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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13화 (113/227)

113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0)

한숨 푹 자고 눈을 뜨니 오스먼드와 메이븐이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상대에게 사로잡혀 내가 일어난 것도 모르는 것 같아, 나는 헛기침으로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어났어?”

“예….”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메이븐이 다가와 도와줬다. 덕분에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나는 가만히 기대앉아 메이븐과 오스먼드를 지켜봤고, 그 둘은 신경전을 다시 벌이기 시작했다.

“들끓던 열도 떨어졌고, 이제는 괜찮아 보이는 것 같으니 2황자는 세네카로 돌아가도 되겠군.”

오스먼드는 메이븐에게 있는 눈치 없는 눈치를 다 주며 돌아가라 말했고, 메이븐은 갖가지 변명을 들어가며 거절했다. 어지간히 돌아가고 싶지 않나 보다.

“지금은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나중엔 어찌 될지 모르니 조금 더 지켜보고 이틀 후에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4황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예, 그러겠습니다.”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는 메이븐 때문인지 오스먼드도 차분하게 메이븐을 대했다.

메이븐은 결국 오스먼드에게 이틀이라는 유예 기간을 얻어 냈다. 오스먼드가 내 눈치를 조금 본 것 같지만, 착각이라고 믿고 싶다.

오스먼드는 내 눈치를 볼 인간이 아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오스먼드는 입을 다문 채 나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나갔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저 내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생각보다 경위 없는 자는 아닌 것 같네.”

메이븐은 오스먼드가 나간 문을 보며 말했다.

오스먼드가 경위 없는 자는 아닌 것 같다고? 웃기지 마라. 저 녀석이 내 방 발코니로 들어와 협박한 일을 듣고도 그 소리가 나올까.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메이븐은 나를 바라보며 눈썹을 올렸다. 오스먼드와 무슨 일이 있었었고 묻는 것 같았다.

나를 걱정하고 오스먼드를 아니꼬워하는 사람에게 ‘그’ 발코니 이야기를 해 줄 수도 없고.

가장 그럴듯하게 오스먼드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셋째 형님이랑 조금 닮은 듯해서요. 행동이랄까… 이래저래 퍼디스가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저자가 널 괴롭힌 거야?”

메이븐이 놀라 물었다.

퍼디스가 4황자를 괴롭힌다는 걸 알고는 있었구나. 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 그런데도 방관하고 있었다니 조금 야속했다.

“아뇨, 그러진 않았습니다. 제 말은 셋째 형님이 제가 아닌, 다른 귀족들에게 하는 행동을 말한 거였습니다.”

“그렇구나.”

메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을 돌리려는 듯 내 상태를 물었다.

“몸은 어때.”

“이젠 괜찮아졌습니다.”

그냥 근육이 조금 아릴 뿐, 아주 멀쩡하다. 조금 노력하면 아무 문제 없이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다.

“다행이네.”

나는 불과 얼마 전에 내리지 않는 열 때문에 앓아 왔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메이븐은 그 점을 지적하거나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사실 이미 변명도 다 생각해 놨던 터라 물어보지 않은 게 조금 아쉽다.

‘내 안에 고여 있는 마나가 폭주해, 몸 안에서 마나를 소거하기 위해 열이 올랐다…’ 같은 변명을 생각해 뒀었다.

나는 ‘돌연변이’ 마법사이자, 마나의 회로 구멍이 막혀 있는 특이 케이스니까. 그럭저럭 말만 되면 어떤 변명이든 가져다 쓸 수 있다.

‘돌연변이’라는 게 이럴 때는 좋네.

혹시라도 내게 ‘악마에게 홀렸다’와 같은 의심이 든다면 실력 있는 마법사를 데려와서 내 상태를 확인하면 된다.

마나 회로가 막혀 있는 것도 보일 테고, 별궁 지하실을 빠져나오느라 마나도 다 써 버려서 내 몸 안에 남은 마나도 없다.

“많이 괜찮아졌다면,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메이븐이 깨웠다.

메이븐은 재킷 안쪽에 손을 넣고 서신을 꺼내 내게 건네줬다.

“이건…”

“로이븐 형님이 네게 전해 주라던 편지야.”

메이븐이 건네준 것은 로이븐의 편지였다. 편지는 세 번 접혀 얇은 곤색 끈으로 봉해져 있었다. 직접 만져 보자 종이 재질이 좋은 것이 느껴졌다.

끈을 풀어 편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로이븐의 마음이 강렬한 글씨로 표현되어 있었다.

<보아라, 미르.

미르야. 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믿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널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메이븐을 보냈다. 메이븐은 유능하니 그가 널 찾아주겠지. 넌 어렸을 때 유괴당할 뻔한 적이 많았지. 이번에도 그런 하찮은 일이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만일 정말 네가 이 세상에 없다면, 나는 너의 안 좋은 상황을 예언한 성녀와 너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거라.

