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03화 (103/227)

103 로테 별궁에서 머물다 (24)

작품 설명을 마친 바르카는 자리로 돌아가 우리를 관찰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봐야 더 기억에 남는다고, 조금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가만히 있기 불편하더라도 참아 달라 부탁했다.

“딱히 불편하진 않은데… 쟤가 뭘 그릴지가 걱정돼.”

“제대로 그려 줄 거예요. 저래 보여도 프레오나에서 제일 실력 있는 화가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래?”

의외였다. 날 그리러 왔으니 제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건 알았지만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줄은 몰랐다. 선입견이지만, 바르카가 어려 보이기도 하고, 단순히 나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덕질하러 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기야, 덕질도 재능으로 하는 거지.

“예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세네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화가라더군요.”

“오호.”

세네카의 이름이 나오니 바르카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됐다. 사실 세네카에는 딱 하루 있어 봤지만, 황궁이라든가 수도의 거리가 ‘나 예술의 제국이요!’ 하는 것처럼 번쩍번쩍해서 세네카가 예술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제국에서 다른 제국의, 그것도 ‘적국’의 화가가 손에 꼽힐 정도의 예술가로 불린다면 어지간히 실력 있는 화가라는 거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미르 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 나왔다면 저쪽에서 먼저 찢어 버릴 테니까요.”

프로 정신인가 보다.

음악가들도 작곡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정성 들여 음표를 그린 오선지를 구겨서 태워 버린다고 들었다. 그것처럼 화가도 그림을 그리다 마음에 안 들면 찢는 거 아닐까? 예술 정신이 없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들였던 노력이 아까울 뿐이다.

사실 바르카가 그린 그림이 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냥 받을 생각이다.

“어차피 걸어 놓을 곳도 마땅히 없어. 저 그림들은 아공간 주머니에 박혀 있겠지.”

“걸어 놓을 곳이 왜 없어요. 제 방에 걸어 놓을 거예요.”

젠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젠의 방은 프레오나 황궁이나, 북쪽 저택이나 책장이랑 침대를 빼면 텅텅 빈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그림을 걸어 놓으면 훨씬 환해지긴 할 테지만 조금 부끄럽다. 신혼부부가 안방에 결혼식 사진을 걸어 두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부끄럽다.

“안 부끄러울까?”

“전혀요.”

절대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 말한 젠은 살풋 웃었다.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그의 잘생김이 보였다.

“네가 그렇다면 됐고… 근데 앞머리는 안 잘라?”

젠의 앞머리를 만지며 물었다. 젠을 처음 봤을 때랑 길이가 비슷한 걸 보면 계속 관리하고 있긴 한 것 같은데, 이 잘생긴 얼굴을 왜 가리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습관이에요.”

“습관?”

되묻는 내게 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해 줬다.

“처음 영혼의 색이 보였을 때는 혼란스러웠어요. 어떻게 하면 안 보일까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 봤는데 결국 안 되더라고요. 눈을 가리면 조금 덜하길래 그때부터 이렇게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랬구나. 지금도 신경 쓰여?”

“아니요, 이젠 다루는 법을 알아서 괜찮지만….”

괜찮지만?

“머리를 자르니 저를 보는 사람이 많아지더라고요. 관심받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게 편해요.”

한마디로 자기 자랑이다. ‘얼굴이 보일 정도로 시원하게 잘랐더니 잘생겨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말이다.

“나도 동감이야. 가능하면 자르지 마.”

라이벌이 많아지면 큰일이다. 젠이 쉽게 넘어가진 않을 것 같지만, 남자든 여자든 젠을 꼬시려고 온갖 여우 짓을 할 텐데 그 꼴을 보고 싶지 않다. 우리 사이가 확실하게 공인이 되기 전까지는 앞머리 절대 못 자르게 할 거다.

“네, 그럴게요.”

사실 굳이 앞머리를 자르지 않아도 그가 잘생겨 보여서 곤란하다. 앞머리가 엄청나게 긴 것도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 끝에 금안이 드러나는데, 이게 또 숨겨진 보석 같다.

잘생긴 사람은 어떻게 해도 잘생김이 가려지지 않나 보다.

“이렇게 잘생겨서 어떡하지?”

“마음에 드세요?”

“응. 엄청.”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서 젠이 제일 잘생겼다고 말하며 젠과 눈을 맞췄고, 그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세르비스보다요?”

셀비스? …셀비스가 갑자기 왜 나와. 아, 혹시 미네르바 때문에 억지로 ‘이프리트보다 세르비스가 더 잘생겼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직 마음에 담고 있었나? 그 이프리트가 젠은 아니라니까.

“걔는 잽도 안 돼.”

“그럼 꽃집 청년은요?”

꽃집 청년? 시아를 말하는 건가? 나와 마린이 시아가 잘생겼다고 노래를 불렀었지.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시아는… 잘생기긴 했지만, 관심 없어.”

“마커스는요?”

“으엑.”

“에반스터 경은요?”

“필릭스는 너무 촐싹거려. 내 취향 아니야.”

“로이 크로스반은요?”

“로이는 너무 어리잖아. 그거 범죄야.”

“에멀슨 공자는요?”

“관심 없어. 그 공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 안 나.”

나와 얼굴을 마주했던 남정네들의 이름을 전부 말하려는지 젠의 질문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남았다.

“오스먼드 폐하는요?”

봐라, 역시 보스는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다.

“절대. 세상이 두 쪽으로 갈려도 관심 없어.”

“그 마음 변하시면 안 돼요.”

