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5)
“황자님, 그동안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오스먼드의 집무실에서 나오고부터 텟의 징징거림이 이어졌다.
“제가 황자님이 사라지고 나서부터 황자님 걱정에 눈물이 앞을 가려 밥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습니다.”
네 밥줄 걱정 때문이겠지.
아, 자세히 보니 살이 조금 오른 것 같다. 밥을 못 넘기긴 개뿔, 잘 먹고 잘살았나 보네.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좋은 소식?”
지금 내게 있어 좋은 소식은 별거 없다. 몬스터가 생각보다 별로 없어 토벌대가 일찍 온다거나, 세네카의 황제와 퍼디스가 죽었다거나, 오스먼드가 고자가 됐다거나, 숨겨진 재산이 생각지도 못할 때 나오거나. 그 정도면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있겠다.
“너한텐 그런 게 좋은 소식인 거야…?”
내 속을 읽은 코딱지는 나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곤 나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조금 바꿔야겠다며 ‘선하고 좋은 인간’에서 ‘선한 것 같지만 속이 검은 인간’으로 정정했다.
그러게, 말했지. 난 선한 인간이 아니라고.
코딱지를 쳐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가, 잊고 있던 텟을 바라봤다. 텟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아주 좋은 소식인가 보다.
“황자님이 사라지셨던 동안 제가 혼인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 뭐야. 자기 이야기였잖아.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면 관심 없다. 누가 혼인을 하든, 애를 낳았든 나랑은 관계없으니… 잠깐, 뭐? 텟이 결혼? ‘그’ 텟이?
“뭐라고…?”
“혼인식을 올렸습니다!”
내가 한 달의 시간을 건너뛰었을 동안, 텟은 너무 많은 걸 건너뛰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고백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을 텐데 내가 실종됐던 한 달 동안 결혼까지 했다고?
“혼인…? 그대가 마음에 담고 있었다고 했던 그 여인과?”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예! 황자님께서 조언해 주신 대로, 말없이 에메랄드 반지를 건네주었더니 바로 ‘혼인을 하자’ 하지 뭡니까! 전부 황자님 덕분입니다. 아, 일단은 제 외모와 인망이 훌륭하기 때문이지만요. 하하!”
“요즘 세상은 저런 외모가 훌륭한 거야? 중간계도 많이 바뀌었네.”
텟의 망언을 들은 코딱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중간계와 180도 바뀌었다고 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고는 ‘드디어 못생긴 것들의 시대가 왔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시대의 미인상은 나라고. 저 미역같이 생긴 인간이 아니라.
“혼인 축하하네. 그나저나 최근 혼인식을 올렸다면 아내와 함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 있지 말고 며칠은 집에서 쉬어도 돼.”
“그렇지 않아도 방으로 안내만 해 드리고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머무시는 궁이니 저보다 유능한 시종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내가 말 안 해도 돌아갈 생각이었구나. 그랬구나.
“아무튼,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글쎄, 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한 달이 지났다더라고.”
“신기한 경험을 하셨군요!”
순수하게 신기해하는 텟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정령계와 맞닿은 곳에 가서 정령을 만난 게 평범한 경험은 아니지.
“혹시 모릅니다! 천신 아딘을 영접하신 다음 기억을 잃은 걸지도요!”
상상력이 참 풍부하네.
그래도 비슷하게 추리했다. 정령계의 대빵인 정령왕을 만났으니, 천신이나 정령왕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어. 둘이 비슷하지.
“다르거든? 천신 걔는 진짜…! 하! 이 몸이 할 말은 많지만 참는다!”
코딱지는 자신과 천신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팔을 쭉 뻗으며 성질을 냈다.
내가 비슷하다고 말했지만, 잘 따지고 보면 천신이 정령왕보다 위 아닌가…?
“야! 걔는 진짜 아니다! 넌 걔가 얼마나 영악하고 못된 놈인지 모르지? 악신이라 불리는 마벨이 더 착해!”
억울한 듯한 코딱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천신을 만날 일도 없는데, 뭐.
“황자님께서 머무실 이곳은 황궁에서 가장 높고, 프레오나 황실의 전경이 환히 보이는 곳입니다. 로테 별궁에서 쓰시던 방보다는 조금 좁긴 하지만, 훨씬 멋진 방입니다.”
텟은 나에게 방을 안내해 주며 황실의 전경이 얼마나 멋진지 설명했다. 그러고는 오스먼드가 특별히 내게 하사한 방이라며 뿌듯해했다.
