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21)
심심하다. 엄청 심심하다.
마린은 점심을 준비한다며 가 버렸고, 이곳에 남은 사람은 피사체인 나와 화가인 바르카뿐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두 시간 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를 그리는 바르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분석하며 붓을 놀리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말 상대도 없고, 하는 것 없이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나도 심심해 바르카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수천 번을 고민하다 결정지었다.
“그대는 한나의 오랜 친구라지?”
“….”
반응이 없다.
“…바르카?”
“….”
바르카는 온 정신을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바르카!”
“예, 예!”
큰소리로 바르카를 부르자 바르카는 그제야 내가 부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르카는 그리던 붓을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조금 쉬어도 괜찮은가? 몸이 굳은 것 같군.”
바르카가 너무나도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배려를 못 했습니다. 황자님께서 너무… 너무… 미(美)의 집합체 같아 혼이 나갈 지경이라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그런 제가 아름답다 생각한 사람은 황자님이 처음입니다.”
바르카의 말대로 호감을 얻으려는 아부가 아닌지,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눈이 점점 빛이 나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한나에게 처음 들었을 땐 믿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예뻐 봐야 얼마나 예쁘겠냐는 의구심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스쳐 가듯 황자님의 모습을 뵙고 나서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 들었습니다. 3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
“황자님을 뵙고 나서 개안을 했습니다! 막혔던 작품을 하나둘 완성하기 시작했고, 제 모든 걸 뿜어 냈습니다!”
바르카는 내 앞에 조신하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듯 제대로 주접을 떨려는지 몸을 바로잡았다.
“황자님을 뵌 다음부턴 제 안에 있던 무언가가 크게 움직였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럽지만, 제겐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재능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림을 그리는 하루하루가 무료해지기 시작했는데, 황자님을 뵙고 세상이 반짝이지 뭡니까!”
난 분명 쉬고 싶다 했는데 어느샌가 경외의 눈빛을 보내는 바르카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것도 정자세로. 아, 허리 아프다.
“그렇게 속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습니다. 그러곤 더 이상 그림에 대한 의욕이 생기질 않았습니다. 혹시 황자님을 뵙게 된다면 다시 한번 영감이 솟구치지 않을까 하여 황자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랬었구나.”
“그리고 오늘 황자님의 미소를 본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세상을 구성하는 색채가 풍부해졌습니다. 황자님의 머리칼 한 올 한 올을 제 그림 안에 전부 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이상하게 프러포즈를 받는 기분이었다. 절절한 사랑 고백과는 다르게…. 모르겠다. 바르카의 말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예술가라 그런지 의미 모를 말도 하는 것 같고.
“그대에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
“예! 황자님은 제 뮤즈입니다!”
뮤즈, 재능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정말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제 작품을 보러 와 주시겠습니까? 황자님께 보여 드릴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들고 오고 싶었지만 많기도 하고, 크기가 너무 커 황궁 안으로 들고 올 수 없었습니다.”
바르카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노반이 생각났다. 꼭 젠에게 사탕을 뺏긴 노반의 표정이었다.
“그래, 나중에 보러 갈 테니 지도를 남겨 주게.”
“예! 꼭 보러 와 주십시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줄 알았건만, 나를 칭송하는 바르카의 말은 끝나질 않았다. 한참을 듣고 있자니 바르카에게 친근감이 들기 시작했다.
“황자님은 어쩜 그렇게 아름다우신 겁니까? 제가 작년 이맘때쯤 모로칸 왕국에 갔었는데, 그때 어떤 공작부인이 거금을 줄 테니 자신의 딸아이를 그려 달라 했었습니다. 자신의 딸아이는 아름다우니 제 미관에 딱 알맞을 거라더군요. 확실히 그 영애는 제가 봤던 영애들 중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알고 보니 대륙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영애였더라고요. 하지만 그 영애의 아름다움은 황자님의 아름다움에 발톱만큼도 미치지 못합니다. 황자님은 도대체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
“세네카같이 큰 제국이라면 황자님의 아름다움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런 외관을 가지시고도 알려지지 않았는지…. 제가 황자님을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귀가 아프다. 바르카는 텟의 쌍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말이 많았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바르카는 미소년인지 미소녀인지 모를 정도로 중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로도 성별을 판별 못 할 정도로 중간에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냥 단순하게 궁금했다.
“그대는 남성인가?”
바르카의 말을 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에 바르카는 신나게 떠들던 입을 꾹 다물곤 차분해진 눈동자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제가 남성으로 보이십니까?”
“잘 모르겠네. 여성으로 보이기도 하고, 남성으로 보이기도 해.”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이니까.
그에 바르카는 나와 마주쳤던 시선을 피하곤 고개를 숙였다.
아, 뭔가 잘못 건드린 건가.
“…신경 쓰이십니까?”
“아니, 그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어. 성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에 바르카는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별로 좋은 주제는 아닌 것 같으니 다른 주제로 돌려야겠다.
“내 형님들을 알고 있는가?”
“형님…이라 하심은.”
“로이븐 황태자, 메이븐 2황자, 퍼디스 3황자를 말하는 거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전부 수려하신 외모를 가지셨다죠? 황자님들은 잘 모르지만 멀리서나마 세네카의 황제 폐하를 뵌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제 미관에는 맞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음? 맞지 않는다고? 내 기준에 라이언 황제는 수려한 쪽이다. 살짝 근육질인 미중년. 내가 살던 세계였다면 할리우드 배우로 잘 팔릴 상이던데.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내 모습에 바르카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어둡다고 해야 하나… 잘은 모르겠지만 황자님처럼 심장을 난도질하는 느낌이 오진 않았습니다.”
