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9)
“정신이 드나?”
눈을 뜨자마자 보는 얼굴이 오스먼드라니.
“어젯밤 내내 고열에 시달렸다 들었네. 몸은 어떤가.”
오스먼드는 내 이마를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어 열을 쟀다. 그러고는 자신의 온도와 비교하며 눈을 깜박였다.
“아직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예, 조…금.”
잠긴 목을 가다듬지 않고 바로 써서 그런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본 오스먼드는 무언가를 말하려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야, 궁금하게 왜 말을 하려다 말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진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오스먼드는 못 이기는 듯 입을 열었다.
“푹 쉬게.”
뭐야 싱겁게.
그는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려 했고, 나는 그런 오스먼드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 형, 님은….”
황제의 옷을 잡는 것 예의에 어긋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예의를 차렸냐? 그리고 지금은 아픈 내가 왕이다.
오스먼드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그는 내게 잡힌 자신의 옷자락을 잠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며 돌아다니더군. 그대가 얼른 나아야 고국으로 돌아갈 텐데 말이야.”
오스먼드는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마치 얼른 나으라는 무언의 압박과 같았다.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프냐? 나도 당한 거라고!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정령 같은 거 관심도 안 가졌을 거다.
“그대는 괜찮아지는 것만 생각했으면 좋겠군.”
그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내 손을 쳐냈다. 그러고는 협탁에 놓인 거대한 종이 뭉치를 들고 주저 없이 밖으로 나갔다. 여기까지 와서 일했나 보다.
오스먼드가 나간 뒤, 나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놀랍게도 방구석에 철수가 제 양팔로 무릎을 감싸 안고 웅크린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귀신인 줄 알았네.
“왜 그러고 있어?”
“미르야, 계약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부탁하기 미안한데….”
“왜.”
철수는 우물쭈물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심지어 계속 불러 주지 않았던 이름도 불러줬다. 뭔가 굉장한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
“저기… 이 몸이 너를 좀 자랑했더니… 다른 애들도 너랑 계약하고 싶다는데….”
“절대 안 돼.”
아직도 몸이 찌르르한데, 어제는 정말 뒤지는 줄 알았다. 미쳤다고 이 아픔을 또 겪어? 싫다. 몇 억을 준다고 해도 싫다.
“그… 지금은 이 몸의 기운에 적응돼서 아프지 않을지도 몰라. 엄청 튼튼해졌을 거라고.”
“싫어. 다른 인간 찾으라고 그래.”
매정하게 거절하는 내게, 철수는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구했지. 이제는 정령사도 없어. 덕분에 정령왕이 소환되기란 거의 불가능이라고.”
철수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소매를 찔끔찔끔 건드렸다.
그럼 뭐 해. 내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절대 안 돼.”
“그래. 들었지? 이 몸은 할 만큼 했다!”
철수는 내 주위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손을 허공에 훠이훠이 저으며 무언가를 밀어냈다.
여기 뭐가 있었던 거야?
“중급 정령들. 정령왕은 자리를 쉽게 못 비우니까. 밑에 있는 아이들을 시켜서 말을 전했지.”
“….”
“왜 그래? 지금도 아파?”
멍한 내 표정에 철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계속 아프긴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혹시나 내가 거절해서 다른 정령왕들이 앙심을 품고 괴롭히지는 않겠지…?
“모르지.”
“이 망할 거…”
“아마 그러진 않을 거야. 네가 괜찮다고 해도, 네가 다른 정령왕들을 소환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거고, 우리 넷이 같은 계약자에게 묶여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든.”
아무 대책 없이 제안했던 거야? 참 무모한 정령왕들이네. 세상 망가지는 것도 시간문제겠어.
“걔네도 이제 지친 거지. 이 몸이야 운 좋게 너를 만났다지만, 걔네는 언제 소환자를 만날지 모르는 거니까.”
철수는 씁쓸한 웃음 지었다.
정령왕들이 소환자를 만나지 못해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건 좀 슬프지만.
