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20)
“컁!”
카랑카랑한 여우의 목소리가 허공을 크게 울렸다. 그에 나무에 앉아 있던 작은 새들이 놀라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얌전했던 애가 갑자기 웬 심술이지? 걸음이 느려서 그런가?
“좀 빨리 걸을까?”
“컁컁!”
아니란다.
느린 걸음이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안아 줄까?”
“컁!”
이것도 아니란다.
노반은 안아 준다는 말에도 고개를 휙 돌린 채 도도하게 걸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며 당당히 걷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넌 성질을 부려도 귀엽구나?
“노반, 왜 그래?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안아 주는 거 싫어?”
“컁! 컁컁!”
나한테 화난 건 아니었는지, 새침했던 모습을 풀고는 앞서가던 걸음을 돌려 내게 달려왔다.
살짝 뻐근한 허리를 숙여 가까이 다가온 노반을 들어 올렸다. 품에 들어온 노반에게 왜 그러냐 물으며 다정히 쓰다듬자 노반은 곧바로 내게 기대 머리를 비볐다.
“컁….”
“손바닥에 써 줄래?”
컁컁 소리로는 백날이 지나도 알아듣지 못할 거다. 차라리 적는 편이 알아듣기 빠를 것 같아 노반을 향해 손바닥을 쫙 펴 내밀었다. 그에 노반은 동그란 눈을 깜빡깜빡 감고는 곧바로 작은 여우 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마…카…롱… 안… 먹…고… 나…와…서….”
“컁!”
“마카롱 안 먹고 나와서 그런 거야?”
마카롱이라니. 겨우 마카롱 때문에 성이 나 있는 거였어?
로테 별궁을 나오기 전, 마린 다음으로 자주 보는 시녀를 만났다. 그 시녀는 나를 보자 마카롱이 곧 완성된다며 잠시 기다렸다 먹고 가라 권했었는데 나는 가능한 빨리 젠이 남기고 간 숙제를 끝내고 싶어 마카롱은 괜찮다고 거절했다. 그치만 노반은 먹고 싶었구나…. 여우의 모습이라 말도 못 하고 서운했겠네.
“들어가서 먹으면 되지.”
부둥부둥 안아 주며 잘 달래 봤지만 어지간히 먹고 싶었는지 성질을 굽히지 않았다.
“컁컁!”
“빨리 먹고 싶어?”
“컁!”
노반은 컁! 하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더 맛있을 텐데? 그래도 지금 먹고 싶어?”
“낑….”
눈을 축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먹고 싶은가 보다.
“그럼 한 바퀴만 돌고 바로 돌아갈까?”
“컁!”
“좋아, 젠한테는 비밀이야. 우린 오늘 세 바퀴 돈 거야, 알았지?”
“컁컁!”
노반은 울상을 짓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곤 입을 헤벌쭉 벌려 사랑스럽게 웃었다. 덕분에 나도 세 바퀴가 아니라 한 바퀴만 돌아도 된다.
곧 성장기가 끝나 가는 드로이프는 단것을 많이 찾는다고 노반이 말했다. 원래는 드로이프 땅에서만 자라는 단맛이 나는 풀을 먹으며 성장기를 보내지만, 이곳엔 그 풀이 없으니 대신 디저트를 먹는 거란다. 이게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노반만 알고 있다.
“마카롱은 마린이 진짜 잘하는데. 아니다, 마린은 모든 베이킹을 잘하지. 마린이 해 주는 롤 케이크 먹고 싶지 않아? 전에 블루베리 잼 발라서 해 준 케이크 진짜 맛있었는데. 내일 해 달라 그럴까? 마린 바쁘겠지?”
귀를 쫑긋 세운 노반을 꽉 껴안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최근의 노반을 보면 설탕 중독에 걸렸는지 손을 놓으면 당장이라도 별궁으로 달려가 마카롱을 먹어 치울 것 같았다. 계속 말을 걸어 정신이라도 빼놓으면 낫겠지.
