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23)
#102
“부, 부탁드립니다!”
별궁으로 돌아온 순간, 헐레벌떡 달려온 바르카가 젠과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상황 파악이 어려웠다.
“바르카! 얼른 일어나. 이러지 말고 일어나서 말로 해.”
놀란 마음에 바르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하지만 조그마한 게 왜 이렇게 무거운지 내 힘으론 바르카를 끌어 올리지 못했다.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면 들어줄게.”
부탁을 들어주기 전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무릎을 꿇은 바르카와 눈을 마주했다. 그에 바르카는 절실한 눈빛을 하며 별궁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두, 두 분을 제 그림에 담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그림?
그림은 무슨 그림인가 하며 의문을 가진 순간, 아까와는 뭔가 달라진 위화감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아까 전 바르카가 앉아 작업했던 자리에 거대한 캔버스와 이젤이 함께 세워져 있었다.
저건 또 어디서 가져온 거래?
“그림 정도야 뭐… 난 괜찮아. 젠은?”
“완성작은 어쩔 셈이지?”
바르카가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나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젠은 아니었다. 젠은 무릎 꿇고 있는 바르카에게 냉정하게 물었다.
바르카는 차가운 젠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물론 황자님께 바칠 겁니다! 전 그저 황자님을 그리고 싶을 뿐입니다. 돈도 필요 없으며 황자님을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명성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황자님을 저 큰 캔버스 위에 그리게만 해 주신다면…!”
바르카는 날 그리는 걸 허락해 주지 않으면 콱 죽어 버릴 거라는 듯 절실함을 가득 담아 내뱉었다.
저렇게 애절한데 소원대로 해 주자….
“근데, 내 초상화를 그리는 데 젠도 필요한 거야?”
“넵! 꼭 필요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이프리트 경을 바라볼 때의 황자님은 마치…마치 세상 모든 행복을 모아 둔 정원이랄까. 너무 아름답고 역동적이었습니다.”
“….”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런 황자님을 보고 제가 느낀 감정은 죽기 전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마치 하찮은 인간이 천사의 하얀 날개를 보고 벅찬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천사가 있다면 여기 계신 황자님이 아닐까요?”
나도 한 주접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바르카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내 주접은 주접도 아니었다. 주접의 신이 있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르카가 그 현신일 것이다.
“그래, 원하는 만큼 그려.”
“정말 감사합니다! 반드시 황자님의 마음에 들 만한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
..
허락을 받은 바르카는 역작을 그린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그리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캔버스 앞으로 가서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바르카, 다 그리려면 대충 얼마나 걸려? 나와 젠이 계속 앉아 있을 순 없을 것 같은데….”
“30분만 제 앞에 계시면 됩니다. 30분이면 충분합니다.”
30분만 바르카의 앞에 앉아 있으면 우리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고 한다. 바르카는 사진을 찍듯 기억을 저장하는 완전 기억 능력을 가지고 있나 보다. 그걸 진짜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구나.
“완성 기간은 한 달만 주십시오!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그 정도면 돼? …이 정도로 큰 사이즈의 그림을 완성하려면 보통 두세 달은 족히 걸리지 않아?”
“전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하루도 더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연필을 재빨리 깎은 바르카는 우리에게 다가와 자세를 잡아 줬다.
1인용 소파에 젠을 비스듬히 앉힌 다음, 나에게 젠의 오른쪽 허벅지에 걸터앉으라고 지시했다. 왼손은 젠의 목을 감싸고, 오른손은 젠의 어깨를 잡으라고 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하며 자세를 잡았지만 젠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자 당당함이 싹 가셨다.
“음… 황자님이 손을 내리고, 이프리트 경이 황자님의 뺨을 감싸는 게 더… 으음….”
바르카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질척하면서도 상큼한 분위기를 내고 싶다며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각을 쟀다.
“그러지 말고, 황자님과 젠 님에게 맡기는 건 어떠신가요?”
“아, 로테스 양!”
바르카는 스르륵 나타난 마린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게다가 호칭도 마린이 아닌 로테스 양이었다. 마린이 자신을 소개할 때엔 웬만하면 ‘마린’이라 소개하지 ‘마린 로테스’라고 하지 않는다. 가문의 이름을 알려 줄 정도로 바르카가 마음에 든 건가?
“황자님과 젠 님은 자연스러울 때가 제일 빛날 겁니다.”
“과연! 그렇군요!”
바르카는 깨달음을 얻은 중생의 눈빛으로 마린을 우러러봤다. 감히 짐작해 보건대 마린과 바르카의 관계는 내 팬클럽 회장과 클럽의 회원 같은 관계가 아닐까 한다.
“미르 님.”
화기애애한 바르카와 마린을 멍하니 바라보자 바로 옆에서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은 내게 왼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 손 잡을까요?”
그의 손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좋아.”
한 손은 젠의 목을 두르고, 한 손은 젠의 손을 맞잡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자세를 잡으니 훨씬 자연스러웠다. 내 허리를 잡은 젠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 조금… 간지러운데….”