솔직히 내 알 바 아니다. 난 내 삶을 사는 것도 벅차.
“이제 안 올 거야. 아, 그래도 가끔 정령들을 보내 준대. 이 몸이 모르는 새에 너한테 가호를 내려준 거 같아.”
철수는 내 주변에 흐르는 공기를 보며 말했다. 정령왕들이 정령을 보내 준 거라고.
정령왕의 가호를? 왜? 내가 뭘 했다고?
“기쁜 거 아닐까? 정령 소환은 정말 오랜만이거든. 인간의 말로 ‘정령사’가 사라진 지 꽤 됐으니, 속성은 달라도 같은 정령으로서 기쁜 거지.”
“너도 기뻐?”
“이 몸은 뭐, 불쌍한 인간 하나 구제하는 셈 치는 거지.”
철수는 적선해 주듯 말은 저렇게 했지만, 표정으로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엘라임 녀석, 완전 고소하다.’라고 속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젠한테는 가 봤어?”
말을 돌렸다. 정령이든 뭐든 더는 엮일 생각도 없고, 슬슬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다시 열이 올라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할 것 같다.
“걔 걱정하지 마. 진짜 멀쩡해.”
철수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고, 자신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며 젠은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다.
철수의 기운에 몸은 한결 편해졌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인간인데, 네가 잘 붙어서 도와줘. 네가 젠을 도와주는 게 내 곁에 있는 것보다 나한테 더 도움이 될 거야.”
내 부탁에도 철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다른 인간들은 다 죽어도, 걔는 살아남을 거야. 이 몸이 단언해.”
젠은 끝까지 살아남을 인간이라고 철수는 진지하게 말했다. 정령왕이 인정할 정도로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도….
“그냥 가서 옆에 붙어 있어 줘. 그냥 내가 불안해서 그래.”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표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스먼드, 젠, 마린, 노반, 미네르바, 셀비스 등등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만능 표정이다.
철수는 그런 내 표정을 보며 잠시 고민을 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리쳤다.
“싫어. 피 튀는 곳은 찜찜하단 말이야! 아무리 마물이라도 전부 생명인데… 너희를 이해하지만 그래도 싫어.”
내게 멀찍이 떨어져선 절대 가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정령은 살생을 싫어했지. 잊고 있었다.
“알았어… 그럼 어디 밖이라도 놀러 갔다 와.”
“됐어. 네 옆에 있을래.”
철수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멀어졌던 거리를 살며시 좁혀 왔다.
귀엽긴.
“괜찮아. 너 솔직히 돌아다니고 싶잖아.”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철수에 나는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나는 화난 것도 아니고, 삐진 것도 아니다.
내 생각을 읽으며 나와 눈을 잠시 마주친 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정령은 호기심이 많다며, 로테가 살았던 때와는 바뀐 게 꽤 있을 테니까 구경거리가 꽤 많을 거야.”
손을 뻗어 철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르륵 손안에 감겨 오는 머리카락이 모래알이 흘러내리듯 빠져나갔다.
확실히 사람의 머리카락 같지 않았다.
철수의 머리카락도 좋지만, 지금은 손에 착 감기는 털이 예술인 노반이 보고 싶어졌다.
아니다. 내가 아프다는 걸 알면 노반이 슬퍼할 텐데, 적어도 멀쩡할 때 봐야지.
“너 다 나으면 갈게. 로테는 이걸 성장통이라 그랬어. 성장통을 겪을 때 곁에 아무도 없으면 쓸쓸하다고 다음 계약자도 아프면 꼭 옆에 있어 주라 그랬단 말이야.”
“난 멀쩌… 그래.”
난 내 곁에 철수가 없다고 서운하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지만, 철수가 기억하는 로테와의 추억을 망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철수는 내 속을 읽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넌 안 서운해?”
아, 속을 읽히니까 뭔 생각을 못 하겠네. 이거 너무 불편한데….
“로테랑 나는 다른 인간이잖아. 인간은 생각하는 게 다 달라.”
