건 마린 거. 마린은 어제 미리 봤었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은 노반은 한참을 뒤적거리다 마린에게 줄 선물을 꺼냈다. 선물을 받은 마린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노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예쁘네요. 고마워요, 노반.”

마린을 위한 선물은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얇은 단검이었는데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크기라 티 나지 않게 몸에 지닐 수 있는 좋은 검이었다.

“신경 써서 고른 거야. 그게 제일 이쁜 거였어.”

노반은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다시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렸다.

“이상하다….”

“도와줄까?”

“아니야! 내가 찾을 수 있어.”

조금 더 뒤적거리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표정이 밝아졌다. 찾고 있던 걸 찾았나 보다.

“자! 이건 젠, 네 거야.”

노반은 손가락 길이 정도의 작은 목각 인형 세 개를 꺼냈다. 이렇게 작으니 별게 다 들어 있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찾기 애먹었을 거다. 노반은 세상에서 제일 센스 있는 선물을 산 듯 기세등등했다. 젠이 노반에게 받은 목각 인형을 한 손에 전부 올리고서 물었다.

“이게 저한테 필요할까요?”

“너 잠시 떠난다며. 이거는 미르야. 눈동자가 닮았지? 미르가 더 예쁘긴 하지만. 그리고 이건 마린, 이건 나야.”

노반은 젠에게 건네준 목각 인형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밝은 노란 머리 색과 고양이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려진 목각 인형은 나고, 고동색 머리에 웃고 있는 목각 인형은 마린, 초록색에 잔뜩 화가 나 있는 목각 인형은 노반 자신이란다.

“어때, 고맙지?”

“네, 유익한 선물이네요.”

“알아. 고르느라 시간 좀 걸렸어. 최대한 비슷한 걸로 골라 봤는데 그런 거밖에 없더라.”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싱긋 웃은 젠이 노반에게 고맙다 말했다. 그에 노반은 턱을 들어 올리며 별거 아니라고 콧방귀를 뀌었다.

“다음은 미르 거야. 보고 깜짝 놀라지 마~.”

노반은 보고 깜짝 놀라지 말라며 상큼하게 말해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그러곤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지 1초도 되지 않아 바로 꺼냈다. 노반이 짜랑짜랑 소리가 나는 수박 크기의 자루를 내게 건네줬다.

“이게 뭐야?”

건네받은 자루를 열자 노반을 제외한 이곳의 모두가 상상을 뒤엎는 선물에 깜짝 놀랐다.

“헉!”

“허….”

“….”

“어때, 나 최고지?”

노반이 내게 준 자루 안의 선물은 금화였다. 선물을 돈으로 준 거다.

“미르가 돈은 적당히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랬…었나…?”

“응.”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 적당히는 있어야 한다고 했지.

“그래서 이걸 준 거야? 이건 ‘적당히’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자루 안에 들어 있는 금화를 짤랑거리며 물었다. 이 정도 금화면 평민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금액일 텐데 어디가 ‘적당히’일까. 게다가 이 많은 금화는 어디서 구한 거지?

“그나저나 금화는 어디서 구한 거야?”

“미르가 나한테 줬던 빨간 보석이랑 바꿨어. 상인들이 너도나도 사겠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제일 많이 주겠다는 상인이랑 바꿨지.”

경매를 했다는 이야기구나…. 우리 노반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 잘하네.

“근데 왜 금화야?”

정말 순수한 의문에 노반을 바라봤다. 그에 노반이 선물을 금화로 준 이유를 설명해 줬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돈이 많으면 원하는 걸 전부 살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해맑은 노반의 미소에 난 할 말을 잃었다.

“그….”

“돈은 많으면 좋아요. 그렇지만 단순히 많기만 하면 안 돼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패닉이 온 와중, 젠의 담담한 목소리가 집 나간 정신을 다시 데려와 줬다. 너무 많은 건 좋지 않다는 젠의 말에 노반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인간은 시기, 질투란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노반의 말대로 돈이 많으면 원하는 걸 전부 살 수 있죠. 하지만 그걸 갖지 못한 사람들은 노반에게 시기 질투를 할 거예요.”

“왜?”

