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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96화 (96/227)

96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7)

나는 무거운 의자와 함께 번쩍 들렸다. 바로 앞에 있는 젠의 얼굴을 마주 본 채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곤 젠이 걷는 대로 멍하니 이동됐다.

젠이 쓴 안부 편지를 확인하며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한나는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비싼 의자니 절대 망가트리지 마.”라며 신신당부했다.

의자의 무게와 내 무게까지 합쳐져 굉장히 무거울 텐데 젠은 힘든 기색 없이 잘도 들었다.

“무겁지 않아? 내려 줘, 내 발로 갈게.”

“늦었어요.”

“의자까지 들 줄은 몰랐단 말이야. 내려 주면 안 될까?”

“네, 안 돼요.”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어차피 젠은 계속 거절할 테니 그냥 내가 의자에서 뛰어내리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단념했다. 150cm 조금 안 되는 높이지만 허약한 내 몸뚱어리가 뛰어내리면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체감상 아파트 5층 높이 정도 될 것 같다.

내가 움직이면 더 힘들 테니 마음을 편히 먹고 얌전히 앉아 있기로 했다. 내가 눈에 띄게 얌전해지자 젠은 가이드처럼 백작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화원이 나와요. 시간이 생기면 자주 갔었어요.”

“맞아, 젠은 꽃도 잘 알지? 나한테 제노아스를 처음 알려 준 사람이 젠이었잖아.”

“잘 알려진 꽃만 기억하고 있어요.”

“그거라도 어디야.”

요즘은 장미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거들어 주는 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뒤이어 말하는 이야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업에서 뛰쳐나온 오라버니는 항상 화원으로 도망쳤어요. 다른 이들이 생각하기에 오라버니는 절대 화원으로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한나는 어릴 적 젠의 일화를 몇 개 말해 줬다.

“저택 뒤편에 큰 단풍나무가 있었어요. 원래는 그 나무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아무도 잡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베어 버리셨죠.”

“젠 때문에?”

“오라버니 때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싫어하셔서예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는 단풍나무를 싫어하셨거든요. 오라버니가 말을 듣지 않으니 이때다 싶어 베신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한나는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리곤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 단풍나무가 잘린 이후로 오라버니는 서재, 부엌, 훈련장, 마구간 등등 다양한 곳으로 도망쳤지만 전부 들켰었죠. 그러다가 마지막엔 화원으로 피했어요.”

훈련장, 마구간은 이해가 간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 장소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부엌으로까지 도망친 젠을 찾았으면 화원도 찾을 수 있는 거 아닌가? 화원을 먼저 찾는 게 더 쉽겠다. 작게 피어오른 의문은 젠이 바로 해소해 줬다.

“옛날에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어요.”

“….”

“시간이 지나니 꽃과 가까이 있어도 괜찮아지더라고요.”

대단하다, 정말. 수업을 피하기 위해 알레르기가 있는데도 꽃밭으로 들어간 거야?

“아무도 화원을 찾아보려 하지 않아서 거기로 갔었죠.”

“영리하다 해야 할지, 무모하다 해야 할지….”

이런 걸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라 하는가 보다.

아직 당황이 가시지 않은 채로 내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자 젠은 들고 있는 의자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차리게 했다.

“이제 내려 주면 안 될까?”

“안 돼요.”

“무겁지 않아? 꽤 오래 든 것 같은데….”

“거의 도착했어요. 괜찮아요.”

젠은 의도적으로 조금씩 의자를 흔들었다. 팔이 아픈가 했지만 나와 눈을 맞추며 살며시 웃는 걸 보아 장난인 것 같았다.

“떨어질 것 같아.”

“제가 꽉 잡고 있어요.”

“갑자기 손에 힘이 빠지면 어떡해.”

“힘들겠지만 다리로 잡아 볼게요.”

“그런 게 가능해…?”

