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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01화 (101/227)

101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22)

젠은 내 손을 잡고 식당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식당에 도착하자, 데이지는 기다렸다는 듯 음식을 가득 담은 트레이를 끌고 왔다.

“와, 오늘도 맛있는 거네.”

“네, 점심은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있습니다.”

데이지는 손에 두꺼운 흰 수건을 감은 뒤, 트레이에 있는 음식을 내 앞으로 하나하나 옮겼다.

“이 접시는 뜨거우니 조심하십시오.”

“응, 고마워.”

2인분으로 보일 만큼 새우와 홍합이 가득 담겨 있는 해물 샐러드, 그리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모짜렐라 치즈를 듬뿍 뿌린 음식이 놓였다. 치즈가 노릇하게 녹아 있는 게 접시째로 오븐에 들어갔다 나온 그라탕이 아닐까 한다.

포크를 들어 녹아 있는 치즈를 찢었다. 치즈가 포크에 눌어붙어 쭈욱 늘어났고, 그 안에는 붉은색의 소스를 덮은 미트볼이 담겨 있었다.

“이건 무엇이지?”

“비아토와 허브를 졸여 만든 소스입니다. 고기가 들어가 깊은 맛이 납니다.”

“오호.”

토마토소스라는 거지?

토마토소스를 잔뜩 묻힌 미트볼을 포크로 갈랐다. 그러자 갇혀 있던 육즙이 줄줄 흘러나왔다. 와, 대박.

“고기는 따로 구운 다음에 소스를 입혔습니다.”

“응. 맛있어 보여.”

미트볼과 토마토소스, 그리고 치즈를 한데 모아 입 안으로 넣었다.

겉은 단단하고 속은 부드러운 묵직한 고기가 달짝지근하면서도 깊은 토마토소스의 맛을 살려 주었고, 고소하고 짭짤한 치즈의 맛까지 어우러져 더욱 풍미를 살렸다.

마치 미국에서 팔 법하다. 치즈가 듬뿍 들어간 엄청나게 큰 미트볼을 먹은 기분이었다. 다 좋은데 아쉬운 게 있다면 탄수화물이 없다는 거다. 스파게티 면이라든가 밀가루로 만든 무언가가 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음에 쏙 드는 메인 요리를 와구와구 먹으며 해물이 가득 들어 있는 샐러드로 손을 옮겼다. 새콤한 드레싱 소스를 적당히 뿌린 새우와 푸른 채소를 같이 먹으라는 말에 숟가락을 가져와 재료를 모두 올려 한꺼번에 입 안으로 넣었다.

새우의 식감이 쫄깃했고, 새콤한 소스와 푸른 채소의 아삭함이 별미였다.

“프레오나는 주 식단이 육류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해물은 어디서 가져오는 것이지?”

“바다와 가까운 도시에서 조달해 옵니다. 조금 멀긴 하지만 항상 싱싱한 상태로 오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

우리 저택과 가까이에 있는 크로스반 영지에서 조금 더 가면 바다가 나온다. 프레오나의 북쪽은 바다와 가깝지만, 해류가 빠르고 강풍이 불어 배를 타고 나가기엔 굉장히 위험하다. 반대로 동쪽은 산을 끼고 있어 짐승이 살기에는 적절한 환경이다. 그 때문에 프레오나는 물고기보단 육지 고기가 주식이다.

“그러고 보니 노반, 밥은 먹고 자는 거야? 깨워서 먹여야 하나?”

“하루 이틀 굶는다고 죽는 아이가 아니니 괜찮을 거예요.”

젠은 자신 앞에 놓인 샐러드를 먹으며 담담히 말했다. 아무리 드로이프가 튼튼한 종족이라고 하지만, 내 여우는 삼시 세끼 꼬박꼬박 전부 챙겨 먹는 아이인걸.

“이따가 깨워서 먹여야겠어.”

“네, 지금은 자게 내버려 두세요.”

밥보다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노반을 지금 깨울 생각이 없다. 어지간히 피곤하니 자는 거겠지.

