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8)
이프리트 백작저에서 로테 별궁으로 돌아온 나와 젠은 곧바로 식당으로 직행하기로 했다.
말을 타고 공원 한 바퀴 도는 걸 격한 운동이라 칭하기엔 부끄러웠지만, 내 입장에서는 격한 운동이었다. 안 움직이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면 힘들다고, 높은 확률로 내일 근육통이 올 것 같다.
별궁 식당으로 가는 길, 노반과 마린을 마주쳤다. 둘은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컁컁!”
“노반!”
노반은 나를 보자 마린의 품에서 뛰어내리더니 방방 뛰며 내게 달려왔다. 마음 같아선 당장 안아서 들어 올려 주고 싶지만, 승마 그거 조금 했다고 허리가 찌릿찌릿했다. 아니, 허리보단 엉덩이가 더 아팠다. 열심히 달려오던 노반은 내게 안기기 직전 젠에게 뒷덜미가 잡혔다.
“컁!”
“내일까지는 미르 님께 안아 달라 하면 안 돼요.”
“컁?”
내게 안기면 안 된다는 젠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반이 귀여웠다. 순진한 여우인 척 연기하는 것은 어설펐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떤 여우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겠어.
“방금까지 운동하고 오셨어요. 내일 몸살이 올 수도 있으니 노반이 잘 보살펴 줘야 해요. 알았죠?”
“컁! 캬아! 컄!”
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반은 젠의 품에서 난리를 피웠다. 젠의 팔을 퍽퍽 치기도 하고 그의 옷깃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노반, 갑자기 왜 그래. 어디가 가려워?”
내 물음에도 노반은 작은 여우 손으로 젠에게 펀치를 날릴 뿐이었다. 그에 젠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노반의 뒷덜미를 다시금 쥐어 잡곤 팔을 쭉 뻗어 자신의 상체에서 멀리 떼어 냈다.
“황자님이 무리하게 운동하신 걸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서 화난 거겠지…?”
“네, 저번에 크게 앓으셔서 그런지 노반도 걱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큰일이네… 내일 아프면….”
노반의 눈이 확 돌아서 삐뚤어지는 거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노반이 많이 걱정하겠지…?”
“네. 그래도 저번처럼 밥을 굶지는 않을 겁니다. 그땐 노반을 말릴 수 있는 황자님께서 깨어나지 않으셨으니까요.”
마린도 쌓인 게 많은지, 내가 황자만 아니었어도 잔소리했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몸 관리 제대로 하랬지!’ 같은 엄마가 할 법한 잔소리 말이다.
“내일은 안 아프도록 노력해 볼게.”
원기 회복에 좋은 오일을 푼 욕조에 몸을 담그면 찌릿찌릿한 근육이 풀릴 거다. 그렇게 했는데도 아프다면 마법을 쓸 수밖에 없다. 아픈 부위에 <큐어> 마법을 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혹시라도 마법이 통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다는 듯 멀쩡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 아파 죽겠는데 멀쩡한 척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노반은 성장기가 지나면 지금보다 훨씬 튼튼해지죠? 하지만 인간은 드로이프와 다르게 아프면서 자라요. 성장기라 할 시기가 특별히 없거든요.”
“컁!”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프면서 자라는 거예요.”
난동을 피우는 노반이 아무렇지 않은지, 젠은 노반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곤 그 뒤에 이어지는 젠의 말에 난 고개를 숙였다.
“전에 말했었죠? 미르 님은 인간 중에서도 비교적 약하니 아플 때가 많다고요.”
핵심을 찌르는 젠의 말에 노반은 금세 얌전해졌다. 동의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못 깨어나시진 않을 거예요.”
노반이 얌전해지고, 나는 젠에게서 노반을 넘겨받았다.
“컁!”
노반은 크게 소리치며 당부하는 것 같았다. ‘아프지 마!’ 같은 말 아닐까.
“안 아파. 그냥 쪼금 찌릿찌릿한 거야. 그동안 안 움직이던 근육을 움직여서 그런 거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런 걸로는 저번처럼 기절 안 해.”
“끼잉….”