떨어지는 의자와 나를 다리로 잡을 수 있다고? 다리가 손이 아닌 이상 어렵지 않을까. 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조금 고민하다, ‘다리로 잡는다’ 같은 비현실적인 방법이 아닌 조금 더 현실적인 방법을 말했다.

“음… 낙법 알려 드릴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젠에겐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젠은 작게 미소 지었다.

“오른쪽에 호수 보이세요?”

“호수?”

젠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늘을 투영시킨 푸른색의 맑은 호수가 보였다.

“어렸을 때 저기 빠져서 죽을 뻔했어요.”

“어쩌다가…?”

“도망치다가요. 그때는 수영을 못 했거든요.”

이제 보니 어릴 적의 젠은 굉장히 장난꾸러기였나 보다. 아니, 그냥 말 안 듣는 앤가….

“그렇게까지 수업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네, 그때는 시간 낭비라 생각했어요. 전부 아는 내용이기도 했고, 지루했거든요.”

“그럼 수업을 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니야?”

이미 다 알고 있으면 수업을 왜 듣지? 젠의 말대로 시간 낭비잖아.

이해가 가질 않아 되물었지만 젠은 부드럽게 웃을 뿐 입을 다물고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에 뒤에서 가만히 걷던 한나가 대답해 줬다.

“귀족의 학문은 지식을 쌓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공자와 영애가 ‘얼마나 귀족스러운가’를 보죠. 공부를 하려는 자세, 사람을 대하는 태도, 평소의 행실 등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아… 그렇구나.”

“예상하신 대로 오라버니는 평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크게 혼나 수업에 들어갔지만, 이미 눈 밖에 난 상황이었죠.”

한나가 한숨을 내뱉자 나는 크게 웃었다. 그때의 젠을 봤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젠과 눈을 마주치고 방긋 웃었다.

어느새 도착했는지 두 발이 땅과 가까워졌다. 의자가 완벽하게 땅에 닿자 나는 바로 일어나 젠의 팔을 두들겼다.

“수고했어. 내일 팔에 무리 오는 거 아니야?”

“평소에 팔을 자주 써서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금은 풀어 주자.”

나는 집중해서 젠의 팔 근육을 두들겼다. 마음 같아서는 주물러 주고 싶었지만 젠의 팔 근육이 워낙 딴딴해서 풀어질 때까지 주무르다간 손이 얼얼해질 것 같아 두들기는 편이 나았다.

“어때, 괜찮아?”

“조금 더 강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네, 좋아요.”

예전 같으면 안 해도 된다고 거절했겠지만, 거절하면 내가 계속 신경 쓸 걸 알고 있는 젠은 두 팔을 뻗어 잠자코 내게 마사지를 받았다.

“….”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주위를 돌아보자 어느새 하얀 백마를 끌고 온 한나가 우리를 해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자님께선 오라버니께 단단히도 얽혔나 봅니다.”

“응…?”

한 쌍의 오그라드는 커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런 한나의 눈빛이 민망해져 젠의 팔을 두들기던 손을 살며시 내렸다. 따지고 보면 커플이 아니니 찔릴 건 없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말라 했다. 그러곤 잡고 있는 고삐를 살짝 잡아당겨 펄을 소개해 줬다.

“이 아이가 펄입니다.”

가넷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긴장감이랑 다르게 펄을 보고 있자니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펄의 등에 은은하게 빛나는 천사 날개가 있는 것만 같다. 햇살이 은은하게 천사 날개를 밝혀 주는 것 같달까?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온화한 느낌이 든다.

“와, 너무 예쁘다.”

“미르 님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젠의 말대로 나는 펄과 길게 눈을 마주쳤다. 펄의 눈동자는 흑요석처럼 새까맣게 반짝였다. 한나가 내게 고삐를 넘겨주자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가넷이랑 전혀 달라…. 너무 기뻐.”

