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98화 (98/227)

98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19)

“아이고….”

“미르….”

눈을 뜨자 보이는 노반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 좋은 아침…! 오늘은 다른 날보다 유독 상쾌하네! 어제 운동을 해서 그런가?”

노반은 아침부터 눈이 그렁그렁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덕분에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지만 노반이 울상 짓지 않게 멀쩡한 척을 했다.

“괜찮은 거야? 막 아프고 그러진 않아?”

“응, 괜찮아. 아주 조금 뻐근한 정도야.”

“다행이야….”

노반은 주먹을 꽉 쥔 손을 무릎 위로 올렸다. 어젯밤 노반을 재우고 자지 않았다면 분명 밤을 새우며 내가 아프나 안 아프나 지켜봤을 거다.

“젠이 그랬는데, 미르는 꾸준히 운동을 해 줘야 체력이 좋아진대.”

“그랬어?”

“응, 그래서 오늘 상태 괜찮으면 별궁 세 바퀴 걸으래.”

“응…?”

해맑은 노반의 말에 얼빠진 사람처럼 잠시 멍해졌다.

뭐라고? 로테 별궁을 세 바퀴 걸으라고? 응? 내가 잘 들은 거 맞니?

“다시 한번 말해 줄래?”

“천천히 돌아도 좋으니까 로테 별궁 세 바퀴 돌래! 아, 물도 많이 마시래.”

그놈의 물.

어젯밤 노반을 재우고 난 뒤 젠은 내게 세 잔의 물을 마시게 했다. 그만 마시겠다 했지만 꾸역꾸역 다 마셔야 한다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삼키게 했다. 물을 마시면 찢어진 근육의 재생이 수월하다나 뭐라나.

“으… 갑자기 몸이 안 좋은 것 같…지 않고 멀쩡해. 아침 먹고 돌자.”

꾀병을 부릴까 했지만 금세 울상이 되는 노반의 얼굴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내 한 몸 부서지면 그만. 노반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는 안 된다.

내게서 로테 별궁을 세 바퀴 돌 거라는 확답을 받은 노반은 여우로 변했고, 딱 맞춰 들어온 마린이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다.

“컁!”

마린이 가져온 트레이를 보니 나와 똑같은 식단으로 노반의 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노반, 편하게 먹어도 돼.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야.”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텟을 찾았다. 마침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 텟에게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금세 뿅 하고 인간으로 변한 노반은 숟가락을 쥐고 애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를 떠먹었다.

“미르, 이거 맛있다. 달아.”

“그래? 많이 먹어.”

내게 수프를 떠먹여 주려는 노반에게 괜찮다 사양하곤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슈크림 빵을 찢어 입 안 가득 넣는 노반을 보며 아기 새를 먹이는 어미 새의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싶었다. 젠도 이런 마음으로 내게 먹여 주는 건가…?

“아, 마린은 밥 먹었어?”

너무나도 귀여운 노반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뗀 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마린에게 물었다. 그에 마린은 시종인들과 아침에 미리 먹었다며 괜찮다고 했다.

시종인이랑 먹는구나…. 하긴, 마린은 이래저래 다 친하니까.

“시종인들이랑은 무슨 얘기해?”

“음….”

후추가 뿌려진 노랗고 뽀얀 수프를 떠먹으며 마린에게 물었다. 마린은 읽던 책을 덮고선 고민을 했다.

마린이 고민을 하는 중에 나는 수프의 맛을 음미했다. 노반의 말대로 꽤 달다. 고구마 수프 같은데 단맛을 살려 냈는지 추운 겨울 모닥불 앞에 앉아 머그컵에 담아 들고 마셔야 할 것 같은 맛이었다.

데이지의 요리도 맛있지만, 수프는 확실히 미네르바를 따라갈 순 없는 것 같다. 아, 요리도 셀비스가 더 잘하긴 하지. 셀비스의 요리는 간도 내 입맛에 딱 맞고, 많이 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다.

그렇다고 데이지의 요리가 맛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 입맛에는 미네르바와 셀비스의 요리가 조금 더… 많이 맛있는 거다.