노반은 금세 울상을 지었다. 기절이든 혼절이든 그냥 내가 아픈 게 싫은 거다. 그러고 보니 마나를 마셨을 때도 아픈 모습을 보였었지…. 하, 이 정도면 보호자 실격 아니냐.
“밥 먹자! 밥 먹으면 바로 튼튼해질 거야.”
울적한 분위기를 바꾸려 씩씩하게 말한 뒤 식당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 마린이 의자를 빼 주는 자리에 앉자 우리를 기다렸었는지 시종이 음식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들고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미리 준비하고 있던 거냐는 내 질문에 마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네, 서둘러 오신다고 식사도 안 드셨을 것 같아 주방장에게 때맞춰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선견지명이 기가 막힌다. 만일 마린이 헬조선에 살았다면 대통령 비서쯤은 손쉽게 되지 않았을까?
마린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고 있을 때, 가까이 다가온 시종이 트레이에 있던 음식을 테이블 위로 하나하나 올렸다. 메인으로 나온 음식은 오븐에서 바로 꺼냈는지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오….”
내 앞에 5성급 호텔 못지않은 음식이 차려졌고, 그 음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향신료를 처바른 스테이크만 내왔던 랄프한테 데여 스테이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식성을 들었는지 메인 요리는 푸릇한 샐러드가 가득 올려진 함박스테이크였다.
그 외에 사이드 메뉴로는 노릇하게 구운 단호박을 얇게 저민 연어로 감싼 애피타이저와 큐브 모양의 붉은색 푸딩 젤리를 발사믹으로 보이는 소스와 이름 모를 허브로 장식한 디저트 같은 요리가 있었다.
“이건 뭐지?”
“주방장을 불러오겠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에 중얼거린 혼잣말이었는데 그걸 또 들은 텟이 주방장을 데려오겠다며 쪼르르 나갔다.
주방장이 오기 전, 애피타이저로 보이는 구운 단호박을 감싼 저민 연어를 먹었다. 짭짤하게 구운 단호박의 고소한 맛이 연어의 느끼함을 잡아 줬다. 무난하게 맛있었다. 얌전하게 앉아 있는 노반에게도 먹여 줬는데 노반은 단호박 연어 구이가 마음에 드는지 작은 여우 손으로 몇 개 더 집어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텟이 데려온 주방장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자기소개를 했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오늘부로 황자님의 식사를 맡게 된 주방장 데이지 캐퍼릴트라 합니다. 편히 데이지라 불러 주십시오.”
데이지는 가녀린 이름과는 달리 멧돼지를 맨손으로 잡을 법한 여장부 느낌이었다.
와… 저 근육 봐. 짱 멋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예, 황자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데이지가 또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엇으로 만든 소스인지 알려 주겠는가?”
메인 메뉴인 함박스테이크는 샐러드 채소만 올려져 있을 뿐, 별다른 소스는 뿌려져 있지 않고 별도로 찍어 먹을 수 있는 소스가 따로 있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그 찍어 먹는 소스가 하얀 소스라는 거다.
포크로 찍어 소스의 맛을 보았지만 처음 먹어 보는 오묘한 맛이었다. 생김새는 크림 파스타에 들어가는 크림소스였지만 맛을 보니 크림소스는 아니었고, 크림소스보단 덜 고소하면서 은근히 달콤한 맛이 중독될 정도로 맛있었다.
“우유로 만든 소스입니다.”
“우유…?”
우유로 만든 거면 크림소스일 텐데?
“우유를 오랜 시간 저어 가며 끓이면 그 소스처럼 걸쭉해집니다. 밍밍한 간은 소금으로 맞췄습니다. 입에 맞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데이지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함박스테이크와 우유 소스라니, 생전 들어 보지 못한 조합이었지만 의외로 엄청 잘 맞았다.
노릇하게 잘 익은 통통한 함박스테이크를 반으로 가르자 갇혀 있던 육즙이 줄줄 흘러나왔다. 함박스테이크의 열기와 흘러나온 육즙으로 숨이 죽은 채소가 바닥으로 늘어졌다. 그 늘어지는 모습이 하나의 예술 같았다.
“채소와 스테이크, 그리고 소스와 함께 드셔 보십시오.”
