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8)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어도 어지러운 게 느껴졌다.
그때, 이마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이마 위로 물수건을 올려 준 것 같다.
눈을 떠 그 누군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을 뜰 힘조차도 없었다.
“으….”
“누워 있어.”
이 목소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다. 내 기억이 아닌 4황자의 기억에서 자주 나왔던 목소리.
“형…님.”
“그래.”
메이븐이었다.
메이븐은 열이 펄펄 끓는 내 몸을 차가운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 줬다. 그러고는 내가 놀라지 않게 나긋나긋 말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길래, 걱정돼서 들어왔어.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해.”
그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나를 진정시켰다.
메이븐은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편하게 말했었지. 장소 상관없이 격식 없는 로이븐과는 다른 다정함이다.
“네 이야기는 황제에게 들었어. 지금은 푹 쉬고, 상태가 호전되면 그때 얘기하자.”
메이븐은 덜덜 떨고 있는 내게 곧 괜찮아질 거라며 따뜻하게 다독여 줬다. 마치 작은 아이를 돌보듯이.
로이븐과 마찬가지로 그는 나를 아주 어린 아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좀 차가울 거야.”
미리 경고한 메이븐은 얼음주머니로 추청되는 물체를 내 머리, 목, 팔에 가져다 대며 열을 식혔다. 하지만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열은 도무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메이븐의 시종이 녹은 얼음주머니를 새로 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전 괜찮…습니다.”
“고집부리지 마.”
메이븐은 끊임없이 손을 움직였다. 끓어오르는 열을 식혀 주기 위해 차가운 수건을 둘러주기도 하고, 부채질도 해 줬지만 전부 소용없었다.
물리적으로 끊어 낼 수 있는 열이 아니었으니까.
“그렌, 욕조에 얼음을.”
시종에게 짧게 명령한 메이븐은 나를 조심히 안아 올려 욕실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차가운 물을 미리 받아 놓은 욕조 안으로 나를 천천히 넣었다.
물이 차가운 탓에 열이 잠시 식는 듯 보였지만, 차가워진 만큼 몸이 다시 발열하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 여기 얼음을 가져왔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메이븐의 시종인 그렌은 얼음이 가득 찬 자루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낑낑거리며 자루를 들어 내가 누워 있는 욕조 안으로 전부 털어 넣었다.
벽돌만 한 얼음은 풍덩 소리와 함께 따듯해진 물에 녹아 들었고, 녹지 않은 얼음은 물을 차갑게 만들었다.
하아… 이제 좀 편해졌다.
“너무 빨리 녹는군.”
메이븐의 말대로 차가움이 주는 편안함은 잠시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얼음이 전부 녹아 물이 따듯해졌다.
“얼음을 더 가져와.”
메이븐은 분주한 시종에게 얼음을 가져오라 얘기했고, 시종은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한 자루의 얼음을 들고 왔다.
“얼음 여기 있습니다! 황제궁의 다른 시종들에게도 부탁했더니 곧 가져다주겠다고 기다리라 했습니다!”
“그렌, 그들을 믿지 말고 네가 직접 가져와.”
메이븐은 프레오나의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그렌에게 직접 가져오라 일렀다.
그에 그렌이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자님, 얼음을 가져왔습니다! 급한 일이라 하셨으니 들어가겠습니다!”
황자궁의 시종들이었다. 시종 다섯 명이 한꺼번에 얼음을 들고 메이븐의 앞에 대령했다.
얼음을 확인해본 메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4황자님을 잘 보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혹,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구해 오겠습니다.”
시종들의 제일 앞에 선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말했다.
흥, 오스먼드 이 녀석 쫄리나 보네. 내가 죽으면 물귀신에게 끌려가듯이 지도 같이 죽을까 봐.
“그래, 알겠네.”
시종들이 가져온 자루를 건네받은 메이븐은 자루에서 직접 얼음을 꺼내 욕조에 넣었다.
“후….”
그는 내 모습을 보곤 한숨을 쉬었다.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걱정이 된다는 뜻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나를 걱정하고 있는 메이븐을 향해 간신히 웃어 주자, 메이븐의 표정이 더욱 굳혔다.
역효과였구나.
“괜찮아질 거야.”
메이븐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내 머리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려줬다.
“예….”
조금 나아질 것 같으면 다시 아프고, 계속 아프다가 더 아파진다.
버텨야지. 버터야 해.
다시 밀려오는 아픔에 잠을 청해 보려 눈을 감았다.
“윽…!”
마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수면 마법이라도 썼을 텐데….
지금 마나를 마시면 99퍼센트 확률로 죽을 거다.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나마 한숨을 삼켰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할수록 버티기 힘들었으니까.
정신이 멀어지려는 와중, 내 의식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르 너 상태가…!”
아, 철수였다.
철수가 돌아와서 반갑기보다 걱정이 앞섰다.
네가 여기 있으면 어떡해? 젠은?
“걔는 걱정 안 해도 되겠더라. 이런 말 하긴 조금 자존심 상하지만, 이 몸이 떨 정도로 살벌했어. 조금 과장하자면 신도 죽일 수 있겠던데.”
젠은 괜찮은 거지?
“마물이라면 보이는 족족 다 베어 버리고, 살기라든가 뿜어 내는 기운이 범인이 아니야.”
어쨌든 안전하다는 뜻이니 한숨 놓았다.
“확실히 로테의 기운이 느껴졌어. 그 아이가 로테의 후손인 거 같아.”
