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6)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드셔 보시겠습니까?”
내 앞에 앉은 여성이 내게 빨간 생크림이 가득 올려진 케이크를 권했다.
“아, 괜찮네.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아서… 이 차로 충분해.”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한나는 싱긋 웃으며 천사처럼 상냥하게 나를 대해 줬다. 자신의 오라버니를 생지옥에 처박았다고 구박하기는커녕 너무 감사하다며 자신의 오라버니보다 나를 더 반겼다.
“오라버니는 오랜만에 백작저로 돌아와 할 일도 없습니까?”
“없어.”
“그럼 만들어 드려야겠군요. 세바스찬, 오라버니께 그걸 드리면 좋겠어.”
서늘하게 웃은 한나는 뒤에 서 있는 집사에게 ‘그것’을 가져와 달라 말했고, 집사는 짧게 고개를 숙이고 스르르 사라졌다.
“미르 님을 너와 단둘이 둘 순 없어.”
미간을 찌푸린 젠은 멀리 갈 수 없다며 한나가 가져다줄 ‘그것’을 미리 거절했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백작저를 정찰하라는 게 아니었어?”
젠은 자신이 생각했던 일과는 다른지 시종일관 무표정한 한나를 보며 물었다. 그에 한나는 잘 먹고 있던 케이크를 내려놓고 젠에게 쏘아붙였다.
“그런 건 세바스찬도 할 수 있어요. 황족 시해죄로 도망자 신세가 된 오라버니가 정찰을 나가면 다들 놀랄 게 분명하니. 오라버니는 그저 잠시 있다가 조용히 가세요.”
살벌하다. 이래서 젠이 오기 싫다 한 건가…. 단번에 이해가 됐다. 내가 괜한 부채질을 했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에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한나가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그래도 잘하셨어요. 타루스 프레오나가 황제가 됐다면 이 제국은 한 달도 안 돼 망했겠죠. 저를 포함해 오라버니에게 감사하는 자들이 많아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자책한 적 없어. 오히려 이렇게 돼서 기쁘지.”
젠은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받은 위로에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돼서 기쁘긴, 거짓말이다. 드래곤 보러 가야 한다면서 실종 계획 다 짜 놨으면서.
속사정을 모르는 한나는 의기양양한 젠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시 공격 모드로 돌아섰다.
“네, 마음껏 기뻐하세요. 오라버니가 행복하시면 저도 행복하니. 하지만 신분을 잃었다 해도 부디 가문에 먹칠하는 일은 하지 말아 주세요.”
“언제는 그랬었나.”
“꽤 많았었죠. 정치 회의에 처음 참석하셨을 땐 단상을 엎고 나오셨죠, 황실 훈련장에 처음 들어가셨을 땐 그 일대를 헤집어 놓으셨고요. 수습하느라 꽤 힘들었답니다.”
“그건 다 이유가….”
“아, 자네스 남작 부인이 오라버니와 처음 만났을 땐 소리를 지르셨죠?”
“그것도 이유가….”
“통제는 하지 않을 테니 수습할 수 있는 일들만 저질러 주세요.”
한나에게 번번이 말이 막힌 젠은 더 이상 변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살벌한 한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멍하니 찻잔을 든 나를 바라봤다. 자신은 억울하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한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젠을 향해 가볍게 웃어 줬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한나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
“….”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를 오가는 어색함에 나는 다시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고, 한나는 눈을 돌려 젠을 바라봤다. 찰나였지만 억겁의 시간을 겪은 듯 길게 느껴졌었다.
“세바스찬이 오면 시작하세요. 당숙 어르신들도 좋아하시겠어요.”
“그럴 리가.”
“당숙 어르신들이 오라버니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오죽하면 저한테 멀리 떨어진 오라버니 소식을 들고 와 달라 하겠어요.”
입을 살짝 가리며 웃는 한나의 눈동자에선 은근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에 젠은 짧게 한숨을 쉬곤 포기했다.
때마침 사려졌던 세바스찬이 다시 스르르 돌아와 젠의 앞에 수십 장의 종이와 깃펜을 놓고 물러났다.
“이것도 세바스찬 시키면 되잖아. 항상 보내는 내용은 똑같으면서….”
“오라버니가 쓰시는 내용은 다르니까요. 그냥 건강히 잘 있다고만 보내 주셔도 좋아하실 거예요.”
싫은 티가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젠은 깃펜을 들어 어르신들을 위한 안부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실 생활은 잘 맞으십니까?”
젠의 수려한 글씨를 넋 놓고 지켜보는데 나를 향한 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고 있네. 황실이라고 특별할 건 없지.”
“잘 지내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혹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게 있다면 제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힘이 닿는 곳까지 해결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나는 그리 말하며 방금까지 젠에게 보내는 찜찜한 웃음이 아닌, 사심 없는 밝은 미소를 내게 지어 줬다.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반응과는 정반대였다. 나한테 왜 잘해 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건지, 잘못을 해서 그런지 한나의 친절한 태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래, 매도 먼저 맞는 게 났다고… 일단 다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미움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한나도 진실을 알게 될 테고, 내 마음도 편해질 거다.
“저기….”
“네, 말씀하세요.”
우물쭈물 말끝을 늘이자 한나는 내가 준비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줬다. 자기 오빠랑 똑같다.
“왜… 어째서 내게 친절하게 구는 거지? 난 그대의 오라비와 가문을 멸문시킬 뻔했는데.”