“로테는 모든 사람이 그럴 거라 했어.”
“…보통 사람이라면 서운해할 거야. 난 익숙해진 거고.”
철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숙해졌다고?’라고 되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전생자잖아.”
“그렇지.”
“전에는 내가 많이 아팠어. 아프기 전에는 곁에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다 사라지더라. 난 그게 익숙해진 거고. 그게 다야.”
처음에는 서운하고 쓸쓸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점점 익숙해졌다. 날 찾아오지 않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서운한 감정은커녕 ‘바쁜 일이 있겠지’, ‘온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와’ 같은 생각만 들 뿐,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철수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리곤 고개를 끄떡이며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넌 아직 익숙하지 않아.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밀어내는 거 같아.”
철수는 내 이마 위로 손을 올려다. 그리곤 따듯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어리광부려도 돼.”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익숙해져서 그래.”
“인간은 어른이 됐을 때 어리광을 부리지 못한다고 하잖아.”
내 이마를 작게 두드린 철수는 손을 내려 눈을 감겨 줬다.
“넌 아직 어리잖아. 네가 아무리 오래 살아왔다고 해도 이 몸에 비하면 한참 어려. 그러니 마음껏 어리광부려도 돼.”
철수의 말에 그동안 나는 합리화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외롭지 않다고 그냥 끝없이 믿고 싶은 대로 믿었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젠이 보고 싶었다.
“아, 맞다. 젠이 너한테 전해 달라 했어.”
철수는 젠이 내게 남겼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는지 내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말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래. 그리고 오래 안 기다리게 하겠대.”
철수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와 현재의 내 상황을 젠에게 전했단다.
그래, 내가 그거 말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는 사람한테 내가 아프단 얘기를 해?
“최, 최대한 빨리 오겠대. 네가 보고 싶어서 미치겠나 봐!”
나는 눈을 부릅떠 철수를 노려봤다. 그에 철수는 젠의 이야기를 하며 내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고, 그 작전은 성공했다.
나는 젠이 엄청나게 보고 싶어졌다.
“나, 너랑 만났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딱 5시간만 있다가 나오면, 여기도 한 달이 지나 있을 테니 그쯤에는 젠이 돌아오지 않을까?”
“아, 그거 벌써 막았지. 정령계와 가까운 곳은 위험하다니까.”
씨이… 좀만 늦게 막지.
“이 몸이 막은 거 아니야. 실피드가 막았어.”
“….”
나는 아깝다는 얼굴을 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이왕 젠의 배웅을 못 간 거, 거기서 좀 더 있을걸!
“요즘 정령사 없다며. 그런 곳이 있으면 정령사가 많아지지 않을까?”
“전에도 말해다시피, 무분별하게 정령을 소환해 대면 하급 정령들한테 좋지 않다니까.”
그랬었지…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철수가 슬퍼할 테니까 수긍하기로 했다.
“또 알고 있는 곳은 없어?”
“이 몸이 아는 한 없어, 실피드도 모르고.”
“그 실피드라는 정령은 네 보호자야? 뭐만 하면 다 실피드네. 너도 오래 살았을 텐데 실피드보다 아는 게 없는 것 같아.”
비아냥거리는 내 말투에 철수는 입을 삐쭉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삐졌나?
“농담이야. 다 같은 정령왕이라면서, 위아래가 어디 있어. 그나저나 그건 물어봤어? 내 속마음을 네가 못 읽게 하는 거.”
재빨리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앞으로도 정령왕들의 상하 관계와 관련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철수는 아까와 똑같이 입술을 쭉 내밀곤 입을 열었다.
“이 몸의 기운이 조금 강해지면 알아서 조절할 수 있을 거래. 이 몸에게 생각을 보내고 싶을 때만 보낼 수 있는 거지. 사실 지금도 읽기 조금 어려워.”
“다행이네, 나 방금 네 욕했거든.”
“허어…!”
철수는 눈썹을 잔뜩 끌어올려 화를 냈고 나는 그 모습에 웃음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