노반 걱정을 끝내며 메인 요리를 전부 먹은 뒤, 샐러드를 먹었다. 유독 내 샐러드에만 새우가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아 새우 두 개를 포크로 찍어 젠에게 내밀었다.

“젠, 아 해 봐.”

젠은 내가 내민 포크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벌렸다. 나는 젠의 입 안에 포크째로 새우를 집어넣었다.

앙. 젠은 포크를 입에 문 채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늦어서 죄송합니…아, 잠시….”

용무를 보고 왔는지 깔끔한 모습으로 식당에 들어온 바르카는 왜인지 다시 입을 막으며 밖으로 나갔다.

“바르카, 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불치병이라든지….”

“글쎄요. 그나저나 배가 부르신 건가요? 먹기 싫다고 저한테 넘기시면 안 되죠.”

남은 샐러드를 전부 젠에게 먹이려던 계획이 들통났다. 젠은 내가 들고 있던 포크를 빼앗았고, 샐러드를 조금씩 찍어 내게 먹여 줬다.

“나 이제 배불러. 안 줘도 돼.”

“항상 노반에게 넘기니까 그렇죠. 반만 드세요.”

“음….”

젠의 말대로 항상 노반을 무릎에 앉히곤 내 몫의 음식을 먹였다. 덕분에 노반이 없는 오늘은 평소보다 남기는 양이 많았다. 하지만 내 좁은 위장은 그대로인걸.

진짜 배불러.

“나 진짜 배불러. 터질 것 같은데?”

“안 돼요. 조금씩 많이 먹는 노력을 하셔야죠.”

“으윽….”

젠이 먹여 주는 대로 먹다 보니 샐러드를 벌써 반이나 먹었다. 배가 꽉 찬 것 같아 속이 더부룩했지만, 젠이 먹여 줘서 그런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걸 행복한 포만감이라고 하나…?

“아 참, 내일도 훈련 가야 해?”

“내일….”

아, 일정이 있나 보다.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 내용만 전달하고 바로 돌아올게요. 그럼 미르 님과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어요.”

“진짜?”

“네, 그럼요. 내일은 계속 같이 있어요.”

내일은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줄 거라는 약속을 받았다. 한동안 훈련으로 바빠서 얼굴 볼 시간도 없었는데 다행이다.

“곤란한 건 아니지?”

“절대요. 저 하나 없다고 곤란해질 기사단이라면….”

그리 말한 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스산하게 웃었다.

…아무튼, 기사단이 죽든 살든 내 알 바 아니다.

내일은 젠도 있으니 로테 별궁을 조금 더 깊이 조사해 봐야겠다.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곳은 둘러보기도 무섭지만, 젠과 함께라면 덜 무섭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젠이 이끄는 대로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산책이라도 할까 싶었다. 우리가 나갔다 오는 동안 바르카도 점심을 먹겠지.

“으아! 바깥공기 마시니까 좋다.”

겨울이 턱밑까지 다가와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태양 빛이 있어 그리 춥진 않았다.

높이 자란 나뭇잎도 슬슬 떨어지기 시작하고, 푸르던 덤불의 색도 하얗게 변했다. 얇았던 시종들의 옷차림도 한층 두껍게 바뀌었다. 이곳은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

“많이 피곤하셨어요?”

“아니. 가만히 있는 게 뭐가 피곤해. 안 움직여서 몸이 조금 굳은 거뿐이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그에 나를 빤히 보고 있던 젠이 가까이 다가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잡곤 약하게 주물렀다.

계속 느꼈던 거지만 젠은 어떤 상황이든 내 몸을 강하게 잡지 않는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꽉 잡은 적은 있지만 아플 정도로 꽉 잡지 않았다. 내가 뽀각 하고 부러질 거라 생각하는지 내 몸을 잡을 땐 작은 병아리를 쥐듯 항상 조심스럽게 잡았다.

“젠. 손 쫙 펴 봐.”

“손이요?”

“응. 이렇게.”

젠을 향해 내 손을 쫙 폈다. 곧이어 나를 따라 하는 젠의 손에 깍지를 끼며 강하게 잡았다.

“세게 잡아 봐.”

“안 돼요.”

“한 번만 해 봐.”

“안 돼요.”