철수는 팔짱을 끼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금 내 상태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알았으니까, 어떻게 좀 해 봐. 뜨거워 죽을 것 같아.
“아, 내 정신 좀 봐.”
철수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다시금 내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그의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들어 왔고, 덕분에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었네. 너 좀 대단하다.”
말했잖아. 버틸 거라고.
이제 괜찮아졌으니 다시 젠한테 가.
“걘 괜찮을 거라니까. 그리고 걔가 자기는 괜찮으니 너한테 가라 했어.”
응? 젠은 네가 보여?
“응, 볼 수 있게 했으니까. 처음엔 날 죽이려고 하던데? 너한테 이상한 걸 붙여 놓을 수 없다나, 뭐라나…”
“푸흡….”
철수에게 달려든 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내 곁에 있던 메이븐과 시종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무 아파서 미친 건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이래서 귀신을 보는 애들 옆에는 안 가는 건가 봐.
메이븐은 자루에서 얼음을 더 꺼내 욕조 안으로 넣었다. 아까였으면 괜찮았겠지만, 철수의 가호 비슷한 것을 받은 이후라 조금 추웠다.
“형님 저 춥습니다… 이제 그만….”
그는 내 목덜미를 만져 보며 열을 쟀다. 그러고는 아직도 뜨거운 건지 목덜미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려줬다.
“아직 열이 내려가지 않았어.”
아까보단 나아졌는데 말이지….
“얜 누구야? 네 형이라는 걔야?”
철수는 메이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나는 긍정의 대답을 해줬고, 철수는 메이븐의 바로 앞까지 가다가 살폈다.
“너랑 안 닮았네.”
어머니가 달라.
“흐음…”
철수는 메이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걸리는 게 있나?
“걸리는 건 아니고, 그냥 곧은 인간이다 싶어서. 속이 꽤 맑아.”
메이븐은 엄청 무뚝뚝하고 무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금처럼 동생을 잘 신경 써 주는 형이다.
한마디로 비열하거나 나쁜 짓 할 사람은 아니란 거다.
퍼디스를 좀 무시하긴 하지만 4황자에겐 도움을 줬으면 줬지, 해를 준 사람이 아니다.
“열이 조금씩 내리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메이븐은 내 열을 수시로 확인하며 다독였다.
내가 살만해지자 메이븐이 걱정됐다. 지금까지 프레오나 구석구석을 찌르고 다녔을 텐데 안 피곤하려나. 게다가 지금 시간도 엄청 늦었을 텐데.
“지금 새벽이야. 곧 해가 뜨겠어.”
시간을 궁금해하는 내게 철수가 시간을 알려 줬다.
새벽이라니, 엄청 잤나 보네. 메이븐은 안 잤을 테고.
“저는 괜찮을 겁니다. 형님은 들어가셔서 쉬세요.”
“괜찮아. 네 시종이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는데 나라도 있어야지.”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있으라는 부드러운 메이븐의 목소리에 조용히 웃었다.
4황자는 자신에게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라 주변을 살피지 못한 게 아닐까. 주변을 돌아보면 좋은 것들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긴, 퍼디스가 괴롭히고 아버지는 자신을 적국에 버리려 하는데 정신을 차릴 수 없었겠지.
유약한 아이였으니까.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제 걱정은 말고 들어가셔서 쉬세요.”
“알아서 할게. 너는 내 걱정 말고 자.”
전보다 확실히 가라앉은 열에 메이븐은 나를 욕조에서 꺼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옷을 벗기곤 시종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혔다.
아직은 어색한 형님에게 나체를 보이다니, 조금 부끄러운데….
메이븐은 힘이 쭉 빠져 있는 내 몸을 안아 올리곤 침대에 다가가 고이 눕혀 줬다.
“자자.”
이불까지 잘 덮어 준 다음,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눈을 쓸어내리며 감겨 줬다.
메이븐의 말대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어색한 손길로 내 배 위를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배가 아픈 게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나를 다독여 주고 싶어 하는 메이븐의 노력이 보였다.
“형님… 감사합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메이븐은 왠지 부끄러워하고 있거나 웃고 있을 것 같다.
내 감사 인사를 들었음에도 메이븐은 답을 하지 않았고, 내 배를 두드리는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네 형, 웃고 있어.”
알아, 그럴 거 같았어.
그저 무뚝뚝할 줄 알았던 메이븐이, 어쩌면 로이븐보다 더 상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르잖아, 로이븐은 겉으로는 날 챙겨 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얼른 없어지길 바라며 남은 권력을 쓸어모으려고 계획하고 있을지.
확실한 건 내가 직접 만나 봐야겠지만.
“만나러 갈 수는 있고?”
응, 언젠 한번은 가게 될 것 같아. 철수 너 이제 조용히 해. 나 잘 거야.
“알았어. 그럼 난 로테… 아니, 젠한테 다시 가 볼게. 간간이 와서 확인할 테니까 너무 아프지 말고.”
응, 얼른 가.
정령은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겠다. 그럼 나도 여기서 이러는 게 아니라 젠을 만나러 가는 건데.
“말했잖아. 나 혼자는 가능해도 누굴 데리고 가는 건 안 된다고. 내가 젠의 이야기를 너한테 전해 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해.”
그래. 그건 다행이야. 얼른 가서 내가 멀쩡하고 아픈 곳 하나 없다고 전해 줘.
“아, 이미 아프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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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이따가 잘 때 올게!”
철수는 내 무시무시한 속을 읽고 빠르게 도망쳤다.
저 새끼 오면 뒤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