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1)
오스먼드가 메이븐에게 내린 유예 기간인 이틀이 지났다.
메이븐은 내가 배웅해 줄 틈도 없이, 세네카로 돌아가는 시간을 말하지 않고 홀연히 가버렸다.
메이븐이 내게 남긴 거라고는 따듯한 간호와 로이븐의 편지뿐이었다.
말 한마디도 없이 떠난 메이븐에게 전혀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아픈내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해준걸로 보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원래 4황자는 자신을 유일하게 챙겨 주던 사람이 로이븐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메이븐을 그저 로이븐의 명에 따라 자신을 돌보고 있다고 여겼던 거다.
하지만 실상 메이븐은 진심으로 4황자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동안 나를 챙겨 준 모습을 보면 말이다.
다음에 만나면 잘해 줘야지.
“좋으십니까?”
“뭐가.”
“입이 귀에 걸리셨습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오스먼드는 말 그대로 실실 처 웃고 있진 않았지만, 스멀스멀 입꼬리를 올리려고 했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철없는 어른 같았다.
“그동안 거슬렸던 것이 드디어 눈에 안 보이게 됐으니까.”
오스먼드는 피식 짧게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는 내게 눈치를 줬다. 얼른 네 앞에 놓인 일을 하라고.
“하아….”
한숨이 나왔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오스먼드는 나를 자신의 집무실로 부른 뒤, 내게 세세한 잡무를 시켰다.
내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던 철수도 흥미로운 일은커녕 끝없이 서류만 보고 있는 게 지루하다며 수도를 둘러보고 오겠다며 떠났다.
그만큼 지루한 일의 연속이었다.
오스먼드가 확인해야 하는 서류를 먼저 읽고 카테고리를 분류하라지를 않나, 조경을 해치는 나무를 벌목하라거나, 벤치를 놓을지 말지 같은 자잘한 일들에 서명을 하라지를 않나, 책을 읽으라 하지를 않나. 여러모로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을 시켰다.
지 옆에 딱 붙어 있는 비서한테나 시키지, 왜 나한테 시키는 거야?
“제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왜, 나와 함께 있기 싫은가?”
내가 먼저 물었건만, 그는 상관없다는 듯 내 물음에 대답도 해주지 않고 되물었다.
“아직 몸이 개운하게 낫지 않았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습니다.”
“저기서 쉬면 되겠군.”
오스먼드는 내 뒤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내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다고. 네 앞이 아니라.
“이곳은 폐하의 눈치가 보여 편하지 않습니다.”
“내 눈치를 안 보도록 노력하면 되겠군.”
“그냥 제가 방으로 돌아가면 깔끔하게 해결되는 문제 아닙니까?”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책상 위에 던지듯 놓았다. 덕분에 펜촉이 종이에 박혔고, 펜 끝에서 잉크가 흘러나왔다.
아, 젠장.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시원하게 화도 못 낸다. 던지지 말걸.
멀뚱히 흘러내리는 잉크를 보며 속으로 자책했다. 그에 오스먼드는 자신과 가까운 서랍을 열어 새로운 펜을 꺼내 내게 건네줬다.
“새 종이에 다시 베껴 적도록.”
“….”
진짜 짜증 나.
“이런 건 굳이 제가 아니어도 시킬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툴툴거리며 망가진 종이의 내용을 새로운 종이에 옮겨적었다. 잉크가 번져 지워진 곳은 대강 기억하는 대로 적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맞겠지.
“거기 틀렸어. 반대 세력에 대한 협의가 아니라, 논의.”
아, 틀렸구나.
근데 어쩌라고. 틀리면 뭐 어때.
“의미는 대충 맞습니다.”
그거나 이거나 말만 통하면 되지. 내 일도 아니고, 오스먼드의 일이니 최대한 대충할 거다.
“같은 의미라도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르니 가려서 써야….”
“예, 예. 협의가 아니라 논의. 고치겠습니다.”
오스먼드의 말을 끊었다. 그의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 오탈자를 고쳐 주는 게 나았다.
이미 써 버린 잉크를 지울 수 없어, 새로운 종이를 꺼내 다시 베껴 적었다.
완벽한 종이 낭비다.
“지루한가?”
무표정을 고수하며 글자를 적자, 오스먼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루하냐고? 당연하지.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고, 내가 왜 오스먼드의 집무실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전부 모르겠다.
“예, 지루합니다.”
“그럼 저기에 앉아 책이라도 읽고 있게.”
아니,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
나는 짜증이란 짜증을 얼굴에 전부 실으며 오스먼드를 바라봤다.