“자신들은 갖지 못하니까요. 노반의 돈을 강탈해 가려 할지 몰라요.”

“왜? 훔치지 말고 자기가 벌면 되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인간은 신분과 직업에 따라 버는 돈이 달라져요. 모든 사람이 같은 신분, 같은 일을 할 수 없으니 경제적 차이가 생기는 건 당연하죠.”

젠은 사회 구조를 이해 못 하는 노반에게 빈부 격차에 대해 설명했다. 나와 마린은 노반에게 받은 선물을 구경하며 젠의 틈새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받은 금화를 다 세면 끝나 있지 않을까? 금화 한 개, 두 개….

“그냥 모두가 돈이 많으면 안 돼? 프레오나는 제국이라 돈 많을 거 아니야. 제국민들에게 똑같이 나눠 주면 되잖아.”

“그렇게 되면 프레오나는 경제적으로 뒤처질 거예요.”

“왜?”

금화 열 개.

“경제의 성장은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왜?”

“사람들은 갖고 싶은 걸 갖기 위해 노력하니까요. 경쟁하며 노력할수록 경제가 발전하는 거죠.”

“왜?”

금화 서른 개.

“신분 차는 있겠지만, 같은 선상에 선 사람이라면 다른 이들보다 부유하게 살고 싶어 하니까요.”

“왜?”

금화 쉰 개.

“다른 사람들도 노반의 말대로 부유한 자가 행복하다 생각하니까요. 평민은 물론 귀족들도 부유한 사람이 유리해요.”

“왜?”

금화 여든 개.

“부유함은 권력 중 하나예요. 권력이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패가 많아져요.”

“왜?”

금화를 백 개까지 세었음에도 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관심을 갖지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노반은 친절하게 알려 주는 젠을 향해 계속 ‘왜?’라고 물었는데 이유가 궁금한 것보단 그저 젠을 놀리고 싶어서 하는 말 같았다.

“그 질문의 답은 노반이 사 온 책에 나와 있을 거예요. 열심히 읽고 공부해서 저한테 알려 주세요.”

젠이 점점 ‘왜?’ 빌런이 돼 가는 노반에게 어제 사 온 책을 읽고 공부하라고 하자 즐거워하던 노반이 잠잠해졌다. 그러게 1절만 하지 그랬어, 우리 귀요미.

“으….”

“내일까지예요.”

얼굴을 잔뜩 구긴 노반을 향해 젠이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내일? 내일은 너무 촉박하잖아!”

“그래요? 노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알았어요. 그럼 이틀 뒤는 어때요?”

젠은 기함을 하는 노반에게 선심 쓰듯 기간을 늘려 줬다. 그래도 노반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4일!”

“너무 길지 않아요?”

4일은 필요하다 말하는 노반과 4일은 너무 길다는 젠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둘 다 고집이 어마어마해 쉽게 끝이 나지 않았다.

“4일!”

“너무 길어요.”

“나 안 해!”

너무나도 완고한 젠의 기세에 노반은 최후의 수단인 포기를 선언했다. ‘나 안 해!’라며 주먹 쥔 손을 소파 팔걸이 위로 내리쳤다.

팡!

우렁찬 선언과는 달리 굉장히 귀여운 소리였다. 푹신푹신한 천을 덧댄 팔걸이가 낸 귀여운 소리는 지루했던 나와 마린을 웃게 했다.

“정말 안 할 거예요?”

“안 해!”

“어쩔 수 없네요. 노반은 산 중턱에 지어진 오두막에 숨어서 살아야겠군요.”

응…? 산 중턱에 지어진 오두막?

“끄응…. 3일! 이젠 안 돼! 나도 이게 최선이야.”

“…좋아요. 사흘 내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산 중턱 오두막으로 이사 가요.”

어째서 산 중턱 오두막이 노반에게 약점으로 작용한 거지? 궁금한 표정으로 젠을 바라보자 젠은 살며시 내 시선을 피했다. 그에 마린도 합세해 바라보자 싱긋 웃어 보인 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출발할까요?”

시간이 됐나 보다. 젠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니 애처로운 눈빛의 노반이 내 소매를 잡았다.

“어디 가?”

노반도 데려가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아무래도 놓고 가는 게 낫겠지.