“평범하게 누가 싫다거나, 누가 누굴 좋아한다거나, 누가 제일 잘생겼다 같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구나. 은근 평범하게 노네.”

마린이라면 여기저기 정보를 수집하고 다닐 줄 알았다. 프레오나 황실에 대해선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마린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다.

나는 마린에게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냐고 물었었고 마린은 살며시 웃으며 알려 줬다. 자신이 남들 눈에 안 띄게 정보를 건질 곳이라곤 프레오나 황궁에서 일하는 시종들밖에 없으니, 웬만한 시종들과는 전부 원만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여러모로 참 대단하다. 마린은 이런 곳에서 시녀를 하고 있을 그릇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젠 님과 황자님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것 같습니다.”

응?

“우리…?”

“네, 그 이야기는 ‘누가 제일 멋있냐’에서 시작했습니다.”

나와 처음 프레오나에 왔을 때 마린은 호기심이 왕성한 젊은 시녀들과 친해졌다고 했다.

“프레오나에서 가장 잘생긴 남성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다수의 시녀가 지금의 황제이신 오스먼드 폐하와 몰베인가의 레이가 경을 뽑았습니다.”

“젠은?”

“젠 님도 화두에 오르긴 하셨지만 정계나 사교계에 교류가 크게 없으셔서 그런지 인기가 있진 않으셨습니다.”

허! 어이가 없다. 아무리 젠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해도 그렇지, 젠의 미모는 한번 보고 잊힐 미모가 아닌데? 일어나서부터 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생각나고, 밥 먹을 때, 씻을 때, 휴식할 때 등등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게 젠의 미모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찬란하게 빛나는 금안으로 이루어진 그 완벽한 미모가 쉽게 잊힐 리 없다. 누군가가 마법을 부린 게 틀림없다.

“젠 님은 머리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다니시잖아요. 그래서 젠 님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였구나? 하긴, 젠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면 젠이 1등을 못 할 리가 없지. 오스먼드 그놈이 감히 누구랑…. 흠, 그래서?”

“오스먼드 폐하와 몰베인 경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때 황자님이 등장하신 거예요.”

나?

“황자님이 로테 별궁으로 오고 나서 이곳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모두 황자님을 지지하기 시작했죠.”

마린은 그때를 잊지 못한다는 듯 자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호호 웃었다.

“황자님을 처음 마주한 시녀들은 전부 몸이 굳어 황자님에게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텃세 부리려 단단히 준비했던 것 같은데 전부 얼어 정신 못 차리는 그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마린은 답지 않게 하하하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어디 내놔도 빛이 나는 자랑스러운 아들을 보는 엄마의 표정이었다. 우리 마린 많이 기뻤구나.

역시 텃세를 부리려 했구나. 그럴 만하지, 세네카 제국과의 전쟁을 겪느라 꽤 힘들었을 테니 적국의 황자인 내가 곱게만 보이진 않았을 거다.

“로테 별궁의 시녀를 제외하고도 오스먼드 폐하와 몰베인 경을 지지하는 대다수의 시녀가 황자님을 뵙고 나서부터는 황자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 완전 인기인이구나.”

“네, 데이지 양도 황자님을 가까이 보고 싶어 지원했다고 하더라고요. 에테네 궁에서 마주쳤을 때 너무 아름다우셔서 눈길이 갔다고 해요.”

그래서였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도브로미르 세네카는 어느샌가 프레오나 황궁의 아이돌이 됐다.

“난 젠처럼 남자답고 카리스마가 있진 않은 것 같은데 시종인들이 좋아해 주는 게 신기하다.”

“자신보다 예쁜 남성이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여성이었다면 부럽고 질투 나고 그랬을 텐데 남성이라 부럽진 않고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좋다 하더라고요.”

그렇지, 나는 남자다움보단 아름다운 쪽이지. 질투를 안 한다니 참 다행이다. 황자가 아니라 황녀로 빙의했었다면 피곤할 뻔했네.