어쩐지 계단을 오지게 올라가더라.
내가 밖으로 나가려 하면 다시 올라오기 힘들고 귀찮게 하려 일부러 높은 곳으로 방을 내줬는지 모른다.
오스먼드 이 영악한 놈….
“이 정도는 영악한 것도 아니야! 귀여운 거지! 그 천신 놈은 정말이지…!”
아까보다 더욱 울분에 찬 코딱지는 천신 아딘을 향한 육두문자를 쏟아 냈다.
그동안 당한 게 많나 보다.
코딱지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방을 둘러봤다. 생각보다 작은 방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폭신한 이불이 덮여 있는 침대, 작은 1인용 소파 2개, 찻잔을 올려놓는 테이블, 작은 옷장과 그 옆에는 전신 거울이 있고, 아치형으로 뚫린 창문, 그리고 그 밖으로 보이는 전경이 시원하고 좋았다. 마치 5성급 호텔 스위트 룸 같았다.
방은 좋다.
“고맙네, 이제 가도 좋아.”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 아! 식사는 이 방으로 올라올 것이니 굳이 힘들게 내려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알겠으니 이제 가게.”
“네! 그럼 정말 가 보겠… 아!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낮에는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여러 귀족이 드나드니 보는 눈이 많아 황자님의 기분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알겠네.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 말고 떠나게. 아내가 기다리겠어.”
“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황자님!”
텟은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곤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떠났다.
모터 주둥이 텟이 떠났지만, 잠잠해지기는커녕 더 시끄러워졌다.
“천신 그놈이 제일 못됐다니까? 말이 천신이지 진짜 악신은 걔야.”
“….”
“그놈 목소리만 들어도 없는 털이 삐쭉 서는 게 기분이 너무 더러워!”
코딱지는 나를 이리저리 흔들며 뭐라 반응 좀 해 달라며 보챘다. 그에 겉옷을 벗고 침대 위에 누우며 코딱지에게 대답했다.
“무슨 일 있었어? 천신한테 돈이라도 떼인 거야?”
“이 몸이 조금 전에 알려 줬던 ‘선과 악의 전쟁’ 기억해?”
천사와 악마가 싸웠다는, 그거? 높은 계급의 천사가 악마의 편으로 돌아서고 모든 천사가 소멸해 악마의 승리로 끝난 전쟁.
“그래. 그 전쟁에 휘말렸던 종족들이 꽤 많았어. 천사, 악마, 정령, 엘프, 드워프, 드래곤까지. 그 밖에도 여러 이름 모를 종족들이 휘말렸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몇몇만 살아남고 다 소멸했지.”
대충 예상했다.
“그래도 정령은 살아남았네.”
“아니야, 그때 이 몸도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걸. 트로웰은 아예 소멸했고 노아스가 새로운 정령왕으로 태어났지. 우리 쪽도 난리였어.”
한 번 죽었었다고? 정령은 요정이 아니라 귀신이었던 거야?
“아, 정령왕은 전대 정령왕에게 기억을 계승받아. 인간의 세월로… 한 만 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몸으로 기억을 전승하지. 몸은 다르지만, 기억은 전승하니 그 정령이 이 정령이고, 이 정령이 그 정령이었고 그러는 거야.”
“그렇구나.”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우리 정령은 4원소로 이루어져 있어. 불, 물, 흙, 바람. 불은 이 몸인 이프리트. 물을 엘라임, 흙은 노아스, 마지막으로 바람은 실피드. 지금은 정령왕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이 중에선 이 몸이 최고야.”
못 믿겠다.
“진짜야! 실피드는 가장 오래 살긴 했지만 강단이 없어. 엘라임은 얍샵한놈이야, 노아스는 아기고! 그럼 이 몸이 짱이지!”
“음… 그래, 네가 짱이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코딱지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그래, 네가 최고다.
“정령은 이정도 설명하면 된 것 같고. 아무튼, 천신 걔는 진짜 가까이 있지 마. 감정이 없어. 균형만을 우선시하는 놈이지.”
코딱지는 자신이 기억하는 천신을 곱씹으며 쯧 혀를 찼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천신이 제일 높은 거 아니야? 천신이 우리가 욕하는 거 들었다가 빡쳐서 벌을 내린다고 그러면 어떡해?
“천신이나 악신이나 정령왕이나 다 비슷해.”
“응?”
“하긴, 인간이라 잘 모르겠지? 한 번만 이야기할 테니 잘 들어 봐.”
코딱지는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세상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 그 균형을 잡는 게 천신이지.”