“젠의 여동생을 만나러 가.”

“젠의 여동생?”

“응. 저녁 전에는 올 것 같아.”

“알았어, 잘 다녀와.”

응? 이렇게 쉽게 보내 준다고?

“같이 안 가도 괜찮아?”

“응, 괜찮아. 난 별로 보고 싶지 않아. 성별만 다른 젠이 한 명 더 있다니. 으.”

한나를 보고 싶지 않은 게 진심인지, 노반은 질색을 하며 3일 뒤까지 읽어야 하는 책을 폈다. 어라, 저 책 생각보다 두껍네.

“알았어. 그럼 다녀올게. 마린도 좀 쉬고! 여기 오고서 한 번도 안 쉬었잖아.”

“네, 그럴게요. 황자님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왕 올라온 거 푹 쉴 거라는 마린에게 제발 편하게 쉬어 달라 말했다. 마린이 말은 안 했지만 많이 피곤했을 거다. 로테 별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야 했고, 위험한 놈은 없는지 둘러봐야 했고, 내 체면도 살려 줘야 했고, 랄프도 갈궈야 했으니….

“미르, 잘 다녀와!”

상큼한 표정의 노반이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 줬다. 마린이 있으니 노반이 인간의 모습으로 있어도 문제없을 거다. 게다가 들켰다고 해도 머리 한번 두드려 주면 잊어버리겠지.

배웅해 주는 노반과 마린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먼저 나간 젠을 따라 나갔다. 젠을 따라간 로테 별궁 정문에는 젠의 회중시계에서 봤던 이프리트가 문양이 박힌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와, 마차 예쁘네.”

검은색과 하얀색을 적절하게 섞은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이프리트가가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게 보여 준달까. 딱 젠과 한나 같았다. 마차부터가 이프리트인데 사는 곳은 얼마나 티가 날지 궁금하네.

“이프리트라는 이름엔 흑과 백의 조화라는 뜻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타는 가넷은 흑마고, 백작저에 가면 백마 한 마리가 따로 있어요.”

“백마? 백마도 예쁘겠다. 걘 이름이 뭐야?”

젠이 가넷이 아닌 그 백마를 탔으면 백마 탄 왕자님이었을 거다. 좀… 와일드한 왕자님.

백마의 이름을 알려 달라는 내 말에 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먹보라고 불러요….”

“먹보…?”

먹보라고? 많이 먹는다는 뜻의 그 먹보?

“네, 가넷이랑 먹보 둘 다 망아지 때부터 키웠는데 먹보는 밥을 유독 많이 먹어서 먹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하나는 보석 이름이고, 하나는 먹보라…. 가넷 이름은 누가 지은 거야?”

“가넷은 한나가 지었어요. 원래 가넷은 한나의 말이었거든요.”

젠은 내가 마차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것을 기다렸고, 내가 자리를 잡자 따라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곤 아까의 말을 이어 했다.

“가넷은 활발해서 한나가 다루기 힘들었거든요. 어렸을 때는 괜찮았지만 가넷이 점점 커 가면서 성격이 드러나서 조련사도 다루지 못했어요.”

그래, 그놈 성격 정말 더럽다니까? 젠이랑 같이 있으면 그나마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 같지만 눈빛은 살벌했다.

“한나는 결국 승마를 포기했고, 처치 곤란한 가넷은 저한테 온 거예요. 저도 처음엔 익숙해지느라 힘들었어요.”

“아아, 그럼 젠이 원래 타던 먹보는 한나가 타는 거야?”

“아뇨, 한나는 가넷 위에서 떨어진 후로 말을 아예 안 타요.”

젠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낙마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건데…!

“아, 가넷이 다 크지 않았을 때라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다리가 부러졌었는데 그때 한나가 어려서 그런지 금방 붙더라고요.”

다리가 부러진 거면 크게 다친… 게 아니지. 그렇지… 죽었을 수도 있는데 다리가 부러진 정도면 다행인 거지.

“먹보는 가넷이랑 다르게 얌전한 아이니까 미르 님이 타시기에도 좋을 거예요.”

“….”

“돌아올 때 데려오면 되겠네요.”

노반에게 청천벽력을 선사했던 젠이 내 앞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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