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3)
“그게 네 진짜 모습인 거야?”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코딱지의 모습을 훑었다. 그에 코딱지도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응?”
저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인상을 구기며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코딱지는 입술을 쭉 내밀곤 말했다.
“내용물은 이 몸이 맞아. 힘도 똑같이 쓸 수 있고 사념도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지. 하지만 외관은 조금 달라.”
“다르다고?”
“정령은 너네처럼 특정한 외관이 없어. 음… 인간의 말에 따르자면 그냥 떠다니는 빛처럼 보이지.”
코딱지를 처음 봤을 때 만난 그런 모습인가? 형체가 없는 이상한 슬라임 같은 모습.
“처음 만났을 때의 이 몸이랑은 좀 달라. 아무튼, 특정한 외관이 없는 정령들은 계약자가 생기면 외관을 가질 수 있어. 단, 계약자의 영향을 많이 받지.”
“내 영향?”
“그래, 계약자가 이 몸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모습이 형성돼. 즉, 지금 이 몸의 외관은 네가 만든 것이지.”
다행히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했구나. 장하다, 도브로미르. 하마터면 정령왕을 코딱지로 만들 뻔했어.
“넌 창의력이 풍부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기 쉽지 않거든.”
“음? 인간의 기준으론 이게 잘생긴 건가? 이 몸의 실제 모습은 이것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내가 보기엔 충분할 정도로 완성된 미모였지만, 코딱지는 자신의 외관에 만족하지 않는지 불평했다. 거참, 저 정령왕 되게 깐깐하네.
“아무튼, 얼른 밖으로 내보내 줘. 할 수 있다며.”
“밖에 보물이라도 있어? 뭘 그리 서둘러?”
“서둘러야 해. 늦으면 가 버린단 말이야. 얼른!”
나는 코딱지를 향해 일분일초도 낭비하기 싫다는 말을 덧붙였다. 뻥 뚫린 천장 밑으로 걸어갔다. 처음에 내가 이곳에 떨어졌었다.
그에 코딱지는 나를 보며 별일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잠자코 나를 따라왔다. 성깔이 있지만 말을 잘 따르는 고양이 같다.
“여기로 내려온 거야?”
“응.”
“누가 봐도 함정인데?”
코딱지는 뻥 뚫린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너 바보냐?’ 같은 뜻으로 한 말이겠지만 난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 바보 취급했던 건 잊지 않을 거다. 내가 날 바보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날 바보라 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으니 꼭 기억하고 있다가 언젠가 그 말을 대갚음해 줄 것이다.
“맞아. 이 밑에 가시덤불이 깔려 있었어.”
“근데 여길 내려왔어? 인간이 무슨 수로?”
“나중에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올라가자.”
설명은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탈출해 젠을 만나러 가야한다. 코딱지는 내 말을 듣고 ‘정령은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생물이라 궁금한 건 그 자리에서 바로 알아야 한다’라며 투덜거렸지만, 눈으로는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을 확인했다.
“우리는 불에 탈 거야.”
응? 뭐라고? 우리는 불에 탄다고? 화형식을 하자는 거야?
“불에 타 죽겠다는 거구나.”
“아니! ‘마차를 타다’ 할 때 그 ‘타다’야! 그리고 말했잖아, 네가 이 몸의 계약자가 된 순간부터 넌 불의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아, 맞다. 그랬었지. 화형으로는 죽지 않겠다며 좋아했는데 잊고 있었다. 코딱지의 생김새도 그렇고, 불기둥도 그렇고 깜짝 놀랄 만한 것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아아. 그랬지.”
“처음 겪는 일이지만 놀라지 말고. 정신 놓으면 안 된다?”
코딱지의 그 말을 끝으로 불기둥이 다시 솟아올랐다.
화악 하고 높게 치솟은 불기둥은 무엇이든 태울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기둥을 빤히 바라보던 코딱지는 내 손을 잡고선 불기둥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으아악!”
