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6)
“이 몸이 말했었지? 너한테서 아주 작지만 로테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응, 네가 완전한 코딱지였을 때였지.”
우리가 처음 마주쳤을 때 코딱지가 한 말이다. 나에게서 로테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코딱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내 옷 속에 숨겨져 있는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목에 달려 있는 그거. 거기서 로테의 기운이 느껴져. 아주 조금이지만.”
“…”
“그리고 그거 이상한 주술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꽤 정교하네. 알고 있었어?”
코딱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목걸이를 부드럽게 꺼냈다.
“응, 알고 있어.”
이건 젠의 혈액이 들어 있는 마법 목걸이다.
아무래도 로테는 이프리트 가문과 상관이 있는 것 같다.
로테의 기운을 코딱지는 단번에 알아챘다.
이프리트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
이프리트는 젠의 가문 이름이다.
코딱지는 위의 세 명제 간의 상관관계를 알려 주었다.
“이프리트 가문? 로테는 성이 없어. 아, 어떤 높은 귀족에게 입양되긴) 했지만, 그 가문의 성을 따르진 않았어.”
“혼인…은 당시 프레오나 황제랑 했을 텐데.”
로테 별궁은 베르손 황제가 만든 오직 로테만을 위한 궁이다.
로테는 첩이라지만 제국의 황제와 혼인을 했으니 다른 남편은 없었을 거다.
그럼 어째서 로테의 기운이 젠한테서 느껴진 거지?
“여태 이프리트라는 이름을 쓰는 인간들은 없었을 거야. 이 몸의 고유한 호칭이니까.”
코딱지의 말에 의하면, ‘이프리트’는 정령의 언어란다. 정령의 언어는 인간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단어고, 그냥 정령도 아니 ‘정령왕’의 호칭이니 자신과 계약했던 로테가 아니고서야 알 사람이 없다나 뭐라나.
“로테는 애칭이지? 진짜 이름이 뭐야?”
“그건 왜?”
“확실하진 않지만 로테의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있어.”
한나가 알지도 모른다. 젠에게 로테 별궁의 이야기를 해 준 것도 한나였으니까. 왠지 모르게 한나는 알고 있을 것 같다.
“샤를로테야.”
“샤를로테… 로테를 입양했던 귀족의 성은 기억나?”
“뭐라더라? 몬바스? 그런 느낌이었는데.”
정령왕이라는 놈이 기억력이 많이 달리는구나. 그러니까 코딱지지.
“야!”
“왜.”
“코딱지라 부르지 말랬지! 이 몸은 그런 더러운 이름으로 불릴 위치가 아니라고!”
내가 초딩도 아니고 정령을 코딱지라 부르는 게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저 정령왕에겐 코딱지만큼 딱 맞는 이름이 없다.
미안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야!”
“그러는 너도 내 이름으로 안 부르잖아. 따라 해 봐, 미르.”
“미르! 됐지? 너도 이제 이 몸을 정중하게 부르라고!”
“이… 코딱지.”
아무래도 못 부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이프리트는 두 명이나 된다고.
그리고 이프리트라고 부르면 젠이 더 보고 싶을 거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프리트는 불의 정령왕을 부르는 호칭이야. 따지자면 내 이름은 아니지.”
“그럼 이름이 따로 있어?”
“로테는 나를 ‘이피’라고 불렀어.”
‘이피’라… 코딱지가 아니라 ‘이끼’라고 불렀어야 했나.
“야! 너 계속 그러면 ‘방구’라고 부른다?”
“내 얼굴에 ‘방귀’는 너무 하지 않아? 보석이면 모를까.”
코딱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그의 속을 읽지 않아도 표정에서 드러나 알 수 있었다.
“알았어, 좋은 이름 생각해 볼게. 근데 이프리트와는 관계없는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
“마음대로 해. 이 몸은 코딱지만 아니면 다 좋아.”
뭐가 있을까….
활활 타는 것 같은 붉은색 머리를 보면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하다.
“파이어 볼… 파볼?”