가넷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며 콧김을 뿜고, 말을 못 하니까 눈으로 욕하고, 저리 가라며 발도 구르지만 우리 펄은 다르다. 펄은 아주 얌전하게 내가 자신의 등에 오르기를 기다렸고, 내가 놀라지 않게 갑자기 히이힝 하고 크게 울지도 않았다.

“이제 타 볼까요?”

“벌써?”

나는 바로 펄의 위로 나를 올려 주려는 젠을 만류했다. 어떻게 타는지 설명은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발바닥이 허공에 떠 있는 건 익숙해지셨을 거예요.”

이곳으로 올 때까지 젠이 의자에 태워다 준 것을 말하나 보다. 설마 승마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연습을 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나를 들고 온 거였어…?

“젠은 계획이 다 있구나.”

“그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타는 게 편하실 거예요.”

젠은 나를 번쩍 안아 얌전히 서 있는 펄의 위로 올려 줬다. 확실히 아까까지 의자 위에 계속 떠 있어서 그런지, 높은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게 덜 어색했다. 가넷을 처음 탔을 때와 비교해 백배 나았다.

“펄 진짜 착하다!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있어!”

펄은 내가 올라탔음에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잔디가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 넓은 평지에 사람 하나를 태운 하얀 백마가 갈기를 멋지게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로 살짝 건드려 주세요.”

슬슬 움직여 보자는 젠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러고 있을래.

“먹보도 뛰는 걸 좋아할 거예요.”

“히잉!”

젠이 펄을 향해 먹보라 말하자 얌전히 있던 펄이 히잉! 하고 콧김을 뿜었다.

와, 진짜 싫어하네?

신기하게 가넷이랑 펄 둘 다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다.

“자기는 먹보가 아니래.”

키득키득 웃으며 젠에게 말했다. 그에 젠은 피식 웃으며 먹보, 아니 펄의 뒷다리를 적당히 두 번 두드렸고, 펄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펄이 걸음을 옮길수록 몸체도 함께 움직여 흔들렸지만 젠의 말대로 의자 위에서 흔들었던 느낌이 남아 있어 당황하지 않고 균형을 잡았다.

“전보다 좋아지셨네요.”

“가넷이랑 달라서 그런가 봐. 걘 펄이랑 달리 난폭하잖아. 펄은 다루기 편한 것 같아.”

“확실히 가넷보단 먹… 펄이 더 얌전하네요.”

습관적으로 먹보라 부르려던 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바로 올바른 이름을 불러 줬다.

“연습하면 잘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너무 무리하시면 허리를 못 쓰실 수 있으니 적당히 하셔야 해요.”

“응, 걱정 마. 나 그런 건 또 잘 챙겨.”

난 내 몸 망가지는 걸 아주아주 싫어하니까.

“오늘은 세 바퀴만 돌고 돌아가요.”

“세 바퀴나…? 힘들 것 같은데….”

말꼬리를 늘이며 세 바퀴는 안 된다는 내 말에 눈을 마주친 젠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두 바퀴만 돌까요?”

“두 바퀴도 너무 많지 않을까?”

오늘은 운동하고 싶지 않아. 오랜만에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을 날리며 젠에게 말했다. 그에 젠이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 그럼 한 바퀴.”

두 바퀴나 줄여 줬어! 적어도 한 바퀴 반은 돌 줄 알았는데 한 바퀴만 돌아도 되니 신이 나서 활짝 웃었다.

“…황자님,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기뻐하는 와중, 어딘가 아파 보이는 한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가는 건가? 바쁜데 내가 잡고 있던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단순히 제가 알던 오라버니와 전혀 다르…. 사실 일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한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다 알겠다. 너무 많이 말했고, 누가 봐도 티 나게 돌렸다.

“그래, 다음에 꼭 로테 별궁에서 만났으면 좋겠군.”

“네, 꼭 가겠습니다.”

한나는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저택으로 떠났고, 젠은 한나가 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펄을 움직였다.

왜 벌써부터 허리가 아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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