“저도 황자님을 처음 뵀을 때 너무 아름다우셔서 놀랐었어요.”

나도 처음 내 얼굴을 봤을 때 깜짝 놀랐었다. 이렇게 이쁜 남자가 존재하다니 세상에 난다 긴다 하는 연예인들 뺨싸대기 날려도 할 말 없겠구나, 이 얼굴로 아이돌 경합 프로그램에 나갔다면 춤 못 추고 노래 못해도 당연 1위일 거다. 같은 우스운 생각을 잠깐 했었다.

“그런데 누가 제일 멋지냐는 이야기에서 왜 젠이랑 내 사랑 이야기를 하게 된 거야? 솔직히 우린 사랑이고 뭐고 같이 하는 것도 잘 없는데.”

마린이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같은 눈빛이다. 심지어는 마지막 빵을 먹어 치우던 노반마저 고개를 휙 들어 나를 바라봤다.

“왜…?”

“미르, 그건 좀 너무했다.”

“자각이 없으셨군요…. 젠 님이 더 힘들어지시겠어요.”

응? 나만 이해 못 했어? 뭔데, 뭐야…?

“노반, 이걸 지금 알려 드려야 할까요?”

“말해 주지 말자. 젠도 고생해 봐야 돼.”

“그럴까요?”

“응. 맨날 자기 거라고 하는데 엄청 재수 없단 말이야.”

둘은 멀뚱히 앉아 있는 나도 다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이쯤 하면 알 만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너희들 무슨 얘기 하는 거야…? 나도 좀 알면 안 될까?

“무슨 이야기 중….”

“비밀이에요.”

“말해 주면 재미없어! 미르가 직접 알아내!”

노반과 마린은 절대 안 알려 줄 거라며 손으로 입을 막는 행동을 했다.

“알았어, 안 물어볼게. 그래서 사랑 이야기는 뭔데? 무슨 이야기가 도는 거야?”

“이걸 말해 드리면 다 알게 될 것 같으니 나중에 말해 드릴게요.”

며칠 동안 밥 안 먹고 약초를 연구할 거라 하면 알려 줄 것 같은데, 그럼 화내겠지.

“치사해….”

“젠 님의 행동을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럼 바로 아실 거예요.”

“젠의 행동?”

젠의 행동이라…. 좋아한다 말했더니 대뜸 기댈 사람이 없어 의지하는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걸 수도 있다 말한 젠의 행동? 흥!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민다. 아니, 내가 좋다고 하면 좋은 거지, 왜 정이니 착각이니 흥이 깨질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가 안 간다.

“생각하니 화가 나네….”

생각만 한다는 게 말로 나와 버렸다. 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노반이 팔꿈치를 이용해 마린을 쿡쿡 찔렀다.

“봐, 마린. 아직 멀었어.”

“그러네요. 젠 님이 힘내셔야겠어요.”

대충 무슨 상황인지 감이 왔다. 젠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무지 어필하는데 나는 왜 멍청이처럼 헤헤거리면서 눈치 없이 받고만 있냐! 라는 이야기 중인 것 같다.

젠이 힘내긴 뭘 힘내! 내가 힘내야겠구만! 너네 지금 나 삽질한다고 무시하는 거지? 어? 나 다 알아! 하… 너네가 이 속사정을 알면 나한테 눈치 없다니 뭐니 그런 말 절대 못 한다. 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하…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

불평 하나 없이 다정하게 나를 챙겨 주는 젠의 태도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항상 나를 먼저 챙기고, 같은 시간에 일어날 땐 잘 잤냐는 아침 인사도 해 주고, 내가 밥을 적게 먹으면 직접 떠서 먹을 때까지 먹여 주고, 자기 전엔 물컵을 가져다주며 좋은 꿈 꾸라 인사해 준다. 또 내가 불편한 곳은 없나 신경 써 주고,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바쁠 텐데 시간 내서 내 곁에 있어 준다. 그런 젠의 마음을 모르면 바보 멍청이지.

“….”

하지만 본인이 다가오지 않는 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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