“그랬구나.”
심장을 난도질하는 느낌이라니. 잘은 모르겠지만 처음 내가 젠을 봤을 때 훅하고 들어온 느낌 같은 건가? 무쇠 주먹으로 심장을 처맞은 느낌이 들긴 했었지.
사실 아직까지도 젠의 얼굴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옛날 북쪽 저택에서 지낼 때 젠의 얼굴을 직격으로 보고 심장이 하도 뛰어서 ‘이런 게 사랑인가!’ 싶은 날도 있었다. 그냥 얼굴 보고 설렌 거였지만, 지금은 그때 같은 가벼운 마음이랑은 다르다.
“그대가 한나와 친구라면 그녀의 오라비인 젠도 보았을 텐데. 젠을 보고는 그런 느낌이 들진 않았나?”
“…그분은 멋지기는 하지만 좀 무서운 것 같습니다. 풍기는 분위기나 항상 짓고 있는 무표정이 여러모로 차가우신 분이라 제 미관에는…. 무지 멋지시죠! 전 그분처럼 남성적이고 잘생기신 분이 참 좋습니다! 황자님처럼 아름다우신 분과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바르카는 가라앉는 내 표정을 보자 혹평을 하려던 젠의 평가를 단숨에 호평으로 바꾸었다. 나와 젠과 관련된 소문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바르카가 해 주는 젠의 칭찬에 작게 웃자 바르카는 웃음을 짓는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 바르카가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그, 그나저나 세네카의 황자님들 이야기는….”
“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형님들의 이야기를 하다 라이언 황제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젠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주제가 너무 휙휙 바뀌네. 아무튼.
“사실 하대가 익숙하지 않아서 말이네. 편히 말해도 되겠는가?”
“예, 그럼요! 편히 하십시오.”
바르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의 오랜 친구고, 멀리서 봐도 착해 보이고, 날 엄청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내 민감한 이야기를 해도 될 것 같았다.
“나와는 다르게 형님들은 잘 알려져 있지? 사절단에 껴서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예, 프레오나엔 로이븐 황태자가 오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맞아, 그럴 거야. 여기저기 얼굴을 비치는 형님들과 다르게 나는 황궁에서만 있었어. 자랑스러운 황자는 고사하고 인정받을 만한 황자도 아니었거든.”
바르카는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내 어머니의 가문은 반역자로 몰려 멸문했어. 나는 황제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고.”
“아….”
“난 세네카에서 아무 쓸모없는 황자니까 프레오나에 볼모로 온 거지. 이 정도 말했으면 내가 왜 알려지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있지?”
“아닙니다! 황자님은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십니다. 쓸모가 없다뇨!”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며 진심을 다해 말하는 바르카가 고마워 소리 내어 웃었다.
“고마워.”
“진심입니다!”
“진심인 거 알아. 나도 진심이야.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으. 허리야.
“헛! 뻐근하셨어요?”
“이젠 괜찮아. 넌 안 쉬어도 돼?”
고개를 꺾으며 남은 뻐근함을 없앴다. 한결 가벼워진 몸에 다시 소파에 앉아 자세를 잡았다.
“네! 전 괜찮습니다. 아, 이제 편히 계셔도 됩니다. 테는 다 그렸으니 색만 입히면 됩니다.”
“자세를 잡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네, 이제 편히 계셔도 됩니다.”
바르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곤 놓았던 붓과 회중시계를 들었다.
이왕 말도 편하게 했으니 자세를 풀어도 될 것 같아, 소파에 등을 푹 기대 녹은 슬라임처럼 늘어졌다.
아- 편하다.
“미르 님.”
밥을 준다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운 강아지처럼, 젠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단숨에 일어나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젠!”
“기다리셨어요?”
자신을 환하게 반겨 주는 나를 본 젠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줬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다정하고 센스도 넘친다. 나를 보러 오기 전에 먼저 씻고 왔는지 땀 냄새가 아닌 항상 젠에게서 나는 부드러운 향이 났다.
“잘하고 왔어?”
“네, 점심은 드셨나요?”
“아니, 아직.”
“그럼 저랑 같이 먹어요.”
응, 좋아.
젠이 내민 손을 잡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젠이 유독 반가워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오늘 아침엔 젠이 훈련에 일찍 나가 보지도 못했고, 어제저녁에는 내가 일찍 잠들어 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내 환한 웃음에 젠은 나와 지그시 눈을 마주치곤 함께 미소 지어 줬다.
“노반은?”
“먼저 올라가서 낮잠 자고 있어요. 많이 피곤한가 봐요.”
“그래…?”
강철 체력 노반이 지쳐서 잠을 잔다고? 얼마나 굴렸으면….
“이제 갈까요? 시종에게 미리 말해 뒀으니 바로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내 손을 잡은 젠이 식당으로 바로 가려 했기에 그를 멈추려고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바르카도 같이 가야지.
바르카를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바르카는 멍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바르카?”
“아, 별거 아닙…. 헣….”
바르카가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곧이어 바르카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바르카! 너 코피!”
“억! 전 괜찮습니다!”
멀쩡하다는 바르카는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아까까지 멀쩡했는데 왜 갑자기 코피를….
“먼저 가시면 뒤따라가겠습니다!”
바르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따라가 봐야 하나…?”
“괜찮을 거예요.”
코피를 흘리며 나간 바르카가 신경 쓰이지 않는지, 대충 대꾸한 젠은 내 손을 잡고 식당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