“괜찮으니까 한 번만 해 줘.”

깍지를 낀 그와 나의 손을 빤히 보고만 있는 젠에게 괜찮다며 한 번만 잡아 달라 애원했다. 원래 애원할 생각까진 없었지만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절대 안 돼요.”

“왜 안 돼. 그냥 시험 삼아 해 보는 거야.”

이 쓸데없는 짓에 왜 열을 올리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겠다.

젠을 향해 강렬하게 시선을 보냈다.

‘안 해 주면 나 삐질 거야. 아니, 화낼 거야.’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젠은 짧게 한숨을 쉰 뒤, 잡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나도 하겠어. 더 세게 잡을 수 있잖아.”

“안 돼요.”

방금 전, 젠이 내 손을 잡은 악력은 고작 물렁한 복숭아를 짓이길 만한 정도였다.

젠이 전력을 다해 잡으면 내 손은 엉망진창으로 뭉개질 거란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잡아 주면 좋겠다.

너무 어린애 같나.

“그냥 세게 꽉 잡아 주면 안 돼? 궁금한데.”

“아프다고 우시면 어떡해요.”

이어지는 젠의 말에 정적이 흘렀다.

요즘 해이해져서 그런가. 수많은 좌우명 중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호기심이 지나치면 위험하다.’

서둘러 깍지 낀 손을 떼려 했지만 젠은 내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아프지 않게 손아귀의 힘을 느슨하게 뺐다.

“나… 이해했어. 이제 안 그럴게.”

“미르 님이 원하신다면 제대로 잡아드릴게요. 손은 며칠 못 쓰시겠지만, 미르 님 곁에는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많으니 아마 괜찮을 거예요.”

젠의 표정은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산뜻했다.

며칠은 무슨, 한 번 뭉개진 손은 평생 못 쓸 것이다.

“난 아직 이 손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을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오스먼드의 면상을 쳐 주는 거다. 그전에 이 손이 망가지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그리고 노반을 쓰다듬어 줘야 하고, 마린이랑 같이 요리도 하고… 이 손을 써서 젠이랑 할 일도 많단 말이야!

입술을 꾹 다물고 결의를 다졌다. 내 손은 소중해!

“농담이에요. 제가 미르 님께 해를 입힐 리가 없잖아요.”

젠은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젠의 손이 맞닿은 곳에 시원한 바람이 스쳤다.

“제 악력이 궁금하신 거라면… 아, 이건 어떤가요?”

젠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정원에 쌓여 있는 벽돌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벽돌은 겨울바람을 대비해 담벼락을 세우는 용도로 쓰일 것 같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벽돌과는 다르게 나와 젠의 얼굴을 합친 것만큼 두꺼운 벽돌이었다.

“그건 뭐하게?”

젠은 그 큰 벽돌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곧이어 쩌억- 금이 간 벽돌은 사방으로 튕겨 나가며 으스러졌다.

깝치지 말아야지.

“이 정도면 호기심이 채워졌을까요?”

“응. 완전.”

힘을 강하게 쥔 것 같지도 않았다. 젠은 아주 쉽게 대왕 벽돌 하나를 으스러트릴 수 있는 남자였다. 하긴, 오우거도 단숨에 잡는데 벽돌 정도야.

“원하신다면 하나 더….”

“아니야! 괜찮아. 이제 들어가자, 나 더 안 봐도 돼.”

다시 벽돌을 집으러 가는 젠의 팔을 꽉 잡곤 별궁 안으로 이끌었다. 그에 젠은 내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고집부리지 말아야겠어. 요새 노반이랑 가까이 있어서 그런가 성격이 조금 별나진 것 같지 않아? 마치 아이 같아.”

“편해졌다는 거 아닐까요? 아이 같은 장난도 미르 님이 느끼기에 지금이 편하니 하는 거죠. 예전처럼 잔뜩 긴장했을 때엔 눈빛도 그렇고 분위기가 어두웠으니까요.”

“그런가.”

“네, 전 지금의 미르 님이 좋아요.”

젠은 어느샌가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해 줬다. 그의 손이 스친 귓바퀴가 마른 장작에 불을 지핀 듯 빠르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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