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04화 (104/227)

104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난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다가 뜨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오늘은 젠이 마물을 토벌하러 떠나는 날이다.

함께하는 시간은 금방 갔다. 전장으로 가는 건 젠이지만 정작 소란스러운 건 내 마음이었다. 젠이 조심히 다녀와야 하는데, 다치면 안 되는데, 등등 젠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찼다.

복잡했다.

지금이라도 젠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서 납치해 버릴까? 그럼 토벌하러 가지 않아도 되잖아. 젠 하나 없다고 전멸할 기사단이면 애초에 쓸모가 없는 기사단 아니야?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안 되겠다. 걷기라도 해야지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

별궁의 길은 전부 외워 뒀다. 특히나 1층과 2층은 매일 돌다시피 해 시종들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거다.

지금의 나에게 로테 별궁의 도면을 그려 보라 하면 단숨에 그릴 수 있다. 그런 내가 지하실을 발견하지 못한 게 이상했다. 젠과 열심히 찾았지만, 이상한 골동품을 발견하거나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만 마주쳤을 뿐이다. 황실에 있는 별궁이지만 내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어서인지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곳이 꽤 많았다.

널리고 널린 게 별궁인데 굳이 나에게 로테 별궁을 내줬는지도 의문이다. 세네카의 핏줄이니 그나마 상징적인 별궁을 주려던 걸까.

“로테, 로테….”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동안 읽었던 프레오나의 관한 서적에도 로테 별궁과 관련된 구절은 없었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단서라고는 타루스의 지하실 이야기와 젠이 해 줬던 짤막한 이야기가 전부다.

낮은 층은 이미 둘러봤으니, 로테 별궁의 가장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건 처음이다.

이름 있는 로테 별궁의 꼭대기 층이었지만 별거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 놓인 가구도 없고, 창문도 없었으며, 따로 마련된 방도 없다. 밑층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빛을 의지하며 어두컴컴한 꼭대기 층을 둘러봤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저 50평 남짓한 텅 빈 곳이었다.

창고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청소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다. 이런 덥수룩한 곳에 오래 있다간 병을 얻을 것 같다.

몸을 돌려 벗어나려는 찰나, 스치듯 무언가를 보았다.

어라라?

왼쪽 끝 천장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이런 빛이 보이지 않았었다.

아주 작은 틈이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분명히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위로는 뿔 모양의 지붕이 있을 거다. 사방이 막혀 있는 구조다. 그러니까 그 말은 빛이 새어 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빛을 막고 있는 천장을 쳐보려 노력했지만. 천장이 생각보다 높아 겨우 손이 닿을 뿐 강하게 칠 순 없었다.

“<비엔토>.”

마법을 쓰자 바람이 휙 불어 천장을 치고 나갔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조각조각 부서져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났다. 고의적으로 기물파손을 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처리하진 않을 거다. 난 모르는 일이오.

내가 서 있는 곳이 꼭대기 층인 줄 알았는데, 진정한 꼭대기 층은 따로 있었다.

구멍 난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지만 환한 빛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뿔이 올라가는 모양으로 천장이 솟아 있었다. 이곳도 천장으로 막혀 있는데 빛이 어디에서 오는가 살펴보니, 뿔을 따라 둥글게 작은 틈이 나 있었다. 부식된 것 같진 않고 일부러 빛이 들어오게 만든 것 같았다.

누가 오면 천장을 부신 책임을 물을까 봐 모른 척하고 도망가려 했지만 벌어진 틈에서 환한 빛이 반짝였다. 모래사장에 숨겨진 다이아몬드처럼 아주 작은 반짝임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내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빛이 나오는 곳을 올라가서 보고 싶었지만, 그 위까지 올라갈 힘이 없었다.

밑으로 내려가 의자를 들고 오자니 귀찮고, 괜히 내려갔다가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결국엔 천장이 무너지며 생긴 부산물 중 두꺼운 것들을 골라내 하나하나 쌓아 올려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조심스레 올라타 천장 위에 팔을 걸쳤다.