-너의 첫째 형이.>

짧은 편지에서 4황자를 향한 애정과 내게 해를 끼쳤을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4황자를 향한 로이븐의 애정은 진짜인가…?

“다행히 널 찾았으니 로이븐 형님이 이곳까지 올 일은 없겠어.”

“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이 성녀는….”

성녀도 찢어 죽여 주신다니 땡큐긴 하다만, 그보다 얜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애야?

“에반스터 경에게 들었던 그대로야. 그녀는 네가 프레오나에서 죽음을 당할 거라 예언했어.”

메이븐은 차분하게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성녀가 예언했던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귀족들도 많으며, 마음에 들어 하는 영식들도 많단다.

게다가 라이언 황제는 그 성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서 필릭스와의 약혼을 무산시키고 메이븐과 엮을 준비를 하고 있다나 뭐라나.

“힘드시겠군요.”

“확실히 귀찮긴 하다만….”

메이븐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잠시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성녀가 마음에 드십니까?”

조심히 물었다. 그에 메이븐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밝은 아이인 건 맞지만… 너에 대한 예언을 듣고 난 후부터는 모르겠네.”

메이븐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직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한다는 듯한 어두운 표정이었다.

“성녀가 너의 미래를 예언한 날, 로이븐 형님께선 칼을 뽑으셨어.”

그랬구나. 로이븐은 4황자를 진심으로 아꼈나 보네.

“라이언 황제께서 말리는 바람에 성녀의 목숨을 빼앗진 못했지만, 형님은 아직까지 칼을 갈고 계시는 중이지.”

“그러다 형님께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닙니까? 저는 정말 괜찮은데….”

“계획은 하고 계시지만 아마 어려울 거야. 황제께서 지키고 있으니….”

메이븐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식의 죽음을 예언한 자인데, 그자를 살려두다니…’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애는 없지만, 우리 노반이 죽을 거라 예언한 자가 있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죽일 수는 없구나. 그럼 철수가 사라질 테니.

그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 줘야지.

“그 성녀, 교황청으로는 가지 않는 겁니까?”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정세가 안정되면 대륙을 여행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하는 것 같고….”

교황청으로 가지 않는 성녀라… 확실히 조금 이상하네.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린 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 걸 본 표정도 보고 싶고.

“아, 오스먼드 폐하께서 세네카에 잠시 다녀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자, 평소 표정 변화가 없는 메이븐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며 놀랐다.

“그게 가능한….”

“예, 폐하께서 제가 너무 우울해 보인다며 고국으로 잠시 다녀오라더군요.”

“그럼 이번에 나랑 같이 가면 되겠….”

“아, 아뇨!”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메이븐의 말을 황급히 끊었다.

“전 같이 갈 사람이 있습니다.”

“이프리트 백작을 말하는 건가.”

“알고 계셨습니까?”

아, 이거 엄청 민망하네.

가족에게 연애사를 들킨 기분이랄까. 심지어 보통 연애사도 아니지. 상대가 나와 같은 남자인데….

숙연해진 분위기에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전과는 다르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는 고개를 숙였고, 그에 메이븐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누구를 사랑하든 훈수를 둘 생각은 없어.”

“정말입니까…?”

“네가 선택한 사람이니 좋은 사람이겠지. 하지만… 로이븐 형님은 모르겠네.”

로이븐의 이야기를 꺼낸 메이븐은 내 눈을 피했다.

그래, 그 동생 바보가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어떻게든… 될 겁니다.”

허락은 젠이 맡겠지. 나는 젠의 옆에서 새침하게 눈물만 흘려 주면 될 거다.

로이븐 형님도 내 눈물을 보면 마음이 조금 약해지지 않을까.

“형님도 형님이지만, 아버님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어.”

메이븐은 라이언 황제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난 이제 라이언 황제가 무섭지 않다. 의식주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는데. 옷, 밥, 집, 전부 나 혼자 구할 수 있다.

옷은 지금도 충분히 있고, 밥은 풀떼기만 있어도 살 수 있고 집은 오스먼드에게 뺏은 집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큰 돈도 벌 수 있고 삼시 세 끼를 전부 사 먹을 돈도 있다. 돈은 충분히 있으니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아도 문제없다.

나는 볼모로 버려진 몸, 굳이 세네카에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다.

“혹 아버님께서 제게 무리한 일을 시키신다면… 전 세네카에서 도망치겠습니다.”

메이븐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내 표정을 바라봤다. ‘애가 진짜 그 겁쟁이 도브로미르인가. 못 본 새에 많이 컸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도와줄게.”

메이븐은 부드럽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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