불에 타지 않을 거라는 코딱지의 말을 믿고 있었지만, 반사적으로 비명이 나왔다.
누가 불에 들어가는 걸 안 무서워하겠냐고.
“무서웠어?”
“안 무서울 리가.”
코딱지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 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불기둥 안에는 작은 원을 기준으로 불에 타고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코딱지는 그곳에 서서 위를 보고 있었다.
“이제 어쩌자고?”
“이곳은 흙뿐이라 괜찮겠지만 얼른 올라가지 않으면 저 위에 있는 목조 건물은 모두 불에 탈 거야. 돌로 만들었길 빌어야겠네.”
적국의 황자가 방화라니, 끝내 준다.
오스먼드도 목 뒤를 잡고, 라이언 황제도 목 뒤를 잡는 꼴을 보겠구나. 누구 하나 쓰러져 줬으면 더 좋겠는데.
“방화 같은 소리 하네, 얼른 올라갈 생각이나 해. 서둘러야 한다며.”
하…?
내 생각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깜짝 놀라 코딱지를 바라보자, 코딱지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편하게 대답했다.
“계약자잖아. 이 몸은 네가 무얼 생각하는지 다 알 수 있어.”
“….”
“사생활 침해라니, 너도 이 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물론 이 몸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 없이 전부 말로 하는 성격이라 읽을 것도 없겠지만.”
“못 읽게 하는 방법은 없어?”
“있을걸? 이 몸은 모르지만 실피드라면 알 수 있을지도. 나중에 물어볼 테니까 지금은 집중해.”
정신 차리라며 맞잡은 손을 꽉 잡는 코딱지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는 아직 활활 타는 불기둥 사이에 있다.
“힘을 빼고! 넌 지금 이 강하게 타고 있는 불이야!”
“난 인간이야.”
코딱지는 이상한 말도 참 잘한다. 불은 너지. 난 인간이라고.
“생각만 하라고! 생각만! 그리고 코딱지라 그만 불러!”
“생각이라 말했어야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강하게 째려보았다. 그 눈빛을 피하며 코딱지의 말대로 나는 불이 된 상상을 했다. 그리고 하늘로 치솟는 불기둥의 흐름에 올라타려 노력했다.
나는 불이다. 나는 불이다. 나는 인간이지만 지금은 불이다.
심호흡하며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곧이어 코딱지와 동화되는 느낌이 들자, 눈을 감고 불의 기운을 느꼈다.
뜨겁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가득 찰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으악!”
그러자 몸이 부웅 떠올라 단숨에 불기둥의 끝에 도달했다.
놀이공원에 가면 10초도 되지 않아 하늘로 쭉 올라가는 무시무시한 놀이기구가 있는데 그것과 똑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날 지탱해 줄 안전바가 없다는 정도.
“정신 놓지 마! 끝까지 집중해! 떨어지면 이 몸은 괜찮겠지만 넌 큰일 난다!”
내 손을 꽉 잡은 코딱지가 환하게 웃었다.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지만 그 걱정이 썩 반갑지 않았다. 마치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걸 때릴 수도 없고….
“조금 부족하네.”
천장을 봤다. 코딱지의 말대로 우리가 있는 높이로는 이곳에서 나가기엔 조금 부족했다. 조금만, 딱 한 뼘만 더 있으면 밖으로 나가는 길에 손이 닿을 수 있다. 위로 올라가는 구멍이 바로 앞에 있는데…!
“쭉 올라간다고 생각해 봐. 이 몸은 이 불기둥을 유지해야 하니까 너를 들어 올릴 수가 없어. 실피드가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쯧.”
코딱지가 말하는 ‘쭉 올라간다는 생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설명이 참 불친절하네, 이왕 해 줄 거면 잘해 줘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불이 돼서 저 위로 올라가는 생각을 해 보라고.”
말은 참 쉽다.