아니지, 이건 파드의 이름을 파이어 드래곤이라 지은 미네르바랑 다를 게 없다.
나는 ‘생명을 가진’ 누군가의 이름을 막 짓는, 그런 무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남자야?”
“응.”
코딱지는 내 목걸이에 관심이 가는지, 목걸이를 놓지 않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대답했다.
“정령도 성별이 있구나.”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아. 우리는 인간처럼 번식을 하는 게 아니니까.”
“아, 어렵네. 그냥 코딱지 하면 안 돼? 코딱지도 나쁜 게 아닌데.”
“그래, 방구야.”
나도 방구라고 불리기는 싫다.
“으음… 철수 어때?”
“철수?”
“응, 철수.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멋진 이름이야.”
멋진 이름이야, 멋진 이름. 철수는 엄청나게 멋진 이름.
코딱지가 내 생각을 읽는 것 같아 ‘철수는 멋진 이름’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철수가 촌스러운 이름이라는 건 절대 알려 줄 생각 없다. 그리고 딱히 떠오르는 이름도 없다.
‘철수’, 깔끔하고 좋구만, 뭐.
“그래, 코딱지보단 낫지.”
“앞으로 잘 부탁해 철수야.”
철수는 고개를 끄덕인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목걸이 안에 들어 있는 젠의 혈액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다행히도 큰일은 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평범한 목걸이였다면 마음껏 보라고 빼서 건네줄 수 있지만, 이 목걸이는 안 된다.
“신기해?”
“응. 처음 보는 주술이야.”
“마법이란 거야.”
아마 로테가 살았던 시절엔 마법이 대중화가 되어 있지 않았을 거다.
4황자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세네카에서만 알음알음 사용하던 마법을 여기저기 퍼트려 대중화한 사람이 4황자의 친어머니다.
실질적으로 프네오나나 다른 왕국에서 마법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40년도 채 안 되었을 거다. 그러니 세네카의 적국인 프레오나에선 아직도 마법을 꺼려 하는 거도.
하지만 프레오나에서도 조금이지만 마법 용품을 쓰는 걸 보면 곧 받아들일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이래서 인간은 신기해. 잠깐 눈을 떼면 성장해 있으니까.”
“어딜 가나 똑같은 거 같아. 인간은 편하게 살길 원하거든. 그러기 위해선 발전을 해야 하는 거고.”
“참 신기해. 우리는 현재에 안주하거든. 욕망…이란 게 크게 없어.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 빼고는. 아, 따지고 보면 악마가 제일 인간이랑 비슷할지도 몰라.”
코딱… 아니, 철수는 계속 만지고 있던 목걸이에서 손을 떼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천사는 균형을 우선시하지. 사실 걔네도 다른 감정을 느끼긴 하겠지만, 아딘을 위하겠다는 마음이 절대적이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을 거야.”
“몇몇 천사는 악마로 갈아탔다며.”
“맞아. 걔네도 답답했을 거야. 아무튼, 우리 정령은 충족, 드래곤은 풍족, 드워프는 끈기, 엘프는 평화, 이런 가치관을 다른 감정보다 우선시하지.”
천사는 균형의 망가짐을 참지 못한다.
정령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다.
드래곤은 무언가의 고갈을 참지 못한다.
드워프는 게으른 것을 참지 못한다.
엘프는 타 종족의 침범을 참지 못한다.
“악마는?”
“걔네는 복잡해. 욕심 있지, 나태하지, 색욕에 미쳤지, 화도 많고, 질투도 해. 제일 인간이랑 닮아 있어. 물론 정도는 다르지만.”
7대 죄악이 생각난다.
교만, 탐욕, 질투, 색욕, 나태, 식탐, 분노. 인간의 나쁜 감정이다.
잘 생각해 보면 나쁜 것도 아니다. 조금씩은 가지고 있어야 인생이 밝게 빛날 수 있는 감정이다.
“악마는 그게 과한 거야. 인간이랑은 다르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내가 만난 악마도 그랬거든.”
“옛날에는 인간을 꼬여 네가 말하는 죄악의 감정들을 불러일으켰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근데 네가 만난 악마는 누구야?”