네가 내 표정이 본다면, 지금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
5분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스먼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내게 그 어떤 반응도 해 주지 않았고, 나는 결국 한숨을 쉰 채 오스먼드가 맡긴 일을 하나둘씩 처리했다.
내게 맡긴 서류가 반 정도 남았을 때, 오스먼드가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지만, 뜻하는 대로 놔둘 순 없어.”
“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어디 싸돌아다닌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방에 들어가겠다는데, 그것도 못 하게 해?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오스먼드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에 오스먼드는 내게 시선 한번 보내지 않고 살벌한 말투로 말했다.
“그대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는 세네카의 2황자가 아닌 황태자가 올지도 모르지.”
“아….”
하긴,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일을 크게 키우긴 한 거다.
사실상 강대국인 프레오나의 보호 아래서 물건도 아니고,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이 일은 몇백 년 후까지 고이고이 회자될 거다.
“다음은 언제까지 나타나지 않을지 궁금하군.”
오스먼드는 나직하게 읊조렸지만, 그 말은 나를 향한 화살과도 같아 아주 날카로웠다.
뒤끝 오지게 기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로테 별궁 가장 꼭대기 층에 올라가 눈을 감았고, 눈을 뜨니 한 달이 지나있었습니다. 저조차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인 척 오스먼드에게 호소했다. 그에 오스먼드는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곤 말했다.
“자세하게 물을 생각은 없으니 변명하지 않아도 돼.”
그는 그 이유에 대해 관심 없는 듯 굴었지만, 내가 말하기 곤란한 걸 알고 배려해 주는 것 같았다.
저번부터 오스먼드의 이미지가 점점 흐려지는 것 같다.
내가 아플 때 지켜봐 주고 은근히 내 부탁을 잘 들어줘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에 대한 내 경계심이 조금 허물어진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물으셔도 저도 모르는 일이라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실종된 후에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말을 믿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나으려나?
나는 중대 발표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게 깔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폐하가 바라시는 대로 세네카에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가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꽤나 먹음직스러운 미끼였는데, 잘 낚일 거라는 바람과는 달리 오스먼드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대꾸했다.
자기가 제일 원하는 일이었으면서.
“저도 가기 싫었지만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저도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몸 안에 있는 마력이 강하게 요동친 것과 상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마력?”
“가지고 있던 마나가 전부 사라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채워지겠지만,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라….”
나는 최대한 불안해하는 척,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당장 문제 되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이게 무엇인지 알려면 세네카에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프리트 경이 돌아오면 휴식 기간을 조금 갖고 세네카로 가겠습니다.”
“그래, 무리하지 말게.”
“그럼 제 일은 다 끝난것같군요.”
오스먼드를 향해 진한 텔레파시를 보냈다.
‘난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싶다.’ ,’난 네가 안 보이는 곳으로 돌아가서 쉬고싶다.’, ‘난 네가 안 보이는 곳으로 돌아가서 마음 편하게 있고 싶다.’ 같은 진한 텔레파시.
닿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를…”
닿았나?
오스먼드는 말끝을 늘이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내리며 마주했던 시선을 끊었다.
거절이다.
“혼자 두는 건 안심이 되질 않아.”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득 담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스먼드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대와 함께 있어 줄 자가 있다면 괜찮았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지 않나.”
그렇다. 마린도 없고, 노반도 없고, 당연하게 젠도 없다.
철수가 있긴 하지만… 철수는 다른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을 거고. 보인다고 해도 설명하기 조잡스럽다.
“그렇다고 내 시종을 그대에게 붙이는 것도 싫어할 테지.”
맞다. 오스먼드의 프락치가 곁에 붙어 있는 기분이라 유쾌하지 않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정도라면.”
여기서 잡일을 하고 있는 것보단 낫다.
오스먼드는 내 대답이 의외인지 잠시 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보리언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뜻대로 하게 해 줘.”
고개를 숙인 보리언은 자연스럽게 내 뒤에 섰다.
얘 말고 다른 애 보내 주면 안 될까. 얘는 조금 부담스러운데….
“….”
“왜, 마음에 안 드는가?”
내 못마땅한 표정을 읽었는지 오스먼드가 장난스레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문제없다며 웃어 보려 했다. 하지만 장난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오스먼드가 아니꼬워서 그런지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기만 할 뿐 예쁘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래, 집무실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만으로 어디야.
“하하. 그럼 저는 이만 방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급적이면 황실을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예, 그러겠습니다.”
짧게 인사를 올리는 둥 마는 둥 하며 집무실을 나왔다.
보리언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내 뒤를 따라붙었다. 나는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내 방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