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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05화 (105/227)

105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2)

<포아닉스>를 수십 번 만들어 내 글자를 없앴다. 아크레나의 팔찌가 있지만, 점점 마나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나가 완전히 고갈이 되려는 찰나, 사라진 글자에서 눈이 멀 만큼 환한 빛이 퍼졌다.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변화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뭐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 불러낸 게 너야?”

아무래도 내가 일을 친 것 같다.

아, 젠장. 저 새끼도 악마면 어떡하지. 만약 그렇다면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야 한다.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는 없으니까.

눈을 가린 손을 떼곤 앞을 봤다.

“뭐야, 이 코딱지는.”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요정이 있었다. 그 요정은 정확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 머리와 다리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날아다니는 코딱지 같다. 게다가 이 코딱지는 날개도 없으면서 허공에 떠 있었다.

“뭐? 코딱지?”

“아, 속으로 말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왔나 보네.”

“이 요망한 인간…. 잠깐, 너 뭐야. 너 인간 맞아?”

요정은 내 가슴께를 바라보며 희한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인간이지 마물이겠냐. 인간형 마물은 들어본 적이 없다. 드로이프나 드래곤이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들은 인간 모습으로 의태가 가능하긴 하다.

어쨌든 난 인간이다.

“인간 맞아.”

“아냐. 인간이라면 이런 색으로 보일 리가 없는데. 너 뭐야?”

이런 색이라니. 저 코딱지도 젠처럼 영혼의 색을 볼 수 있고 그런 건가? 도대체 쟨 정체가 뭐야?

“그러는 넌 뭐야?”

“알고 불러낸 거 아니야? 아주아주아주 희미하지만, 너한테서 로테의 기운이 느껴져.”

코딱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말한 로테는 이미 세상에 없을 거야.”

“알아. 로테를 보낸 게 이 몸이니까. 근데 넌 뭐냐니까? 정말 처음 보는 색이야.”

코딱지는 자신이 로테를 보냈다고 했다. 로테는 오스먼드의 할아버지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다. 그럼 저 코딱지는 적어도 200년은 살았다는 건데… 정체가 뭐냐고. 드래곤이냐?

그리고 색에 집착하는 게 의아했다.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는 젠도 내 색깔을 보고선 신기하고 예쁘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나는 영혼의 색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번을 물어봐도 답은 똑같아. 난 인간이야. 이 세계의 인간이랑은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어쨌건 인간이야.”

코딱지는 어지간히 궁금한 건지 요정은 희미한 제 몸체를 슬라임이 흐물대듯이 변형하기 시작했다.

“흐음… 전생자야? 가끔 봤어. 그치만 그 녀석들은 너같이 밝은색으로 빛나진 않았어. 굳이 따지면 어두운색이었다고.”

“또 다른 세계인가 보지. 그래서 넌 누구냐고.”

“드래곤도 너처럼 빛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너 뭐 천사 이런 거야? 내가 악마도 보고 별의별 종족을 다 봤는데, 딱 천사만 못 봤거든. 너 혹시 천사 아니야? 마지막 천사!”

코딱지는 내 주위를 날아다니며 조잘거렸다. 누구냐고 묻는 내 질문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기억도 안 나는 옛날에 악마랑 천사랑 전쟁을 했었거든. 이 몸이 본 악마가 말하길 천사의 영혼이 그렇게 맛있었대. 악마는 영혼이 없거든 그래서 영혼에 집착하는 거지. 아, 그 전쟁의 승자는 악마였어. 천사 하나가 타락해서 악마의 편으로 돌아섰는데 좀 높은 계급 천사였나 봐.”

이번에도 무시였다. 그러고는 궁금하지도 않은 먼 옛날의 전쟁을 알려 줬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재미있기도 했다. 여전히 관심은 없지만.

“결국, 몇몇 천사는 그 계급 높은 천사와 함께 타락해 악마가 되었고, 나머지 천사는 전부 소멸했대. 영혼이 사라진 거지. 이 세계엔 천신은 있어도 천사는 없어. 신기하지?”

“그러네.”

“그래서 이 몸은 네가 천사가 아닐까 하는데. 천신 아딘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천사.”