“후우….”

심호흡을 한 뒤 다리를 강하게 쳐들어 올렸다. 순간적인 힘으로 높게 올린 다리를 천장 위에 겨우겨우 걸친 뒤 몸에 힘을 주곤 한 바퀴 굴러 올라갔다. 지금껏 운동한 보람이 있다. 전과 같이 허약한 몸이었다면 이 높이까지 다리를 쳐들지도 못했을 거다.

뿔 모양 지붕의 아래는 생각보다 넓었다. 다락방 같았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바로 아래층과 똑같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 이상한 거라면 하나 있다. 바닥 한 면을 거울로 깔아 뒀다. 이것 때문에 빛이 반사되어 흘러나온 것 같다.

거울이 왜 여기 달려 있지?

발로 거울을 찔끔찔끔 건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안전한 걸 확인한 후에 쪼그려 앉아 거울을 만지며 살폈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거울은 파사삭 소리 없이 깨지며 드러난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고, 중심을 잡지 못한 나 또한 빨려 들어갔다.

“아니, 잠깐…! 으아악!”

안전장치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기분이었다. 오장육부가 뒤틀어지는 기분에 잠시 정신을 놓았지만 소름 끼치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이 속도로 떨어지다 바닥에 처박히면 난 죽는다.

“<스피시오>”

빠르게 떨어지던 몸이 공중에 멈춘 듯 느려졌다. 주문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으로 절대 쓸 일 없다고 생각했던 주문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쓸 줄은 몰랐다.

문제는….

“언제까지 내려가는 거야.”

끝이 없다.

속도가 느리다곤 해도 5분은 내려온 것 같은데. 이 정도면 30층 정도 내려온 것 같았다. 귀도 조금 아픈 것 같고.

마법을 써서 이 공간의 끝을 확인하고 싶은데 팍 떠오르는 마법이 없다. 게다가 말은 안 했지만, 저번에 썼던 <오블리도> 마법이 실패해서 조금 충격이었다. 물론 연습 같은 걸 하지 않으니 실패할 수도 있지만, 난 이 몸이 마법의 천재인 줄 알았다. 그러니 연습을 잘 안 해도 그동안 성공한 마법이 수두룩한 거고. 심지어 그 어렵다는 영혼의 맹세도 한번에 성공했었는데.

“음… 아, <포이닉스>.”

손끝에서 불새가 날아가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갈랐다. 벽돌로 만들어진 통로 같다. 불새는 끝없이 내려가다 바닥에 부딪혀 무언가를 화르르 태우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저게 뭐야.

5분을 더 내려가 바닥에 안착했다. 천천히 내려간 덕분에 다친 곳 없이 멀쩡했다.

내려온 다음에도 어둠은 여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한번 <포아닉스>를 시전해 주위를 밝혔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어디로 갈지는 정해져 있다. 정답은 위다. 근데 어떻게 올라가지. 마법을 써서 올라갈 수는 있지만 마나가 버텨 줄지 모르겠다. 팔찌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만일 못 버티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 마나가 고갈되면 속도를 줄이는 마법을 쓰지 못할 테니까.

이곳이 여태 그토록 찾았던 지하실 같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젠을 마중해야 하는데 이곳에 박혀 마중 가지도 못하면 분명 걱정할 거다. 망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야 한다.

위로 향하는 길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 포기했다. 지하실이니 돌다 보면 분명 나가는 길이 있을 거다.

벽을 짚으며 왼쪽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발끝에 무언가가 차였는데 자세히 보니 끝이 타 버린 나무줄기였다. 아까 <포아닉스>가 태웠던 게 이 줄기였나 보다. 누가 깔아놨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고약한 사람일 것 같다. 이 줄기는 평범한 줄기가 아닌 가시가 돋친 줄기다. 흩어진 재의 양을 보면 꽤 쌓아놓은 것 같은데, 이 위로 떨어졌으면 완충제가 있어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상처투성이가 됐을 거다.