허리를 비틀며 미적거리자, 나와 눈을 마주친 젠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동시에 재킷 안으로 들어온 젠의 손이 얇은 셔츠 위를 쓸어내렸다. 척추뼈를 따라 움직인 그의 손길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꼿꼿하게 일어나서는 느낌이 들었다.
“하읏…!”
“….”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신음에 별궁 중앙은 정적에 휩싸였다.
놀란 마음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젠을 바라보니, 젠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개진 게 느껴졌다. 잡고 있던 젠의 손을 놓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쥐구멍이 있다면 바로 달려가 숨고 싶을 정도였다.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이렇게 민감하신 줄 몰랐어요.”
날 달래 주는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젠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마음껏 수치스러워했다.
“으아아악…. 내가 무슨 소릴…. 이대로 죽어도 좋아…. 쥐구멍 어디 있어….”
“제가 잘못했어요.”
“아!”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이 떠올랐다. 젠에게 파묻었던 고개를 팍 들고, 마린과 바르카를 향해 소리쳤다.
“<오블리도!>”
주문을 외우자, 마린과 바르카를 향해 노란빛이 뿜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내 빛은 그들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으아악!”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역시 상대를 조종하는 고급 마법을 쉽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괜히 마나만 낭비했다.
젠장! 앞으로 마린 얼굴을 어떻게 보지?
“시간을 돌리고 싶어….”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젠은 수치스러워하는 내 머리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10분만 이러고 있을게….”
“네.”
수치심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억울하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자아를 가진 뒤부터 남에게 보여 주기 민망하고 말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 적은 청소년 관람 불가인 영상을 본 것밖에 없다. ‘하읏’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낼 만한 짓은 재물신에게 맹세코 한 적이 없다.
영상에서 나온 배우의 소리는 ‘헛!’이라거나 ‘으헉!’이 전부던데 왜 난 ‘하읏!’이냐고!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로, 로테스 양, 남는 캔버스가 있다면 주시겠습니까?”
“네, 그럼요.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바르카와 마린은 잔뜩 쪼그라든 내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젠 님은 지금처럼 황자님을 잘 달래 주시면 됩니다.”
마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우리를 그리려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게 쥐구멍을 줘….
“미르 님, 괜찮아요. 바르카와 마린은 멀리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을 거예요.”
“너도 들었잖아….”
“저한테도 부끄러우신가요?”
당연하지. 제일 부끄럽다.
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곤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내 이마 위로 손을 올려 고갯짓을 멈추게 했다.
“괜찮아요. 미르 님이 원하신다면 저도 똑같이 내 볼까요?”
나랑 똑같이 신음을 내 주겠다고?
“어…?”
“원하신다면요.”
“아,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젠까지 망가지게 할 수야 없지. 망가진다면 나 하나만 망가지는 게 낫다.
젠에게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려, 다정한 그의 눈을 마주 봤다.
“이제 괜찮으세요?”
“응, 놀라서 그런 거야. 소리가 조금 거시기 하긴 했지만… 내가 내고 싶어서 낸 게 아니야.”
“네, 알고 있어요.”
젠은 내 손을 다시 잡으면서 자기 잘못이라며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부끄러운지…. 그래도 괴상한 신음을 들은 사람이 젠과 마린, 그리고 바르카뿐이라 다행이다. 아직 어린이인 노반이라든가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모터 주둥이를 장착한 텟이 들었다면… 어흐,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근데 쟤네 뭐 해?”
“글쎄요.”
바르카와 마린은 캔버스를 보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 우리를 그리는 것 같은데, 우리를 그리는 것만으로 저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나?
“앗! 천사님! 아니, 황자님! 깨어나셨군요!”
“아까부터 깨어는 있었는데… 천사님은 뭐야?”
마린이 여분의 캔버스를 가져다준 것인지, 바르카는 자신의 몸만 한 캔버스를 낑낑거리며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르카가 보여 준 캔버스 안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
캔버스의 절반에 달하는 큰 날개를 펼친 천사가 인간 남자의 무릎에 앉아 그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고 있고, 인간 남자는 천사를 껴안고 있었다. 이상한 그림이었다. 아직 연필로 스케치만 그린 거라 완성작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나와 젠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거 나랑 젠이야?”
“네!”
“작품 설명 좀 해 줄래…?”
내게 이해 좀 시켜 주겠어?
떨떠름한 느낌에 바르카에게 물었다. 그에 바르카는 잠시 작품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각성한 듯 눈을 반짝 빛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천사를 붙잡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천사는 하늘로 올라가려 날개를 펼쳤지만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떠나지 못하는 거지요. 지금은 보이지 않겠지만 눈물도 그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기적인 생물이라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천사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가지 말라고 잡고 있는 겁니다.”
방금 전까지 수치스러웠던 사건은 바르카의 그림 설명 덕에 금세 잊혔다.
와, 쟤 진짜 미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