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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07화 (107/227)

107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4)

“지금 뭐라 했지?”

다행이라는 듯 환하게 웃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예? …아, 황자님을 찾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아니, 그 전에.”

기사는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차분하게 잘 대답했다.

“프레오나가 발칵 뒤집혔다는….”

“더 전에.”

“아…! 한 달 전 황자님이 갑작스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한 달 전이라고? 한 달 전?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지하실에 들어갔던 때가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아무리 오래 있었다고 해도 체감상 5시간을 넘지 않았을 텐데.

근데, 뭐? 한 달?

“한 달이라니… 이게 무슨.”

바로 옆에 있는 코딱지를 바라봤다. 코딱지는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나는 게 있다면 말을 해 봐!

“시간의 흐름이 다를지도 몰라.”

시간의 흐름?

“너와 처음 만났던 그곳은 정령계와 가까웠을 거야. 그러니 나를 쉽게 불러낼 수 있던 거였고.”

그래서, 그게 시간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정령계는 이곳보다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흘러가지. 정령계와 맞닿은 곳이라 너의 흐름이 바뀌었던 걸지도 몰라. 확실한 건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거야.”

코딱지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말이 없어졌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찰나, 그의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 왔다.

‘중간계와 정령계가 맞닿은 곳은 전부 없앴을 텐데… 설마 그곳이 맞닿은 곳이면 한시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

없애야 한다니, 위험한 거야?

코딱지를 향해 마음으로 물었지만, 답이 오지 않았다. 날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진지해 보이는 코딱지를 위해 천천히 기다리긴 개뿔, 난 못돼먹었으니 알아차릴 때까지 계속 말해야지.

없애야 한다니, 위험한 거야? 없애야 한다니, 위험한 거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없애야 한다니, 그게 그렇게 위험한 거야? 없애야 한다니, 위험한 거냐고!

반복적으로 꾸준히 물으니, 그제야 코딱지가 나를 의식했다.

“안전하진 않지. 오래전, 정령사라는 직업이 성행했을 때에 정령사는 중간계와 정령계가 맞닿은 곳을 이용해 정령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일 수가 있었거든. 그 때문에 어린 하급 정령들이 마구잡이로 소환됐고 이용만 당하다가 소멸했지.”

그리 말하는 코딱지의 표정에 근심과 동시에 절망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곳에 온 뒤로 정령사라는 직업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괜찮네.”

아무 말도 안하고 멍하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기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기사를 향해 젠의 행방을 물으려 할 때, 멀쩡히 잘 서 있던 기사가 내 뒤를 향해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진짜 4황자군.”

오스먼드였다.

그는 호위 기사 하나만을 대동한 채 급하게 온 듯했다. 뭔가 싶어 가만히 있자 오스먼드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프레오나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스먼드는 내 인사에도 답하지 않은 채 무표정을 지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오스먼드는 내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난 뒤, 한껏 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참 많아. 걸을 수 있겠나?”

“예, 멀쩡합니다.”

“뒤쳐지지 말고 따라오게.”

오스먼드는 재수 없게 말하곤 앞장섰다.

“쟤가 누구야? 지금의 황제인 거야?”

맞아, 싸가지 없게 생겼지? 성격은 더 싸가지 없어.

“인간치고는 잘생겼네. 로테의 짝은 쟤보다 더 나쁘게 생겼었어.”

로테의 짝이라면, 오스먼드의 할아버지를 말하는 거지? 베르손 프레오나였나.

“응,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앞서 걷던 오스먼드는 자신의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잖아. 해가 떠 있는 걸 보면 점심시간인 것 같은데.

한참 걷던 오스먼드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서류가 가득 쌓인 것만 빼면 전에 왔을 때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었다.

“편한 곳에 앉아.”

편한 곳에 앉으라는 오스먼드의 말에 그가 앉으려는 의자에 앉고 싶어서 기웃댔다. 황제가 앉는 의자가 여기 있는 의자 중에 제일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위치가 있는데,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으니 아쉽지만,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지?”

오스먼드는 내가 의자에 다 앉기도 전에 물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상황을 말해 보게.”

“오늘 새벽, 별궁의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갔었습니다. 그곳에서 잠깐 눈을 감았었는데 일어나니 별궁 안엔 아무도 없고, 별궁 밖으로 나와서 마주친 기사가 말하길 제가 한 달 전에 사라졌다더군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오스먼드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내 말의 진실 여부를 판단했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 잠깐 눈을 감았던 것뿐인데 한 달이 지나 있다는 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게다가 그 누구도 저를 보지 못했다는 것 또한 이상하고요.”

“별궁 꼭대기라 했나?”

“예, 가장 위층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별궁 꼭대기에 갔던 건 맞고, 눈을 감았다는 건 말 그대로 눈을 감은 거지, 잠들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물론 듣는 이가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너는 거짓말을 참 잘하네.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하는 거야? 신기하다.”

악의 없는 순수한 코딱지의 질문에 하마터면 담담한 표정이 망가질 뻔했다. 저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

“이 몸의 입을 꿰매려면 이 몸보다 훨씬 강해야 해.”