길이 보이지 않지만, 꾸준히 걸었다. 혹시라도 비밀 장치가 있을까 벽을 잘 살펴 가며, 횃불을 올리는 곳에 불을 붙였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로 왔다면 횃불을 확인하며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횃불을 붙이니 전보다 환해져 걷는 게 수월했다. 횃불대도 건드려 보고, 벽돌을 하나하나 눌러 봤지만 아무 수확 없었다. 그리고 불을 붙여야 할 횃불대에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하….”

위를 보니 뻥 뚫려있는 게, 처음 발을 디뎠던 곳에서 한 바퀴를 돈 것 같다.

하지만… 길은 일직선이었는데?

마법인가?

“어떤 새끼야!”

지하실이 크게 울리게 소리쳤다. 그러자 우르릉 소리와 함께 벽면에 무언가가 새겨졌다. 하지만 읽지 못했다.

“뭐라는 거야.”

혹시라도 상형 문자 같이 그림으로 뜻을 유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아직 사그라지지 않고 내 주위에 떠 있던 불새가 글자를 향해 돌진했다.

퍽! 소리가 나며 불새는 글자를 삼켰고, 지하실은 방금과 같이 진동을 했다.

진동하면 뭔가가 나오거나 무너져야 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그저 진동만 한다. 아, 설마 불새 때문이 아니라 그냥 지진이 난 건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 젠장. 혼자 움직이지 말걸. 이럴 줄 알았으면 젠이랑 같이 올 걸 그랬다. 그럼 젠이 토벌에 가지 못했을 거고, 이곳에서 못 나간다 해도 덜 외로웠을 거다. 조금 더 희망찼을 거고.

“될 대로 되라지. 나도 모르겠다.”

며칠 동안 답이 안 나오면… 악마라도 부르지 뭐. 아, 일단 마나는 다 써 보고 부를 거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은 있으니, 내 앞날에 대해선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걸리는 건 젠이다.

젠의 성격상 내가 먼저 마중 가지 않으면 내 얼굴도 보지 않고 토벌에 나갈 게 뻔하다. 그동안 내가 붉은 눈으로 ‘위험하면 도망치라.’ 하고 찡찡거렸으니 가는 날만큼은 울리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 나를 보고 떠나려 했다면, 내가 사라진 걸 알게 될 테고 걱정할 거다. 사라진 나를 찾는다고 출정하지 않는다면 땡큐지만, 오스먼드가 보는 앞에서 그러긴 쉽지 않을 테니 걱정만 가득 안고 전장으로 가는 꼴이 될 거다.

나를 걱정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난 오늘을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그럼 안 되지.”

후회 같은 건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 해괴한 공간이 마법사의 짓이라면 분명 흔적이 남았을 거다. 때마침 흔들림이 멈췄고, 나는 재가 되다가 만 가시 줄기를 치워 가며 땅바닥을 살폈다. 완벽한 미로는 없어. 흔적이 분명 있을 거다.

“없네.”

없다. 흔적이 아예 없다. 지하실을 다시 한번 돌며 마법의 흔적을 살폈지만, 내가 만든 재투성이 빼고는 마법을 쓴 흔적이 전혀 없었다.

말이 안 된다. 마법이 아니라면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 거지? 미세하게 꺾여 있는 것도 아니다.

평범하게 나갈 수는 없는 건가.

“주인의 부름에 응답….”

그냥 악마를 불러 빨리 해결하고 올라갈까 생각했지만,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포아닉스>.”

다시 한번 불새를 불러냈다. 그러고는 전에 보였던 문자를 향해 불새를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불새 스스로 뛰어들었으니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법을 먹고 자라는 지하동굴이라든지….

“오!”

불새가 글자를 향해 뛰어들어 가자, 아까처럼 지하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명했던 글자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불에 그을린 흔적이 아닌 오로지 글자만 옅어졌다.

좋아. 저 글자가 없어질 때까지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