“젠 보고 싶다. 아침에 얼굴 못 보니까 쓸쓸한 거 같아.”
“….”
“노반은 안 그래?”
“컁.”
별로 보고 싶지 않은지 쫑긋 세웠던 귀를 내리고 금세 얌전해졌다. 오늘 노반의 감정 변화는 빠르고 넓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젠이 토벌에 나가면 난 지루해질 텐데 그동안 할 거 찾아야 하거든.”
젠이 가 버리면 이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내가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텃밭을 가꾸는 것도 아니고, 이루고자 하는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젠이 없다면 그저 할 일 없는 백수일 뿐이다.
“인생의 목표가 없단 말이지.”
아, 생각해 보니 목표가 없지는 않다. ‘평범하게 잘 살겠다’는 목표가 있다. 그치만 이건 누구나 꿈꾸는 목표라 장대한 목표는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이런 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평범하게 잘 살고 싶으면 뭘 해야 할까?”
“컁?”
“딱히 생각나는 게 없네.”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사람도 있다. 문제라면 역경도 있다는 거다. 재물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손에 들어오니 문제없지만, 역경은 노력을 해도 피할 수 없다. 오스먼드 개자식.
역경을 넘기고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힘을 키우는 건 내 체력과 허약한 몸 때문에 무리다. 마법을 다루고 싶어도 마나 생성이 안 되니 불편하다. 돈은 많이 있지만 재력으로 누군가를 누를 만큼은 아니다. 뭐야, 무쓸모잖아.
“그러니 지하실을 찾아야 하는데 말야….”
있는지 없는지 모를 ‘보물이 있다는 로테 별궁의 지하실’은 나와 젠 둘이서 꾸준히 찾고 있는 곳이었다. 별궁 전체를 꼼꼼히 뒤져 봤지만 숨겨진 공간이라든가 감춰 놓은 장치는 없는 것 같았다. 사실 거의 반쯤 포기하고 있다.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좋은 게 나오면 감사하게 잘 써 줄 테니 나타나 주기만 하면 좋겠다.
“컁!”
“아….”
노반이 짖지 않았다면 화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고마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작은 여우 손으로 내 팔을 꾹꾹 누르는 노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노반, 그냥 인간 모습으로 지낼래?”
노반은 인간 모습으로 지내겠냐는 내 물음에 거절하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갑자기 애를 데려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도 있다. 누구의 아들이냐, 어디서 온 아이냐 등등 일이 복잡해질 거다.
우리 노반, 누가 키웠는지 내 신경 써 주는 것 봐. 너무 예쁘다.
“그래도 한나랑은 인간 모습으로 만나자. 한나는 착한 아이라 괜찮을 거야.”
“컁.”
한나만 괜찮다면 자주 만나고 싶지만, 백수 같은 나와는 다르게 바쁜 사람이라 언제 만나 줄지는 모르겠다.
그 외에도 이상하게 오스먼드가 꽤 자주 부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가 나를 부른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할 예정이다. 아프다든가, 아프다든가, 아프다는 변명으로.
“컁!”
“그래그래, 들어가자.”
별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오자 노반이 얼른 들어가자며 컁컁 짖었다. 그런 노반의 배를 톡톡 두드리며 마카롱을 향한 열정을 진정시켰다.
* * *
“아침부터 이게….”
“오래 남을 그림이니 멋지게 꾸미셔야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것도 강제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데 마린이 욕실로 나를 들이밀었다. 마린은 한바탕 씻고 나와 뽀얘진 내 얼굴에 수분을 위한 무언가를 발라 줬다.
“황자님은 피부도 반질반질 좋으시네요.”
“피부는 유전이래.”
“그런가요?”
“응, 형님들도 피부가 좋잖아.”
첫째 로이븐, 둘째 메이븐, 셋째 퍼디스, 막내 도브로미르까지 전부 눈에 띄는 외관을 가진 잘생긴 사람들이다. 따지자면 난 예쁜 쪽이지만….