“못하겠어? …그러면 내가 쭉 올려 줄 테니까 뛰어서 올라가. 혹시라도 위로 못 올라가면 땅이라도 잡고 버터 봐.”
“무슨…! 으악!”
코딱지는 나와 맞잡은 손을 떼고, 내 옆구리로 손을 옮겼다. 그러고는 옆구리가 부서질 듯 힘을 줘서 나를 위로 던졌다.
나를 힘껏 던져 준 덕에 크게 도약했고, 기적적으로 내가 떨어졌던 구멍까지 손이 닿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내 무게와 위에서 누르는 중력을 버틸 만한 힘이 없어, 조금만 움직여도 힘이 빠져서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잘 버텼어.”
크게 치솟았던 불기둥은 어느새 사라졌고, 코딱지는 지면 위에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잡아 줘.”
코딱지는 바들바들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를 끌어올렸다.
“잘 버텼어. 이 몸 혼자서는 어디든 이동할 수 있지만, 정령이 아닌 자를 데리고는 못 해.”
“….”
“쓸데없다니,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잊었어?”
“….”
“부, 불은 불의 쓰임새가 따로 있는 거야!”
코딱지는 내 속마음을 읽고 대답했다. 이거 은근 편하네.
“코딱지 아니랬지!”
이미 입에 붙어 버린 걸 어떡해. 그리고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다.
“너 남들한테 안 보일 정도로 작게 변신할 수 있어?”
“이 몸의 존재를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이상, 이 몸은 계약자인 너만 볼 수 있으니 걱정 마.”
“그럼 됐고, 빨리 따라와.”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곳을 벗어났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지하는 무슨, 타루스가 살아 있었다면 허위사실 유포로 곤장 백 대를 때리고 싶을 만큼 무서운 곳이었다.
만약 내가 마법을 못 부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여기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레스티투티오>.”
별궁 꼭대기 층, 내가 부숴 놓은 천장을 복구시켰다.
아크레나의 팔찌가 진동했다. 마지막의 마지막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마나를 전부 써 버렸다. 완전히 마나가 고갈됐다.
“마법도 쓸 줄 알아?”
“아주 조금. 근데 이젠 못 써.”
“희귀한 전생자네.”
완벽하게 복구된 천장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바로 밑층으로 내려갔다.
젠이 있을 법한 곳만 찾아서 전부 뒤져 봤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내 방, 마린의 방, 식당, 연회장 심지어는 시종들이 쓰는 화장실 등등 별궁의 모든 방을 둘러봤지만, 사람은커녕 사람 머리털조차 찾을 수 없었다.
별궁에 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고요했다.
“왜? 뭐가 이상해?”
당황스러운 내 마음을 알아챈 코딱지가 상황을 물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속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한 번 더 말하는 건 체력 낭비다.
“낭비라니, 네가 말해 주는 게 더 좋다고.”
“낭비 맞아.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일일이 대답해. 괜히 정신만 더 사나워져.”
물건은 그대로지만 청소를 하지 않은 건지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다. 평소라면 먼지 한 톨도 없었을 텐데…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에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로테 별궁 밖으로 나가자, 얼음 송곳 같은 날카로운 것이 얼굴을 스쳤다.
뭔가 했더니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이었고, 새하얀 눈이 대지를 덮고 있었다.
눈이 언제….
“화, 황자님!”
새하얗게 내린 눈을 보며 멍해 있을 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이 나를 보곤 깜짝 놀랐다.
기사가 왜 여기를 지키고 있어?
“파, 파스칼! 다, 당장 폐하께 알리게!”
“예, 예!”
오른쪽에 있던 기사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기사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황자님 그동안 어디에…! 아니, 일단 다친 데 없이 멀쩡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로테 별궁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한 달 전 갑작스레 황자님이 사라지셔서 프레오나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지금이라도 황자님을 찾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한 달? …이게 무슨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