“그대가 실종됐던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주절주절 자신의 힘을 설명하려는 코딱지의 말을 무시한 채 오스먼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토벌단이 출발하는 날, 이프리트 경이 찾아왔지. 그대가 사라졌다고.”

젠장. 출정 준비로 바빠서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한참 찾았었나 보다. 지금도 엄청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대를 찾겠다고 잠도 자지 않고 여기저기를 뒤졌었지, 덕분에 먼저 출발한 토벌대보다 사흘이나 늦게 출발했으니 토벌대를 따라잡기 힘들었을 거야.”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한눈에 봐도 가라앉은 표정이 볼만하더군.”

“….”

“그의 절박함을 보지 못했더라면 난 그대가 이프리트 경을 따라가기 위해 숨은 줄 알았을 거야.”

절망했다. 젠을 걱정하게 만든 것도 그렇지만, 만일 나로 인해 젠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어어? 야! 계약자 정신 차려! 너 지금 엄청 어두워. 괜찮아?”

괜찮을 리가.

“며칠 전, 그대를 찾았단 소식을 보냈으니 괜찮을 거야.”

며칠 전에 보냈다고? 난 오늘 발견됐는데?

의문을 가지며 오스먼드를 바라보자, 오스먼드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그대 걱정에 이프리트 경이 부상을 입기라도 하면 어찌하나. 거짓이라 해도 그의 걱정을 덜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오스먼드는 괘씸하게 말했지만, 앞으로 젠이 나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제 시종인과 여우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 그들이라면 잠깐 북쪽으로 보냈네. 그대의 시종이 여우가 날로 사나워져서 가 봐야겠다고 하더군.”

다행일지도 모른다. 마린의 입장에선 모셔야 할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곳에 있기가 더 힘들었을 거다.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자, 오스먼드는 앉은 의자에 등을 기대곤 이어 말했다.

“며칠 전엔 어떻게 알았는지 세네카의 2황자가 찾아왔었지. 그대의 안전을 확인해야겠다는 명목 하나로.”

“메이븐 형님께서요?”

“그래, 그대가 사라졌다는 건 기밀이라 세네카에선 알 방법이 없었지. 하지만, 직접 세네카의 내통자를 고발하면서까지 찾으러 오더군.”

믿을 수가 없다. 메이븐이 적국까지 쳐들어와 날 찾으러 왔다니….

“그대의 말대로 그대의 형님들은 그대를 많이 아끼더군.”

“전에도 말했잖습니까. 절 건드리면 큰일 날 것이라고….”

내 아버지 새끼는 별로여도 우리 두 형은 짱이랬지? 나 건들면 너 뒤질 수도 있다니까?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그 모습을 본 오스먼드는 짧게 웃었다. 비웃음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덕분에 내통자는 파면시켰고, 메이븐 세네카에겐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실종 사건을 공식적으로 수사할 수 있게 권한을 줬지. 수사권을 빌미로 여기저기 엄청나게 헤집더군. 하나를 얻고 열을 잃은 기분이야.”

어쩌면 동생을 찾는 것보단 프레오나를 확인하러 왔던 걸지도 모른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형이라는 놈은 착해?”

글쎄, 못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방금까지 얌전했던 코딱지가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넌 프레오나가 아니라 세네카라는 제국의 사람이었구나.’, ‘이제 보니 너 좀 높은 인간이었구나.’, ‘아닌가? 여기로 왔다는 건 버려졌다는 거지?’, ‘맞네. 쯧쯧, 불쌍해라. 넌 이 몸이 예뻐해 줄 테니 마음 쓰지 마.’ 등등 영양가 있는 질문들은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그대를 다시 찾았으니 메이븐 세네카도 안심하고 떠나겠지.”

메이븐이 프레오나를 헤집고 다녔던 게 어지간히 짜증이 났었는지 오스먼드는 시원하게 웃었다.

“이따가 그대는 2황자를 만나러 가. 그리고 그대의 입으로 내 뜻을 전해 줬으면 하는군.”

“세네카로 돌아가라 전하면 됩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만족스레 웃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입가가 단박에 굳어졌다.

“그대도 매우 혼란스럽겠지만, 당분간 조용히 있어. 소란에 휩쓸린 귀족들이 그대를 곱게 보지 않을 테니.”

“….”

“그리고 잠시 동안 내가 머무는 궁에서 지내. 또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싫다고 해 봤자 바뀌는 게 없을 테니까.

오스먼드는 내 대답을 확인한 뒤, 문을 보며 텟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매일 함께 다니던 비서와 함께 울먹거리고 있는 텟이 들어왔다.

쟤는 왜 울고 있는 거야?

“프레오나의 태양을 뵙습니다!”

텟은 오스먼드를 향해 강렬하게 인사하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봤다. 그러고는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떨궜다.

쟤 진짜 왜 저래?

“쟤 뭐야? 너 좋아해?”

코딱지도 텟을 보며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텟이 왜 저러는지 나도 모르겠다.

“방은 텟에게 안내해 달라고 하게. 2황자는 나중에 방으로 보내 주지.”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내 발이 집무실 밖을 나설 때쯤 오스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밤에 찾아갈 테니 그때까지 쉬고 있어.”

그건 사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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