라이언 황제도 나이가 꽤 들었지만 잘생긴 미중년이다. 황족은 얼굴로 뽑는 건지 특별히 못난 사람이 없다.
“어차피 상반신만 그릴 텐데 이렇게 입어야 해…?”
“네, 전신도 그릴 예정입니다.”
“전신?”
“네.”
전신…? 젠의 회중시계에 들어갈 상반신만 그리는 거 아니었어? 웬 전신?
“전신이라니…?”
“그 화가가 황자님의 이름을 듣곤, 죽기 전에 황자님의 전신을 그리고 싶다 해서… 그리기로 했어요.”
응?
“….”
“어이없으시겠지만 진짜입니다. 그 화가가 황자님과 함께라면 자신의 역작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느니, 황자님을 못 그리면 죽을 거라느니.”
“또라이구나.”
예술가는 전부 미친 사람이라더니.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마린은 담담히 대꾸를 해 주며 나를 열심히 꾸몄다. 차분한 말투와는 다르게 눈이 반짝반짝한 걸 보니 마린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노반은?”
“젠 님이 아침 훈련에 데려가셨습니다.”
“노반을…? 왜?”
“글쎄요.”
젠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
“아, 잠깐! 이것도 해야 해? 나 이거 싫은데.”
“크라바트는 꼭 해야 합니다. 안 하면 전체적인 그림이 허전해 보일 겁니다.”
“….”
“예복은 진한 청색을 입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뭐든 괜찮아.”
“음, 청색 말고 다른 색도 있습니다. 황자님은 워낙 하야시니 검은색을 입으면 더 돋보일 것 같고, 피부대로 하얀색 재킷도 예쁘실 것 같고. 흠… 뭘 입어도 어울릴 테니 무엇을 입혀 드려야 할지 고민입니다.”
행복한 고민이네. 그냥 아무거나 줘.
“레이스 달린 거 빼고 다 좋아.”
“…그럼 이건 빼 두겠습니다.”
있었구나, 레이스.
“이것부터 입어 보시겠습니까?”
“그냥 그걸로 하자.”
마린은 어두운 군청색 예복을 내밀었다. 금색으로 테를 두른 예복은 깔끔하면서 예쁜 게 적당했다.
“이제 끝났….”
말끔하게 예복을 입은 뒤 끝난 줄 알았는데 마린이 머리빗을 들고 왔다.
안 끝났구나.
“곧 끝납니다.”
“응, 알았어.”
찰랑이는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다음 얇은 리본을 달아 줬다.
이 정도면 끝났겠지 싶어 마린의 눈치를 봤지만, 마린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왜…?”
“입술이요. 지금도 붉으셔서 꽃물을 바를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안 발라도 돼. 젠은 내 입술이 제일 이쁘댔어.”
“어머, 정말 그러셨어요?”
“말로는 안 그랬는데 항상 내 입술 보잖아. 이쁘니까 보는 거 아니겠어?”
“….”
마린의 냉담한 반응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래, 방금은 너무 눈치 없는 발언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젠의 눈빛은 뽀뽀하고 싶은 눈빛이었던 거. 내가 먼저 덮칠까 했는데 양심에 찔려서 관뒀었다.
“농담이야. 화가는 와 있어?”
“네, 별궁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가자.”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상태를 확인한 뒤 화가를 만나러 별궁 중앙으로 나갔다. 별궁 중앙에는 붉은색 벨벳 쿠션이 달린 거대한 소파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제노아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피는 시기도 아닌데 이건 어디서 가져왔대.”
“젠 님이 말하시길, 황자님께서 좋아하실 거라 하기에 구해 봤습니다.”
그랬구나.
활짝 피어 있는 푸른 제노아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 무언가가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헉!”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화도구를 전부 떨어트린 채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젊은이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가 오늘 오기로 한 화가인가.”
“예, 예…! 제가 화가입니다! 바르카라 합니다!”
“반갑네. 오늘 잘 부탁하지.”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죽을힘을 다해 황자님을 그리겠습니다.”
바르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동그란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