코딱… 아니. 철수는 내 목 뒤를 살피며 말했다. 혹시라도 악마에게 낙인이 찍힌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
“이름은 말 못 해. 말하면 자동 소환되거든. 별로 보고 싶지 않아.”
“뭐, 뭐?”
“자동 소환, 이름을 부르면 자동으로 소환되는 거야. 내 눈앞에 악마가 딱 나타나는 거지.”
“악마가 너한테 찍은 게 아니라, 네가 악마한테 낙인을 찍은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꽤 힘들었지… 그땐 그랬지!
“누구야? 인간한테 당한 그 멍청이가?”
“있어. 훤칠하게 생겨서는 띨빵한 놈.”
“나중에 소환할 일 있으면 나도 불러. 그 자만하는 것들이 그렇게 무시하던 인간한테 당하다니. 낯짝 한번 봐야지.”
킬킬킬 소리 내어 웃는 철수의 표정이 신나 보였다. 너도 은근 당한 게 있구나?
철수와의 이야기가 끝나 가는 것 같아 침대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누가 온다.”
긴장을 풀고 한숨을 돌리려는 와중, 철수의 경고가 들렸다.
철수의 말이 끝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황자님, 메이븐 2황자께서 내일 찾아뵙겠다고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오스먼드를 모시는 시종의 목소리였다. 그, 보리언이라 하는 사람. 오스먼드한테 딱 붙어있는 시종이 어쩐 일로 왔나 했더니만, 메이븐의 소식을 전하러 온 거였다.
메이븐이 내일 온다고? 사라졌던 동생을 바로 만나러 오지 못할 정도로 많이 바쁜가 보네.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 뒤에 와도 상관없다고 하고 싶은데. 그럼 안 되겠지.
“알겠네. 형님께 편하실 때를 일러 주면 내가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겠나?”
“예, 알겠습니다. 2황자께 답이 오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보리언은 메이븐에게 2황자님이 아닌 2황자라고 불렀다. 오스먼드의 옆에 있는 애지만, 깍듯한 녀석이라고 알고 있는데, 메이븐이 얼마나 귀찮게 했으면….
“쟤 좀… 아니다.”
알아, 확실히 평범한 시종은 아니야.
오스먼드가 옆에 두는 인간이 평범할 리가 없다. 게다가 오스먼드가 나를 겁박했던 그 날 밤, 오직 보리언만 데려왔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지.
“알고 있으면 됐어. 저 시종이 여기까지 오는데 발소리도 안 들렸고, 기척도 늦게 알아챘어. 몸을 좀 쓰는 인간이라는 거지.”
괜찮을 거야. 만약 오스먼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면 나를 죽이진 않을 테니까.
“왜?”
내가 죽으면 오스먼드도 죽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설명하기 귀찮다. 정령왕이라면서 계약자의 과거에 있던 일은 못 보는 건가.
“정령왕이 만능인 줄 알아?”
“할 줄 아는 게 불 켜고 끄는 것밖에 없지?”
“아니거든!”
아이고,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정령왕이 제 귀를 망가트리려 해요.
“어후! 선한 줄 알았는데!”
“난 내 입으로 내가 선하다 한 적 없어. 철수 네가 지레짐작한 거야.”
“허…!”
철수는 완전 사기당했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사기꾼을 하면 참 잘할 것 같아. 악마한테도 사기를 치고, 오스먼드한테도 사기를 치고, 정령왕한테도 사기를 치고, 젠한테는 아예 누명을 씌웠잖아.
생각해 보니 아주 못돼 처먹은 인간이다.
“계약 해지해 줘?”
나는 억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철수에게 물었다.
혹시나 앞으로 보여질 못돼먹은 내 모습에 실망해 내가 꼴도 보기 싫어질 수 있잖아.
“그건 불가능해.”
“그럼 앞으로도 철수 네가 참아. 못된 짓은 가능하면 안 하고 싶긴 한데 조금 더 해야 할 것 같아.”
내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거슬리는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