빨빨거리며 날아다니던 요정이 그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사실대로 말하라는 듯 재촉하는 게 분명했다.

“난 정말 인간이야. 악마를 만나긴 했지만, 나한테 천사가 어쩌고 그런 얘기는 안 했던 것 같아.”

“너 바보야? 당연히 안 했겠지. 네 영혼을 먹어야 하는데 네 영혼이 어쩌고 천사가 어쩌고 구구절절 말하고 있겠냐고.”

그건 그렇다.

“내가 천사든 인간이든 상관없어. 난 그저 하루를 만족스럽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야.”

“인간치고는 소소한 바람이라 생각하지 않아? 욕망이 있는 인간은 그런 소원 안 빌어.”

“그럼 인간이 아닌가 보지.”

“맞아. 너 인간 아니야.”

코딱지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곤 진지하게 말했다.

“이 몸은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날 소환한 그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겠다.”

이 코딱지가 뭐라는 거야. 정령? 원래 정령은 요정같이 날개 달리고 표로롱 빛을 내면서 쪼로롱 날아다니는 그런 거 아니야? 이런 코딱지가 정령이라고? 게다가 정령왕?

게다가 이름은 왜 또 이프리트야. 그냥 우연? …젠한테 물어봐야 하나.

“너희 정령들은 원래 이렇게 생긴 거야?”

“지금은 완벽히 소환된 게 아니라서 그래. 계약하면 진정한 이 몸의 모습으로 올 수 있어.”

“계약? …그런 거 안 할 건데.”

계약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오스먼드 봐라, 영혼의 맹세 한번 했다고 나한테 빌빌거리는 거. 클로에 크로스반도 내게 남은 빚이 있다. 게다가 악마도 나랑 계약해서 못 볼 꼴 보고 있고.

제 입으로는 정령왕이라지만, 형체도 분간하기 힘든 녀석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제정신이야? 이 몸이 계약해 준다니까? 너 정령왕 만나는 게 쉬운 줄 알아?”

“정령왕이든, 정력왕이든 계약할 생각 없어.”

“네가 이 몸을 소환했잖아!”

“내가 알고 소환한 거면 몰라. 우연이었잖아.”

정령왕은 내게 소리치며 빽빽거렸다. 코딱지만 한 게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귀가 멀 것 같았다.

“이 몸을 소환한 책임을 져!”

“글쎄 난 모르고 한 거라니까….”

“우연이든, 운명이든 이 몸을 소환했으니 책임져! 빼애액! 이 몸도 원해서 온 거 아니야! 네가 불러서 나온 거라고! 이 몸은 바쁜 정령이야! 이 몸도 너랑 같이 지내기 싫거든? 흥!”

이미 귀가 먼 것 같다.

“밖에 나가면 나보다 좋은 애들 많아.”

“네가 소환했잖아!”

희미한 형체가 이리저리 뒤틀렸다. 아마 화를 내는 것 같다.

“내가 너랑 계약해서 좋은 게 뭐야?”

“이 몸이 네 옆에 붙어 있으면 넌 무적이야!”

“무적 아니어도 되는데.”

“어째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며?”

이미 내 옆에 날 무적으로 만들어 줄 사람이 있는걸.

“비밀이야.”

“하아? 너 정말 어이없어!”

이 코딱지 정령왕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어이없으면 사라지면 될 것을 꾸역꾸역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랑 계약하면 네가 이득 보는 건 뭔데.”

“이 몸의 이득…?”

“그래, 네 이득.”

내 말에 코딱지는 잠깐이지만 조용해졌다. 그리곤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이 몸이 볼 이득을 먼저 생각해 준 건 네가 처음이야! 너 정말 인간이 아니구나! 고운 마음씨를 가진 인간은 흔하지 않지. 게다가 이 몸을 소환할 수 있는 인간이면 더더욱. 이 몸을 소환하려면 파장이 맞아야 하거든. 한마디로 특별해야 한다는 거지.”

“….”