조금 많이 충격적일지도 모르는 내 말에도 한나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일을 대강 한나에게 전하자 그제야 조금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개를 끄덕여?
“굉장히 기발한 전술이군요.”
“….”
“저였다면 생각 못 했을 발상입니다.”
한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굳어 있는 나를 칭찬해 줬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안부 편지를 쓰고 있는 젠을 바라봤지만 젠도 희한하다는 눈으로 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일은 신경 쓰지 않으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살아 있고, 가문도 아직 견고합니다.”
“….”
“게다가 전 황자님 덕분에 백작위에 오르게 됐으니 원망보단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사실 원망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오히려 제가 죄송한걸요.”
싱긋 웃어 보인 한나가 이쪽에서 신경을 차단한 채 편지를 쓰고 있는 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많이 부족하지만 저희 오라버니를 거둬 주셔서 감사합니다. 버리지 말고 오래오래 간직해 주세요.”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 하는 말이다. 부족하긴커녕 넘치는 젠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애저녁에 죽지 않았을까. 이제는 젠이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걸.
도리어 내가 해야 하는 말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를 지긋이 쳐다보는 젠의 눈빛에 잠시 멈칫했다. 그에 젠이 부드럽게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저도 부탁드릴게요. 절 오래오래 간직해 주세요, 미르 님.”
싱긋 웃는 모습이 똑같은 두 남매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한나도 한나지만 젠도 젠이다. 무슨 말을 저렇게 해, 사람 떨리게?
“…둘 다 마음이 넓구나. 나였으면 괘씸해서라도 조금 굴렸다가 한참 뒤에나 용서할 텐데.”
괜히 민망한 마음을 숨기며 말하자 두 남매는 그 마음을 알겠다는 듯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런 게 더 민망해 시선을 돌렸다.
“용건은 이게 다야?”
침묵이 길어지려는 순간 때마침 마지막 안부 편지를 쓴 젠이 세바스찬에게 건네주며 한나에게 물었다.
“네, 그냥 건강한지 얼굴이나 보려 불렀어요. 바쁘시다면 돌아가세요.”
“나중에,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젠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저 손을 잡으면 어디로 끌려갈지 알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며 젠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에 한나가 의아해하며 젠에게 물었다.
“할 게 남았다구요?”
“응, 너는 못 하는 거.”
“아.”
젠의 장난스러운 말에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보 데려갈게.”
“펄이라니까요.”
“그래, 팔.”
“펄.”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젠과, 이름은 확실하게 불러 줘야 한다는 한나가 대립했다. 둘은 짧게 시선 주고받았고, 전혀 굽히지 않는 젠에 한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한나는 대화를 나눌 타깃을 바꿨다.
“황자님, 그 아이 이름은 펄입니다. 펄은 먹보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가능하면 펄이라 불러 주세요. 황자님께서 펄이라고 불러 주면 좋아할 거예요.”
그래, 나도 먹보보단 펄이 백배 낫다 생각 중이다. 가넷이랑 펄 둘 다 예쁜 보석 이름으로 잘 지은 것 같다. 한나가 센스가 있네.
“정말 데려가도 괜찮겠나? 그대의 말이라 들었는데….”
확인을 위해 재차 묻자 한나는 걱정 말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펄도 황자님을 좋아할 겁니다. 저는 승마를 하지 못하고, 뛰는 거라곤 조련사와 함께하는 운동 시간뿐이니 많이 답답했을 거예요. 황자님이 데려가 주시면 펄도 마음껏 뛰놀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 주다니 고맙군. 마음이 편해.”
싱긋 웃는 한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대만 괜찮다면 가끔 별궁에 놀러 와 줬으면 좋겠어. 소개해 줄 아이도 있고, 저번처럼 대화하면 좋을 것 같아서.”
내 조심스러운 권유에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활짝 웃으며 꼭 가겠다 약속해 줬다.
“영광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내가 토벌에 나간 뒤에 와.”
젠의 퉁명스러운 말이 한나에게 닿았다. 그러자 한나는 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자미 눈으로 바라봤다.
“오라버니가 빨리 가 버리셨으면 좋겠군요.”
“아직 한 달 남았어.”
“많이 남았군요.”
한나는 그리 말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넋을 잃을 것 같은 미모를 가진 남매여도 보통 남매랑 다름없었다. 젠이 말했던 ‘한나는 자신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라는 말이 딱 맞았다.
“미르 님.”
젠이 슬슬 승마를 배우러 가자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젠과 눈을 맞추며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였다.
“계속 버티시면 강제로 데려갈 수밖에 없어요.”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어디 한번 해 보라며 그를 도발했다. 그에 젠이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고, 스멀스멀 느껴지는 불안한 기운에 의자 팔걸이를 있는 힘껏 붙잡았다.
“…황자님, 일찍 포기하시는 게 좋습니다.”
내 미래를 알고 있는 듯 한나는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고, 한나의 뒤에 서 있던 세바스찬도 금방 숙연해져 고개를 숙였다.
“…나 손 절대 안 놓을 거야. 억지로 떼려 하면 다친다?”
의자 팔걸이를 잡는 것으론 부족할 것 같아, 내 다리를 의자 다리에 꼬아 몸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전 미르 님을 절대 다치게 하지 않아요.”
그리 말한 젠은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고 그의 얼굴이 내 얼굴과 점점 가까워졌다. 시간이 느릿하게 가는 착각이 들었다.
“으차.”
곧이어 젠의 힘쓰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의자와 함께 몸이 붕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