데이지의 말대로 적당하게 썬 스테이크 위에 육즙이 스며든 채소를 올리고 부드러운 우유 소스를 올려 한입에 넣었다.
대박.
“오… 와…!”
황자의 체통도 잊어버린 채 처음 접하는 희한하고도 오묘한 맛에 감탄했다. 이 로테 별궁에서 맛있는 걸 먹을 거란 기대를 안 하고 먹어서 더 맛있는 것도 있지만, 여러모로 탄탄한 맛이었다.
단짠고소라고 해야 하나? 육즙이 스며든 채소에선 단맛이 났고,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한 스테이크는 적당하게 짭짤했다. 둘의 단짠을 고소한 우유 소스가 감싸 안았다. 감히 설명해 보자면 메시포테이토와 스테이크의 최대 진화형 같다.
“맛있군.”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입 안으로 넣었다. 이런 음식이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함박스테이크와 채소만 먹어도 맛있고, 함박스테이크와 우유 소스만 먹어도 맛있고, 채소와 우유 소스만 먹어도 맛있다.
만일 랄프가 어떻게 먹어도 맛있는 이 음식을 줬었더라면 얌전히 핫케이크만 먹였지, 고인 물을 퍼서 핥아 마시라 주진 않았을 거다.
“입에 맞으시다니, 굉장히 기쁩니다.”
그리 말한 데이지는 마음이 놓인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러곤 이 요리가 자신의 역작이라며 맛있게 먹어 줘서 기쁘다 했다.
젠과 마린도 기뻐하는 데이지에게 맛있다며 첨언을 했다. 젠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마린은 데이지에게 맛있다 말하며 자애롭게 웃어 줬다.
난 노반을 무릎에 앉힌 다음 스테이크를 먹여 줬다. 그 모습을 본 데이지가 놀라 물었다.
“여우가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어도 괜찮습니까?”
“그래, 이 아인 괜찮아. 그런 의미에서 식사를 준비할 땐 이 아이의 것도 준비해 줄 수 있나?”
데이지는 고개를 숙여 긍정의 답을 했다.
노반에게 마지막 스테이크까지 먹인 뒤 남은 소스를 바라봤다. 매우 아쉽다. 내일도 먹고 싶고 내일모레도 먹고 싶은 맛이다.
“데이지 양에게 이 소스를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희가 북쪽으로 돌아가더라도 제가 해 드릴 수 있어요.”
내가 소스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남들이 다 알 정도로 눈에 띄게 쳐다봤었는지, 또 먹을 수 있다는 마린의 말이 들려왔다.
역시 마린이 최고야.
마린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때 노반이 손을 번쩍 들어 디저트인 붉은색 푸딩 젤리를 노렸다.
손으로 집어 먹으려는 노반을 말리고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에 데이지가 마지막 접시에 올려진 디저트를 먹는 방법을 알려 줬다.
“티스푼으로 떠드시면 됩니다. 옆에 있는 흑설탕 소스와 함께 먹으면 더 달게 느껴질 겁니다.”
발사믹이 아니라 흑설탕 소스였다. 정사각형의 붉은색 푸딩 젤리를 티스푼으로 떠 흑설탕 소스를 묻힌 뒤 노반에게 먹여 줬다. 노반은 입 안에 넣자마자 꺄꺄-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단 걸 좋아하는 노반에게 딱 맞는 맛인가 보다.
“맛있어?”
“캬!”
“좋아하니 다행이네. 많이 먹어.”
내 접시 위에 있는 푸딩 젤리는 노반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노반은 푸딩 젤리를 먹으면서 나도 먹으라고 눈치를 줬지만 행동과는 다르게 너무 맛있게 먹길래 전부 양보했다.
그때 푸딩 젤리를 듬뿍 뜬 젠이 나를 향해 티스푼을 내밀었다.
“드셔 보세요.”
“응?”
여기서 먹여 주는 거야? 데이지, 텟 그리고 다른 시종들도 다 보는 여기서…?
조금 당황하다 재촉하는 젠에 의해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달달한 푸딩 젤리가 가득 들어왔다.
“움… 맛있네.”
엄청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