아까보다 편한 웃음을 짓는 젠에게 마주 웃어 줬다. 젠은 질투하는 것도 귀엽다.

문제는 질투할 정도로 날 좋아하는데 왜 고백을 하지 않느냐는 거다. ‘제가 갖긴 싫고 남한테 주긴 아깝다.’ 같은 비겁한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왜지?

“전부 기억했으니 이제 움직이셔도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몰라서 젠에게 뾰로통해지려 할 때, 이제 돌아다녀도 된다는 바르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직여도 된다지만 아직 움직이기 싫어 젠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로 바르카를 쳐다봤다. 바르카는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들고 제일 큰 캔버스 위에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정말 모델이 없어도 그릴 수 있나 보다.

“슬슬 노반을 깨울까?”

“이따가요. 저녁에 깨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젠은 자신의 허벅지에 앉아 있는 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오기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러고 가요.”

“어딜 가게?”

“승마장이요.”

“뭐? 너 이러려고 안아 준 거지!”

땅으로 내려 달라고 발버둥 쳤지만 젠은 가볍게 웃을 뿐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내려 주면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젠과 함께 승마장으로 갔고, 언제 소식을 알았는지 펄은 텟과 함께 승마장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적이었네.”

“비슷해요.”

젠은 내게 펄의 고삐를 잡게 했고 한걸음 떨어져 펄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한 바퀴만 돌고 돌아가요.”

“이 넓은 곳을?”

“빠르게 달리면 되죠.”

눈 깜짝할 새 내 뒤로 올라탄 젠이 고삐를 잡은 내 손을 감싸고 고삐를 내리쳤다. 탄력을 받은 펄이 히이잉 울며 승마장을 달렸다.

“이 움직임에 익숙해지세요.”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흐얽!”

펄은 내 뒤에 젠이라는 안전 장치가 있는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더욱 빨리 달렸다. 그동안 달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쌓인 한을 오늘 푸는 건지 적토마가 따로 없었다.

점차 빨라지는 펄의 속도를 줄이려 고삐를 당겨 봤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좀 더 강하게 당기세요. 약하게 당기니 못 알아채는 거예요.”

“아프지 않을까?”

“괜찮아요. 전부 근육이라 아프지 않을 거예요.”

젠의 말대로 조금 더 강하게 잡아당기자 속도가 줄었다. 펄은 힝! 하고 울었다. 내 짐작이지만 빨리 달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 같았다.

“지금 펄이 사과한 거 맞지?”

“속도 줄이겠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런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젠과 나는 펄의 울음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몇 번 탔다고 금방 익숙해지는 거 같아.”

“네. 운동 신경이 아예 없으신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치? 이 몸도 마냥 나쁘지 않아.”

고개를 살짝 돌려 젠을 바라봤다. 나와 눈을 맞춘 젠을 향해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근데 조금 따듯하게 입고 올 걸 그랬어.”

“많이 추우세요?”

“아니, 나 말고 너.”

나는 연미복의 재킷을 입고 있지만, 젠은 검은 셔츠가 전부였다.

“안 추워?”

“네, 전 괜찮아요.”

젠처럼 오러를 다루는 사람은 체온 조절이 자유자재로 가능하단다. 그래서 더울 땐 오러를 움직여 춥게 만들고 오늘처럼 추울 땐 따듯하게 만든단다. 무슨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마법도 있는 마당에 또 말이 안 되는 게 뭐가 있을까 싶다.

“안 추우면 다행이고.”

젠과 함께 승마장 두 바퀴를 돌았다. 원래는 한 바퀴였는데 젠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어영부영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아마 처음부터 두 바퀴를 돌 작정이었던 것 같다.

내가 노반도 아니고 한 바퀴 더 탄다고 회유할 필요 없는데.

“제가 떠난 뒤에도 일주일에 세 번은 타셔야 해요.”

“….”

“아셨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데 억지로 알겠다고 하는 꼴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타는 것도 싫지만, 젠이 곧 떠난다는 말이 더 싫었다. 내가 이런 몸이 아니라 필릭스처럼 마법을 잘 쓰거나 근육질에 힘도 짱짱 세고 그랬다면 젠을 따라나섰을 거다.

지금의 내가 따라가면 걸림돌이 될 뿐이다. 오래 움직일 만큼 체력이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물을 처리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의 힘으론 안 될 게 없다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사랑의 힘은 개뿔, 그냥 힘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말을 잘 타게 되면 어디든 도망갈 수 있어요. 제가 없는 황궁이 싫어지면 펄을 타고 도망가세요.”

젠은 내 손을 꽉 잡아 줬다. 젠의 온기가 차가웠던 손을 따듯하게 데워 줬다.

“어디로?”

“이프리트 백작저로 가세요. 제 방 빌려 드릴게요.”

장난스레 웃는 젠을 마주 봤다. 그 장난스러움 뒤에 진지함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최근의 젠은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이 떠난 뒤,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당장이라도 궁을 떠날 수 있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젠이 날 생각해 주는 건 좋다. 좋은데….

“난 강해. 네가 잠깐 없다고 무너지지 않아.”

“….”

“그러니 걱정 말고 다녀와.”

맞잡은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내 염원을 담아 말했다.

“죽을 것 같으면 너만이라도 도망쳐. 치사하고 못돼 처먹었다 해도 좋아. 네가 잠깐 없는 건 괜찮아. 참을 수 있어. 나는 어른이니까. 그치만 네가 영영 사라진다면… 나는 못 살 것 같아.”

“….”

“그러니까 너만 생각해.”

세상 모든 사람이 욕해도 좋다. 난 내 사람만 멀쩡하면 돼.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