“그리고 특별한 놈이 선하기까지 한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

‘특별하다’라… 확실히 빙의했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특별한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난 고민 없이 젠을 말할 거다. 무예든 학식이든 이것저것 뛰어나기도 하고, 코딱지처럼 영혼의 색을 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선한 사람이 아니다.

“누가 선해.”

정령왕의 이득을 물어본 건 나를 위해서다. 이득이 있다면, 그 대가도 있는 법이다. 정령왕이 볼 이득이 어쩌면 나에게는 대가가 될지도 몰라 물었던 것이다. 혹시나 그 대가가 내게 손해로 온다면 큰일이니까.

너는 이 말을 듣고 나서도 내가 선하다 말할 수 있을까.

입 밖으로 내뱉을 순 있었지만 나를 깎아내리기 싫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 코딱지는 내 주변을 훨훨 날아다니며 말했다.

“이 몸이 얻게 되는 이득은 딱 하나야.”

“뭔데?”

“충족.”

충족?

“너의 존재가 있기 전, 그리고 로테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정령을 소환하는 사람들이 많았었어. 정령들은 신이 났지. 인간계에 소환된 아이들은 각자 자기 호기심을 충족했어.”

호기심이라… 진짜 요정이네.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들과 똑같다.

“정령은 호기심이 많아. 모든 걸 다 알고 싶어 하지.”

“너도?”

“이 몸은 내 아이들보단 덜해. 이미 알고 있는 게 많으니까.”

“그럼….”

그럼 굳이 계약하지 않아도 되잖아.

“아는 게 많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잘 몰라. 인간은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거든. 봐도 봐도 새로워. 특히 너 같은 애. 이 몸은 너같이 특별한 아이가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해.”

“인간이 사는 게 거기서 거기지. 다른 인간이랑 똑같아.”

“그건 이 몸이 판단해.”

훅. 코딱지는 순식간에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너무 놀라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귀찮게 안 할 테니 계약하자. 이 몸이랑 계약하면 재미있어질 거야.”

“어떻게?”

방방 뛰고 있는 것 같은 코딱지에게 물었다. 코딱지는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고민하다가 말했다.

“불의 힘을 줄 수 있어.”

“필요 없는데.”

“불에 닿아도 멀쩡할 거야.”

그건 조금 혹했다. 화형당해서 죽을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다지 쓸모 있는 능력도 아닌 것 같다. 날붙이가 날아와도 몸이 멀쩡하도록 강철이 되는 거면 몰라도 불은… 뭐. 쓸모가 있으려나.

“그것도 괜찮아.”

“…넌 뭐가 하고 싶은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딱 하나다.

“날 여기서 나가게 해 줄 수 있어?”

“아주 쉽지.”

“좋아, 하자.”

코딱지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잠깐 생각 회로를 돌리는 것 같았다.

“겨우 그것 때문에?”

“‘겨우’라니.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건 아주 대단한 거야.”

나는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갔다고.

“그래, 네가 그렇다면…. 인간을 칭하는 자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진중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물었다.

“도브로미르 세네카.”

“도브로미르 세네카, 그대는 이 정령왕 이프리트의 보호 아래 있는 자. 그대의 숨이 다할 때까지 이 몸의 영원한 불꽃이 지켜 줄 것이다.”

코딱지의 말이 끝나자, 밝은 빛이 퍼지며 불씨로 변했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던 불씨는 불길이 되어 이 공간을 휘몰아쳤다.

바로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불기둥이 피부를 스쳤다. 전혀 뜨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부의 감각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불과 하나가 된 것처럼 나도 함께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화악- 순식간에 불의 기둥이 걷혔다. 불기둥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도브로미르!”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면, 이놈이 아까 그 코딱지인가 보다.

나보다 조금 큰 키를 가진 코딱지의 모습은 수수한 옷을 입었음에도 전체적인 인상이 아주 화려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르겠지만 목젖이 조금 튀어나온 게 남성에 더 가까운 듯했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불꽃이 피어오른 듯 선명했고, 온통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다르게 피부는 구릿빛을 띄고 있었다.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아, 인간치고는 귀가 조금 뾰족하다. 눈도 매서운 것 같기도 하고, 콧날도 날카롭다. 한마디로 굉장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

뭐야, 나보다 예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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