“그럼 천신이 짱이네.”
“아니라니까! 끝까지 들어 봐.”
고개를 끄덕였다. 코딱지가 세상의 균형을 얘기하는 동안 난 메이븐이 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생각하려 했지만, 바로 관뒀다. 코딱지는 내 속을 읽을 수 있을 테니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거다.
“하나의 원이 있다고 생각해봐.”
“응.”
“그 원의 한곳에서 모서리가 튀어나오면 더 이상 원이 아니지?”
“응.”
“아딘은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거야. 튀어나오는 걸 관리하지.”
종족 중 하나가 튀어나오면 천신은 그 튀어나온 곳을 없앤다는 뜻이다.
그럼 천신이 짱인 거 아니냐고.
“아니라고! 우리는 균형을 이루고 있어. 천사, 악마, 엘프, 드래곤, 드워프 등등 다들 균형을 거스르지 않고 살고 있었지.”
“….”
내 속을 읽었으면서도 코딱지는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찜찜한 표정 같기도 하고.
뭐, 말을 해.
“이거 기분이 쪼금 그런데… 그냥 말로 하면 안 돼? 아무도 없잖아.”
누가 올 수도 있잖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누가 올 것 같으면 알려줄게.”
귀찮게….
쯧, 아주아주 귀찮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혀를 찼다. 그에 코딱지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에휴. 초딩도 아니고.
“균형을 통제하는 게 천신이라는 말은, 그 통제할 힘이 천신에게는 있다는 거잖아. 그럼 걔가 짱이지.”
“…그런가?”
“그런 거 아니야? 통제하는 사람이 짱인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하는데.”
“음… 그래, 너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다수의 종족이 그 균형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가능한 거야.”
하나의 종족이 막 나가면 다른 종족과 합심해서 싸운다, 그런 건가?
코딱지에게 내가 생각하는 게 맞냐고 묻자, 그는 답을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우리가 존중해야 천신의 힘이 세지거든.”
“그럼 뭐가 문제였는데?”
문제가 있었으니 천사들은 싹 다 죽고 악마들이 판치고 있는 거 아니야.
내 속을 읽은 코딱지는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팔짱을 꼈다.
“천신은 균형만을 생각해. 너나 이 몸이나 대다수의 종족이 느끼는 ‘감정’이란 게 없어. 아니, 많이 결여된 편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아주아주 많이.”
“감정?”
“응. 오직 균형만을 추구하고 내세워. 천신의 기준으로 잘못을 저질렀어도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지도, 받아들여 주지도 않는 거야.”
아, 뭔지 알 것 같다.
“천신의 입장도 이해해.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불만이 많이… 아주 많이 쌓였었지. 천신은 우리 정령들이 아주 조그마한 실수를 저질러도 바로 소멸시키고 그랬었거든.”
“…”
“아주 작은 아이라고 할지라도 이 몸의 아이들이야. 이 몸은 아딘을 이해는 했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나를 포함한 다른 존재들도 아딘에게 불만이 쌓여 갔고, 악마가 시작을 열였지. 악마들은 천사들을 전부 죽여 천신의 세력을 좁혔고, 천사와 악마를 제외한 다른 종족은 입을 닫았어. 그 전쟁 이후로 천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복수를 꿈꾸는 거 아니야? …‘이런 불균형한 세상은 무너져야 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아닐걸.”
“봐, 너도 확신하진 못하잖아.”
“아딘에겐 세상을 무너트릴 힘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
“그건 두고 봐야겠지.”
나는 천신의 상황도 이해가 간다. 천신이 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다.
관리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너무 없는 것도 문제가 있지.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면, 감정이 있는 자들에게는 매정한 결정을 내릴 때도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균형을 잡는 게 불가능한 세상이 올 때, 차라리 재창조하겠다고 이미 만들어진 세상을 다 부술 수도 있겠지.
코딱지는 이런 내 생각을 읽고선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아딘은 절대 못 해.”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악당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까.”
코딱지는 악담하지 말라며 내 팔뚝을 툭툭 쳤다. 자기가 생각해도 그럴듯했나 보다.
코딱지, 너도 찔리는 거지?
“아니라니까! 그리고 코딱지라 부르지 마!”
“네 이름으로 부르기 싫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프리트가 둘이나 있단 말이야.”
“그래, 그거. 아까도 신경 쓰였는데, 그 젠이라는 인간이 이프리트의 성을 가지고 있는 거야?”
말 잘했다. 나도 그게 궁금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